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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실이 사라지는 곳, 성북동 길상사와 한국 언론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5. 7. 1. 23:31

     

    성북동 길상사에 대해서는 이미 몇 차례의 글을 썼다. 두 번째 글인 '여간첩 김소산과 대원각 & 길상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장안의 유명한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마담이자 주인인 김영한이 1995년 법정스님에게 부지와 건물 전체를 시주하며(7천여 평, 당시 시가 1천억 원) 길상사라는 사찰로 재탄생하였다. 이때 그는 "1천억원이란 돈도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했다. 이후 김영한은 길상사의 한편에 은거하다 1999년 11월 생을 다할 무렵,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이후 길상사는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순애보가 묻힌 곳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소유했던 곳으로 상기되기도 한다.

     

     

    겨울 길상사 / 나무위키 사진
    요정 본채로 쓰였던 길상사 극락전

     

    이후 월북 시인 백석에 대한 김영한의 순애보가 다시 회자되었다. 백석을 향한 김영한의 사랑이 요즘의 물질만능주의 사회에 일으킨 파장은 맑고 깊은 호수의 수면을 스쳐간 이름 모를 산새가 일으킨 물결만큼이나 아름답고 신선한 것이었기에.... 그래서 나도 지금은 길상사라는 사찰이 된 빨갱이 요정 대원각에 대해 쓰면서도,(박헌영 남노당에 희사된 돈으로 지어진 건물이므로) 또 박헌영의 남한 내 유일한 혈육인 원경스님(2021년 작고)이 김영한을 상대로 벌인 대원각 반환 소송에 대해 쓰면서도 백석에 대한 김영한의 순애보만큼은 훼손시키지 않았다.

     

    소송 당시 경기도 평택 만기사 주지였던 원경스님의 대원각에 대한 소유권 주장의 근거는 다음 같았다.

     

    해방 후 이승만은 귀국해 친일 재벌 장진영(張震英)의 돈암장(敦岩莊)에서 살았고, 김규식은 친일 재벌 민규식(閔奎植)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살았으며, 김구는 금광 재벌 최창학(崔昌學)의 경교장(京橋莊)에서 살았다. 박헌영은 비슷한 시기 전남 함열 갑부 김해균(金海均)이 제공한 혜화장(惠化莊)에서 살았는데, 이후 박헌영은 혜회장에서 1945년부터 3년간 거주하며 조선공산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박헌영이 살던 성북동 혜화장

     

    그런데 이 무렵 김해균은 별서(別墅) 형식의 한옥(대원각)을 지어 박헌영의 사저(私邸) 겸 남로당 본부로 쓰도록 권유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집의 규모가 너무 커 노출이 쉽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구조라 하여 당시 사용하던 혜화동 혜화장에 그대로 머물렀고, 건물은 과거 경기고등학교 재학 당시의 신원보증인이던 조용구에게 맡겼다. 그런데 그것이 혼란기에 조용구의 집안사람 조봉희에게 넘어갔고 다시 김영한에게 넘어갔는데, 이때 조건이 '시절이 조용해지면 다시 원소유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원경스님의 요지인즉, "그런데 김영한은 이 건물을 요정 대원각으로 꾸며 운영하다 본래의 약속을 어기고 법정스님에 일방적으로 시주했다는 것"으로, 그는 그 증거로서 아래의 길상사 등기부등본을 들었다. 길상사 땅의 등기부등본을 보면 소유권이 정말로 1955년 조용구의 집안 사람인 조봉희(왼쪽 점선 원)에서 김영한(오른쪽 점선 원)에게 넘어간 것으로 돼 있다.

     

     

    조봉희에서 김영한으로의 소유권이 이전이 기재된 등기부등본.

     

    이후 소는 취하됐지만, 당시 원경스님은 대원각을 되찾아 사회 개혁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만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진술과 주장을 한 원경스님은 대체 누구일까? 원경스님은 박헌영과 두 번째 여인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박헌영의 첫 번째 부인 주세죽이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상적 동지였던 반면 정순년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저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였다. 

     

    두 사람을 연결해준 인물은 정순년의 당숙 정태식으로, 경성제대를 수석입학하고 수석졸업한 수재로 알려져 있다. 빨갱이신문 <해방일보>의 주필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똑똑함이 죄였을까, 그 역시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1939년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난 박헌영이 홀로 힘겨운 생활을 하자 전라도 덕유산 포수인 사촌형의 딸 정순년을 데려가 박헌영의 수발을 들게 한 것이 임신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임신해 출산한 사실을 안 정순년의 부모는 노발대발하여 그녀를 끌고 고향으로 데려갔고, 이후 병삼이란 이름의 핏덩이 사내는 부모 없이 무진 고생을 하며 자라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 스토리의 내레이터 원경스님이다. (그를 남파간첩 김삼룡이 기른 이야기, 지리산 빨치산 사령관이 되는 이현상과의 만남에 관한 스토리는 따로 싣기로 하겠다)  이후 조계종 대종사를 지내기도 했던 원경스님은 2021년 12월, 법랍 62년, 세수 81세로 입적했다. 

     

     

    원경스님 박병삼 (1941~ 2021)
    말년의 김영한이 기거하던 길상사 계곡 건너 숲속의 길상헌
    길상사 내 길상화 사당
    사당 내 길상화 영정 / 길상화는 법정스님이 지어준 김영한의 법명이다.

     

    그런데 최근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함흥기생 김영한과 함흥 영생교보 영어교사였던 미남 청년 시인 백석과의 운명 같은 만남, 그리고 백석으로부터 자야, 혹은 나타샤라는 이름을 작명받은 후 지고지순한 사랑을 나누었으나 또한 운명 같은 이별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실은 거의가 김영한이 지어낸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김영한은 본래 거짓말이 능숙하고 허언증이 있는 데다,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하겠다고 나선 것도 그의 저서 <무소유>에 감명을 받아서가 아니라 막판의 거액 세금 추징을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주장이 출현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첫 주장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이동순 교수에게서 나왔다. 두 사람에 대해 모두 잘 알고 있다는 이 교수는 김영한이 백석과 사귄 것은 사실이나 이는 아주 잠깐이었고, 백석과 헤어진 후 계속 기생의 길을 걷던 김영한은 당시의 유력 정치인이던 국회부의장 이재학의 세컨드가 되었고, 1955년 그와 공모해 조봉희 명의의 대원각(당시 이름은 청암장)을 제 앞으로 등기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기록이 있는 위 등기부등본을 원경스님이 소송 때 제시한 바 있다) 

     

    김영한은 요정 개업 후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하지만 이후 요정정치가 시들어지자 김영한은 대원각을 유지조차 하기 힘들었고, 엄청난 관리비에 세금까지 뒤따르자 희사하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는데, 그 대상으로 찾아낸 이가 법정스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김영한의 희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니, 김영한은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당시 설법 차 LA를 방문한 법정스님을 만나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이래 수차례나 시주를 거절당했다.

     

    그러다 1995년 마침내 법정스님께서 청을 받아들여 본인의 출가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조계종에 등록하였고, 이후 1997년 '길상사'(吉祥寺)로 이름으로 시민에게 개방되었던 것이 실제의 본말인데, 이동순 교수는 이 과정에서 시인 백석의 이미지가 이용돼 소비되었다고 지적했다. 법정스님도 이와 같은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그토록 기부를 거부한 것일까? 모든 내막을 알고 계실 법정스님마저 고인이 되었던 바, 확인할 길은 없다. 하지만 굳이 들을 필요는 없는 상황이다. 

     

    다만 북한에 남은 백석이 1958년 "이데올로기만큼 문학적 요소도 중요하다"는 평소의 주장에 자아비판을 강요받고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 축산반으로 쫓겨났다 1995년 겨울에 걸린 감기가 회복되지 않아 이듬해 1월 삼수군 관평리에서 사망했다고 쓴 앞서의 내용은 수정해야 겠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달리 백석이 숙청된 해는 1963년이며 (그는 1962년 북한 〈아동문학〉 6월호에 실린 수필 〈이솝과 그의 우화〉를 마지막으로 한 편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다) 죽은 날짜는 1996년 2월15일경이라고 한다. 

     

    이상을 취재한 작가 송준의 말에 따르면, 백석의 부인 이윤희는 사망 전 남편이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원고를 불태워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했다. 아래 사진은 작가 송준이 입수한 백석의 말년 모습들이다. 고생을 한 얼굴이나, 말년에도 미남자의 자취가 남아 있다. 

     

     

    왼쪽은 북한 인민증에 붙어 있는 백석의 증명사진이고, 오른쪽은 1980년대 중반에 촬영한 가족사진이다. 부인 이윤희, 둘째 아들, 막내 딸과 함께 찍었다.
    김영한의 스토리가 쓰여진 사당 앞 안내문에 실린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나타샤는 김영한이 아닐 수도 있다.

     

    최근, 한국에 6.4대선 UN 투정투표 감시단의 일원으로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모스 탄(Morse H. Tan)이 한국의 6.4대선이 부정선거임과 아울러 이재명의 어린 시절의 범죄에 대해 기자들 앞에서 대놓고 떠들어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러자 미국 신문들은 대서특필까지는 아니더라도 당연히 기사화했는데, 이에 미주중앙일보가 따라 보도했다가 입틀막을 당했고 한국에서는 조선비즈가 관련 보도를 냈다가 다시 입을 닫았다.

     

    이제는 공공연한 비밀인 그것들에 대해 대통령실은 항의나 해명을 하기는커녕 입틀막에 급급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던 어제(6월 30일) 한국일보에서 드디어 처음으로 기사화되었다. 한국일보는 "'부정선거론' 한국계 법학자, '이재명 소년원 복역' 허위사실 유포"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허위 사실'이라는 단어를 썼긴 했지만 내용은 보도를 한 것인데, 작은 제목으로 "트럼프 1기 대사 출신 모스 틴 교수 위싱턴 회견서 '집단 강간 살해 연루" 등을 언급했다. 후속 보도가 나올지 기대된다.

     

    민주주의는 진행되었다고 하는데, 왜 지금의 언론사는 과거와 달리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사라지는 곳이 되었는가, 그리고 국가적 망신이자 개인적 모독이기도 한 이 허위보도에 대해 대통령 실은 왜 반응하지 않는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민주당에서 정체불명이라고 말하는 자의 정체.
    대통령실은 왜 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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