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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간첩 김소산과 대원각 & 길상사
    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0. 29. 12:50

     

    장안의 유명한 요정이었던 대원각은 마담이자 주인인 김영한이 1995년 법정스님에게 부지와 건물 전체를 시주하며(7천여 평, 당시 시가 1천억 원) 길상사라는 사찰로 재탄생하였다. 이때 그는 "1천억원이란 돈도 그 사람(백석)의 시 한 줄만 못하다"라고 했다. 이후 김영한은 길상사의 한편에 은거하다 1999년 11월 생을 다할 무렵, "내가 죽거든 화장을 해 눈이 많이 오는 날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이후 길상사는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순애보가 묻힌 곳으로 기억되기도 하고, 법정스님이 무소유를 소유했던 곳으로 상기되기도 한다.

     

     

    길상사 극락전이 된 대원각의 본채
    말년의 김영한이 기거하던 계곡 건너 숲속의 길상헌
    법정스님의 유품과 영정이 보관돼 있는 진영각 안의 나무의자 / 법정스님이 장작개비를 이용해 손수 만든 의자로 그가 살아생전 유일하게 애착을 가지고 소유했던 물건이다.
    말년의 김영한
    김영한의 연인이던 시인 백석
    무소유를 실천하고 간 법정스님

     

    그런데 김영한의 희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았으니, 김영한은 1987년 미국에 체류할 당시 당시 설법 차 LA를 방문한 법정스님을 만나 처음으로 이야기를 꺼낸 이래 수차례나 시주를 거절당했다. 그러다 1995년 마침내 법정스님께서 청을 받아들여 본인의 출가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조계종에 등록하였고, 이후 1997년 길상사’로 이름으로 시민에게 개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시민공원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대원각의 내면을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우리의 아픈 역사의 기억도 투영된다. 앞서도 잠시 말했지만, 이곳은 원래 해방 후 남로당 자금으로 공산주의자들의 본부로서 지어진 집이었다.(아직은 밝히기 불편한 독지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집을 남한노동당의 영수 박헌영에게 주어 그의 사저(私邸) 겸 남로당 본부로 쓰도록 했다. 그렇지만 박헌영은 집의 규모가 너무 커 노출이 쉽고, 또한 자신과 같은 사회주의자가 대저택에 사는 것은 이율배반이라며 거절했다.

     

    이와 같은 주장을 한 사람은  2000년에 나타난 원경스님(당시 70세)이란 분으로, 그는 다름 아닌 박헌영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그는 "이후 이 건물은 남로당원인 조용구에게 맡겨졌는데, (조용구가 박헌영의 경기고등학교 재학 당시의 신원보증인이라는 것까지는 학적부로서 증명이 됐다) 그것이 혼란기에 조용구의 집안사람 조봉희에게 넘어갔고, 다시 조선 권번 출신의 기생 진향(眞香, 김영한)에게 넘어갔으며, 이때 조건이 '시절이 조용해지면 다시 원소유주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시인의 고향 - 유명 시인 백석과 유명 빨갱이 박헌영 & 길상사'

     

    * 그의 요지는 그 원소유주가 자신이라는 것으로, (고등학교 시절에 김영한으로부터 때가 되면 돌려주겠다는 말을 직접 듣기도 했다고 한다) 앞서 게재한 소유권 이전이 표기된 등기부등본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으나, 이후 그 조계종 최고 법계(法階)인 대종사(大宗師) 법계를 받고,(2015년) 길상사의 권리도 조계종으로 이관되며 진실공방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그때 우리가 지금껏 모르는 다른 말도 했으니, 이 건물은 대원각 이전에 조봉희 명의의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으로 운영되었다고 했다. 그러다 제3공화국이 들어섬과 함께 김영한이 인수해 대형 요정 대원각으로 키웠는데, 원래 대원각의 주인은 조봉희의 딸 김소산이었다는 것이다.(훗날 여간첩으로 유명해진) 그리고 또 박헌영과 그 주변에 관한 이야기도 했는데, 우선은 박헌영에 관한 스토리가 흥미롭다.

     

    (원경스님의 진술에 따르면) 박헌영은 1900년 5월 1일 충남 예산에서 미곡상 박현주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예산에서 국밥집을 하는 과부 이학규로, 전 남편 사이에서 난 조봉희라는 딸을 키우고 있었다. (남편은 예산의 금광 개발업자였는데 결핵으로 일찍 사망했다) 그리고 그때는 박현주의 본처가 시퍼렇게 살아 있어 어쩌지 못하다가  본부인이 죽은 후 비로소 살림을 합쳤다. 박헌영의 나이 다섯 살 때였다.


    이처럼 집안이 복잡해서인지 이학규의 딸 조봉희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 중이 되겠다며 집을 나갔다. 그리하여 서울 보문동에 있는 비구니 사찰 보문사의 행자승이 되었는데, 어느 날 이 절에 시주를 많이 하던 보살 한 분이 자신의 수양딸로 삼겠다며 조봉희를 데려갔다. 그리고 정말로 수양딸이 되었는데, 문제라면 그 보살이 권번(券番, 기생 교습소)을 운영하던 여자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봉희는 자연스럽게 기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조봉희가 잠시 머물렀던 보문동 보문사

     

    한편 박헌영은 예산의 대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와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 일어난 1919년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그는 당시 일제의 총칼 앞에 무력하게 진압되는 민중을 보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상해로 갔다. 하지만 그는 중국에서 상해 임시정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되니 당시의 신사조(新思潮)인 사회주의에 경도돼 고려공산당청년회 설립에 나섰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이때 여성공산주의자였던 주세죽과 결혼했다)

     

     

    그 무렵의 박헌영과 주세죽(朱世竹 1901~55) / 주세죽은 독립운동의 공로로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박헌영은 1955년 북한에서 '미제의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으나 주세죽은 한국에서 명예가 회복된 셈이다.

     

    박헌영은 공산주의를 국내에 입식시키기 위해 1922년 귀국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며 투옥되었고,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돼 1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그는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 1925년 4월 김약수·김재봉 등과 함께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이로 인하여 1925년 11월 다시 체포돼 투옥되었다. 당시 박헌영은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때 얻은 병으로 1927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주세죽은 남편과 함께 체포되어 1개월가량 갇혀 고문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다시 한 달 간 감옥 신세를 져야 했다. 이후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나오자 두 사람은 1928년 8월 두만강을 건너 블라디스톡으로의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하여 성공한다.(그때 주세죽은 만삭의 몸이었다)

     

    그리고 1929년 2월 망명 혁명가로 인정받아 소련공산당에 입당하고 모스크바 국제레닌대학에도 들어가게 된다. 주세죽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추운 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딸(박 비비안나)을 낳았으며 이듬해 1929년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 입학했다.

     

     

    박헌영 부부와 딸 박 비비안나

     

    박헌영은 국제레닌대학 졸업 후 1932년 다시 상해로 왔다. 그리고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다 1933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한 그는 조선공산당의 한 조직인 '경성 콤뮨그룹'의 책임자가 되었다가 1940년 초에 불어닥친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청주로 피신했고, 다시 전라남도 광주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에 김성삼이란 이름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다 8·15해방을 맞는다. 이후 남한 좌익세력의 우두머리로 빨갱이 활동을 한 것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1932년 12월 상하이에서 체포돼 압송되는 박헌영 / 이후 그는 대전형무소에서 6년간 복역한다. (옆에 선 남자는일본 형사인가? 암튼 잘생김!)

     

    다른 한편, 박헌영의 씨 다른 누이 조봉희는 서울에서 기생 생활을 하다 전북 익산의 만석꾼갑부 김병순을 만나게 되고 그와의 사이에서 김제술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김제술은 동경제대를 나온 당대 최고의 엘리트로 앞길이 무궁무진했으나 역시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박헌영의 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46년 5월 '조선 정판사 사건'(위조지폐를 찍어 남한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던 사건)으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1946년 박헌영과 함께 남한을 탈출해 입북했다.

     

    그리고 조봉희는 김제술 외에 딸이 또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김소산(본명 김정진)이다. 딸은 어머니를 닮아 무척 미인이었다고 하며, 이화여전을 나오고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재원이기도 했다. 김소산은 남한 좌익세력의 우두머리인 외삼촌 박헌영을 존경했다. 대원각(그때는 이 이름을 가지기 전이지만) 큰 집을 마다하고 허름한 혜화장을 고집하는 박헌영을 보고 사회주의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아울러 어머니 조봉희로부터도 "네 외삼촌은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니 너도 그를 도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살았다고 하는 바, 그가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어쩌면 수순이었다. 

     

    조봉희는 박헌영이 마다한 그 한옥저택에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차렸다. 하지만 말이 좋아 한식당일 뿐 권번 출신의 기생인 조봉희가 평범한 한식당을 차릴 리 없었다. 말하자면 조봉희가 운영할 때도 기생집이었고, 그의 딸 김소산이 운영할 때도 기생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 김소산은 자야라고 불리던 새끼 마담 격의 기생을 매우 아꼈는데, 그가 바로 길상화(법정스님이 지어준 법명) 김영한이다. 

     

    흔히들 김소산을 여간첩이라 하고 '한국의 마타하리'라고도 부르지만, 이것은 과거 오재호 극본의 라디오 드라마 '특별수사본부'가 만들어낸 픽션이고, 또 영화의 소산이다. 그래서 김소산과 김수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여간첩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그것은 과거 공안통치가 횡횡하던 시절의 픽션으로, 김소산은 물론이요, 한국전쟁 직전 처형된 김수임 또한 간첩이었다는 확증은 없다.(☞ '옥인동에 남은 윤덕영과 이완용 집의 흔적')

     

    *  오재호가 쓴 <실록소설 표적>에서는 김소산이 돈암동의 요정에서 사상검사(공안검사)와 법조인, 대공경찰, 재계인사들에게 향응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바, 그들이 나눈 고급 정보가 김소산을 통해 남로당에게 들어갔을 것이라는 개연성은 성립된다.  

     

     

    영화 '기생 김소산' 포스터
    영화 '김수임의 일생' 포스터
    '기생 김소산'은 1973년 대종상 우수반공영화상을 받았다.
    '기생 김소산' 의 한 장면 / 고급요정의 기생 김소산(윤정희)은 남로당 간첩 임충식(문오장)에게 금전적으로 포섭되어 기생집에 출입하는 고관들의 국가정보를 빼내다 공안검사 오제도(최무룡)에게 발각되어 붙잡힌다는 유치한 프레임

     

    시절이 시절이니 만큼 김소산이 무사했을 리 없다. 그는 1949년 남로당 비선 자금책 및 간첩 혐의로 붙잡혀 투옥되는데, 이때 김영한에게 자신이 풀려날 때까지 청암장 관리를 부탁하고 간다. 그리고 이듬해 6.25전쟁이 터졌고 이후 김소산은 행방불명되었다. (원경스님은 그때 김소산이 인민군복을 입은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그럴 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 인민군 장교로 활동하다 9·28 서울수복 후 체포돼 1·4후퇴 직전 처형됐다는 말도 있지만 확인은 안 된다

     

    아무튼 김소산이 행방불명되자 청암장의 주인은 본의 아니게 김영한이 되었다. 다만 명의는 계속 조봉희 앞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당시의 유력 정치인 국회부의장 이재학의 세컨드 생활을 하던 김영한이 그와 공모해 1955년 자신의 앞으로 등기를 옮겼다. 그와 같은 기록이 있는 등기부등본을 원경스님이 소송을 제기했을 때 제시한 바 있다.

     

     

    조봉희에서 김영한으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소를 취하했지만, 당시 원경스님은 대원각을 되찾아 사회 개혁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만들려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진술과 주장을 한 원경스님은 대체 누구일까? 원경스님은 박헌영과 두 번째 여인 정순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박헌영의 첫 번째 부인인 주세죽이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한 사상적 동지였던 반면 정순년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저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였다. 

     

    두 사람을 연결해준 인물은 정순년의 당숙 정태식으로, 경성제대를 수석입학하고 수석졸업한 수재로 알려져 있다. 빨갱이신문 <해방일보>의 주필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똑똑함이 죄였을까, 그 역시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이론상으로는 그럴싸하므로)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난 박헌영이 홀로 힘겨운 생활을 하자 전라도 덕유산 포수인 사촌형의 딸 정순년을 데려가 박헌영의 수발을 들게 한 것이 임신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 하지만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임신해 출산한 사실을 안 정순년의 부모는 노발대발하여 그녀를 끌고 고향으로 데려갔고, 이후 병삼이란 이름의 핏덩이 사내는 부모 없이 무진 고생을 하며 자라게 되는데, 그가 바로 이 스토리의 내레이터 원경스님이다. (그의 지난했던 성장 과정과 훗날 지리산 빨치산 사령관이 되는 이현상과의 만남 등은 따로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그는 작년 12월, 법랍 62년, 세수 81세로 입적했다. 

     

    원경스님 박병삼 (1941~ 2021)
    조금 복잡한 원경스님 가계도
    원경스님이 주지로 있던 평택 만기사

    한편 1933년 박헌영이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국내로 잡혀갔을 때 상해에 딸과 함께 남은 주세죽은 박헌영의 동지였던 김단야와 재혼을 하고 1937년 다시 러시아로 떠났다. 김단야는 모스크바와 상해 시절 박헌영 부부에게 많은 도움을 준 공산주의자인데, 1919년 상해에 온 박헌영을 이끌어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지부에 가입시킨 장본인으로서, 혁명 1세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그러나 김단야는 그들 가족이 러시아에 도착한 그해 11월 5일, 일본 경찰의 밀정이라는 누명을 쓰고 소련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8년 2월 18, 소비에트 군사법원에서 재산몰수형과 총살형이 선고되었고 선고당일 곧바로 처형되었다. 스탈린 공포정치가 만들어낸 숙청 광풍의 희생양이 된 것이었다. 주세죽은 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수용소 농장으로 가야 했다.

     

     

    비운의 사회주의자 김단야(金丹冶, 1900~1938)
    주세죽은 유배 기간이 끝난 후 대한민국으로의 귀환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하지만 1989년 뒤늦게 명예가 회복되었고, 유해는 모스크바 시내 한 수도원의 납골당에 안치됐다.
    주세죽과 박헌영의 딸 박 비비안나 / 비비안나 20대 초반 때의 사진으로 그녀는 200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어머니의 건국훈장을 대신 받았다.

     

    끝으로 대원각 소유주였던 김영한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한은 함흥의 쇠락한 양반가의 딸로 16살 때 하규일의 밑에서 진향이라는 이름을 받아 기생이 됐다. 이후 그는 빼어난 인물과 춤으로 낭중지추로서의 존재를 알렸는데 그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인이자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였던 백석과 초대면에 서로 눈이 맞았다. 그리고 1938년 비슷한 시기에 서울로 온 두 사람은 청진동에서 동거를 시작했지만, 백석 부모의 반대로 28일 만에 헤어져야 했다.

     

    이후 김영한은 본업에 매진하여 김소산의 환심을 샀고, 마침내 대원각을 손에 넣어 거물급 요정으로 키웠지만 사실 늘 불안하고 허(虛)했을 것이다. 이에 결국은 시주를 택하게 되었을 터인데, 경위에 어쨌든 '유명 시인 백석과 유명 빨갱이 박헌영 & 길상사'에서의 내용이 아름다운 사연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길상사에 남은 요정의 흔적은 이제는 지웠으면 하는데, 아직도 훈장처럼 달고 있음은 유감이다.  

     

     

    길상사의 요사채 / 요정으로 쓰인 길상사는 수많은 '별채'가 있다. 지금은 기도처와 요사채로 쓰이지만 요정 시절 밀실 야합과 향응이 펼쳐지던 현장이다. 요정 공화국 대한민국의 과거를 증언하는 곳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 사진과 글)
    대원각 시절 요정 여인들이 옷을 갈아 입었던 팔각정 / 김영한은 '이곳에서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사진과 글)
    길상사 범종각의 단풍 / 범종이 있는 자리는 대원각 시절 VIP 자가용 운전사들의 대기실이 있던 곳이다. 단풍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다. (호텔스닷컴 사진)
    범종각
    설법전 앞 관음보살상
    극락전
    적묵당
    삼층석탑
    길상화 사당
    사당 안 길상화 영정
    사당 뒤 단풍
    사당 앞 길상화 보살 안내문 / 연인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낭나귀'가 써 있다. ('1955년바위 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을 운영했다'는 설명은 맞지 않는다)
    길상헌과 사당
    길상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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