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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판 쇼생크 탈출, 그러나 불행했던 광해군의 아들 이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6. 28. 06:26

     

    '쇼생크 탈출'은 1995년 나온 영화이니 벌써 30년이 흘렀다. 그럼에도 지금도 심심찮게 회자되는 것은 당연히 영화가 주었던 강한 임팩트 때문일 터인데, 그중에서도 압권은 아마도 노튼 교도소장이 앤디가 사라진 감방에 걸린 라켈 웰치의 전신사진을 휙 하고 뗐을 때일 것이니, 사진 뒤에서 앤디가 20년을 걸쳐 뚫은 땅굴이 드러났을 때 관객 모두는 경악했다. 이 임팩트를 더욱 살리기 위해 원작자인 스티븐 킹도 소설의 제목을 <리타 헤이워스와 쇼생크 탈출(Rita Hayworth & Shawshank Redemption)>로 지은 듯하다. (앤디의 감방에 걸린 첫 사진은 리타 헤이워스였다)

     

     

    바로 이 장면!
    앤디의 감방에 걸렸던 리타 헤이워스 사진
    노튼 소장이 감방 시찰을 나왔을 때의 위험천만했던 순간!

     

    개인적으로 감동 깊었던 장면은 사실 이것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레드가 가석방된 후 앤디와의 약속 대로 벅스턴의 돌담을 찾았을 때, 그리하여 돌담 떡갈나무 밑에서 돈과 편지가 든 도시락통을 발견했을 때이다. 레드는 긴장한 얼굴로 좌우를 살핀 후 담장에 기대앉아 앤디가 써 놓은 편지를 읽는다. 만남을 희망하는 그 짧은 편지 말미의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Remember, Red. Hope is a good thing. Maybe the best of things. and no good thing ever dies. (기억하나요, 레드? 희망은 좋은 겁니다. 아마 가장 좋은 것일지도 몰라요. 그리고 좋은 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벅스턴 초지의 떡갈나무를 찾아나선 레드
    앤디가 남긴 편지를 읽는 레드


    하지만 광해군의 아들 이지(李祬, 1598~1623)의 소중한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사라졌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西人)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적폐 청산'으로, 그 행태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즉, 적폐로서 지목된 북인(北人) 정권의 이이첨·정인홍·류희분·박자흥 등의 80여 명은 참수되거나 자결하고, 구 정권에 부역한 200여 명이 귀양 보내졌던 바, 그것이 거의 광풍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니 어린 하급 궁녀들까지 끌려와 피투성이가 됐는데, 그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 세자 이지가 붙잡혀왔다. 당시의 상황을 시간적으로 재구성하면, 반군이 쳐들어 온 3월 12일 밤 광해군은 내시가 걸쳐 준 사다리를 타고 담을 넘어 창덕궁을 빠져나왔고, 세자 이지 역시 담을 넘어 광해군을 뒤따랐으나 어둠으로 인해 뒷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광해군은 지금의 종로구청 옆 중학천변에 살던 의원 안국신의 집에 숨었다가 다음날 아침 안국신·정남수의 고변으로  붙잡혀 속수무책으로 창덕궁으로 끌려왔다. 세자 이지는 무작정 북쪽으로 달려 지금의 세검정 부근 옛 장의사(莊義寺) 옆 민가에 숨었다가 주민의 신고로 붙잡혀 끌려왔는데, 이 무렵 광해군은 다시 서궁(西宮, 덕수궁)으로 끌려 가 인목왕후(영창대군의 모)와 대면하고 있어 부자간의 민망한 상봉을 피할 수 있었다.  

     

     

    인목왕후가 유폐됐던  석어당(昔御堂) / 광해군은 이곳에서 인목왕후 앞에 무릎 꿇려진 후 36개의 죄를 공박당한다.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오른 즉조당(卽祚堂) / 능양군은 인목왕후에게 어보를 건네받고 여기서 즉위식을 갖는다.

     

    인목왕후는 제 아들 영창대군을 증살(蒸殺, 쪄 죽임)한 죄를 물어 광해군을 처형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가혹한 처사에 부담감을 느낀 새 국왕 인조와 반정세력은 광해군과 세자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키고 강화도로 유배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반정세력은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반정의 명분의 하나로 삼았기에 광해군을 죽이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도 했다. (이런 걸 보면 차라리 옛날이 원칙과 명분에 충실한 듯싶다)

     

    아들 이지는 폐세자되었고, 마찬가지로 서인으로 강등된 세자빈과 함께 강화부 교동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됐다. 위리안치는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격리시키는 형벌이었다. 적소지는 다르나 아버지 광해군도 강화부 교동도에 위리안치됐는데, 이미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과 조카 능창군이 교동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고, 어린  영창대군이 유배돼 증살된 곳도 이곳 교동도였다. 과거에는 폐주 연산군이 교동도에 유배되어 사망했다.  

     

    이지가 아내와 함께  귀양가는 길에 읊었다는 아래의 한시가 야사 < 속잡록(續雜錄)>에 전한다.

     

    먼지 같은 환영(幻影)이 뒤범벅되는 것이 마치 광란의 물결인 듯하다

    걱정한들 무엇하랴? 스스로 평안히 마음먹자꾸나

    지난 26년간의 세월이 참으로 꿈같도다

    이제 흰 수염 되어 구름 속으로 가겠구나

     

    塵幻飜覆似狂爛

    何必憂愁心自憪 

    似二十六年一夢

    好須歸白雲間 

     

     

    교동읍성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233의 연산군 유배지 / 광해군 유배지도 필시 이곳이거나 근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 유배지의 교동도 유배문화관 / 강화에 유배 왔던 고려·조선의 왕과 왕족에 대해 설명해 놓은 곳이다.
    옆에 재현된 위리안치

     

    그리고 교동도 위리안치소에서 읊었다는 다음과 같은 시가 <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본시 한 뿌리인데 어찌 이다지도 야박한가
    하늘의 이치라면 서로 사랑하고 슬퍼해야 하지 않소
    어찌하면 이 유배지를 벗어나
    녹수청산 자유롭게 오가런가

     

    本是同根何太薄

    理宜相愛亦相哀

    緣何脫此樊籠去

    綠水靑山任去來

     

    머리가 좋았던 이지는 그 방법을 스스로, 다양하게 마련했다. 그는 위리안치된 상태에서도 아내와 함께 보름간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해 얻어낸 편의를 이용해 탈출을 시도했다. 부부는 단식투쟁으로 코 앞에서 지키던 포졸들의 감시망을 멀리 늦출 수 있었고, 의복을 단정히 하겠다며 가위 인두 다리미 등의 생활용품을 얻어내기도 했는데, 그들은 가위와 인두를 이용해 탈출용 땅굴을 팠다. 가위와 인두로 흙을 파고 다리미로 퍼내 자루에 담는 식으로서, 아내는 그렇게 담긴 흙을 날라 방과 부엌 등에 깔아 숨겼다.

     

     

    '옛날 물건'에서 빌려온 인두와 다리미 (판매가 ₩30,000)

     

    부부는 그렇게 열심히 땅굴을 팠고, 26일 만에 70척(약 21m)의 땅굴을 완성했다. 그리고 26일째 되는 5월 22일 밤, 드디어 이지가 땅굴 속으로 들어가 대망의 엑소더스를 이루었고, 아내 박씨는 나무 위에 올라가 끝까지 망을 보았다. 이지는 이렇게 위리안치소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이 단 사흘뿐이었으니, 배를 구하려 해변을 어정대던 이지는 곧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아마도 그는 지방으로 가 반정세력을 칠 근왕병을 구하고자 했던 것 같다)

     

    안타까운 상황은 부인에게도 벌어졌다. 남편이 달아날 때 아내 박씨는 나무 위에 올라가 망을 보다 떨어져 몸을 크게 상했는데, 남편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낙담해 목을 맸다. 폐세자빈이 자진했다는 사실은 곧 조정에 보고됐고, 호조가 옷과 이불을 보내 염습하고 빈소를 차려주었다. 박씨 부인은 밀양박씨로 인조반정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박자흥의 딸이며, 참수당한 이이첨이 그의 외조부이다.  

     

    폐세자의 처분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었다. 영의정 이원익과 인열왕후(인조의 왕비)는 그렇다고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으나, 인목왕후와 사헌부는 처형하라 했는데, 결국 삼사(사간원·홍문관·사헌부)의 합의로써 자진해서 죽는 쪽의 결론이 났다. 여기에는 폐세자 이지가 강화부윤과 관리들 앞에서 "끝까지 호걸로써 일을 행하겠다"고 한 발언이 나쁜 쪽의 결론을 내는 데 도움으로 작용하였다. (누군가의 고변이었는데, 진짜 이런 말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금부도사가 내려 와 명을 전하자 이지는 담담히 명을 받아들였던 바, 몸을 씻은 후 머리를 빗고 의관을 갖추었다. 이어 칼을 찾아 손톱과 발톱을 깎으려 했으나 금부도사가 그런 명을 받은 바 없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지는 "어차피 염을 할 것 아닌가? 정 안 되다니 죽은 뒤라도 깎아주게"하고는 돗자리를 펴고 광해군의 위리안치소가 있는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 방안에 들어가 목을 맸다. 하지만 중간에 줄이 끊어졌고, 다시 명주실 줄로 바꿔 맨 후 힘겹게 세상과 하직할 수 있었다.

     

    폐세자의 묘소는 최근까지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7년경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덕릉마을에 있는 전주이씨 묘역에서 이지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묘표 없는 묘소가 확인됐다. 이 무덤을 이지의 것으로 판단한 것은, 세자 이지가 세자빈과 함께 수락산 옥류동에 묻혔다는 기록과 더불어 무덤의 호석·상석·향로석 및 석인상의 조각 솜씨와 규모가 대군(大君)의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까닭이었다. 이에 폐세자 이지의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 것인데, 다만 무덤은 관리가 안 돼 무척이나 황폐하다. 

     

     

    덕릉마을 전주이씨 묘역에서 본 수락산
    샤스타데이지 꽃밭 속의 전주이씨 묘역
    이지의 묘가 있는 곳 / 나무들 사이로 좌우 문석인이 보인다.
    봉분의 흙이 거의 사라진 이지의 묘 / 웬지 가슴 아프다.
    일찍이 본 적 없는 커다란 향로석
    경사도를 느끼게 하는 이지의 묘역 / 보기 보다 훨씬 가파르다.
    체념한 듯한 표정의 좌우 문석인

     

    자식으로는 이아기(李娥其, 1618~?)라는 딸이 유일한 혈육이다. 이아기는 세자가 이름 모를 후궁과 낳은 자식인데, 이지가 유배된 후 궁녀에게 양육되었고 인조가 억지로나마 정을 베풀었던 바, 호조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게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장성해서는 의성김씨 김문거(金文擧)에게 하가(격을 낮춰 결혼함)했으며 이후로는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후궁으로는 소훈(세자궁에 딸린 종5품 내명부의 품계) 양천허씨를 두었다.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蛟山 許筠)의 딸이다. 양천허씨는 인조반정 후 사가(私家)로 나가 살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1618년 8월 그의 아비 허균이 역모로 능지처참당했을 때 이미 쫓겨났을 개연성도 있다. 광해군은 아들 이지 외에 딸 하나를 더 두었는데, 그가 45세에 얻은 유일한 딸 무덤을 앞서 찾은 바 있다. (☞ '광해군 딸의 무덤을 찾아가다')

     

     

    덕릉마을 표석과 흥국사 표지판
    전주이씨 덕흥대원군파 재실 덕흥사(德興祠)
    재실 서쪽의 수령 550년 된 보호수 느티나무
    가을 풍경 / 빌려온 사진
    이지 묘역에서 내려본 풍경 / 재실이 보인다.
    부근의 무덤들
    광해군 딸 무덤이 있는 남양주시 사릉 공동묘지
    금계국 꽃밭 속의 광해군 딸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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