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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마지막 보루였던 삼군부 총무당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2. 11. 1. 22:45

     

    1866년(고종 3년) 프랑스 극동함대의 로즈제독은 작심하고 조선을 침공했다. 겉으로의 구실은 그해 일어난 조선 정부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문책이었지만, 속내는 이 기회에 조선을 먹겠다는 것이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이 사건은 8년 전의 베트남과 닮은꼴이었다. 당시의 베트남 응우옌 왕조 역시 가톨릭을 박해하여 많은 신도들과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었다. 제국주의 프랑스는 이에 대한 응징을 구실로 중국 주둔군 3,000명으로 베트남을 침공·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든 바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 대한 프랑스의 침략은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조선군의 강력한 저항에 극동함대는 2차례의 침입이 모두 무위로 돌아갔던 바, 로즈제독은 베이징 외교관들 사이에서 놀림거리가 되는 망신을 겪어야 했다. 아울러 지금껏 세계 무대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국은 베이징 외교가에 강소국(强小國)의 이미지를 심어주었는데, 조선은 이어 1871년 미 해병대의 공격 또한 물리침으로써 자존감을 한껏 높였다. 

     

     

    프랑스 함대의 칩입로 / 빨간 선이 1차 침입로이다.
    프랑스 군은 1차 침입 때 이 양화대교까지 이르렀다.
    양화대교 근방의 양화진은 당시 한강과 강화를 잇던 중요한 나루이자 진지가 있던 곳이다.
    절두산 척화비 / 프랑스 군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가장 폼나는 척화비를 세웠다.
    절두산 부근의 양화진(楊花鎭) 터 표석
    프랑스 군이 일시 점령했던 강화도 삼랑성
    프랑스 군이 주둔했던 삼랑성 내 전등사
    프랑스 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 전승비

     

    그런데 그와 같이 막강했던 조선군의 위력이 1876년 일본 앞에서는 무력했다. 당시 일본이 개화해 프로이센의 군대를 답습했기로서니 프랑스 해군 육전대나 미 해병대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은 일본군의 강화도·영종도 공격에 어이없이 패퇴했고 이후 무기력하게 개항을 했으며 결국은 망국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대체 1866년(병인양요)부터 1876년(강화도조약)까지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조선은 그렇듯 허약해졌을까?  나는 그 원인을 삼군부(三軍府)의 해체에서 찾았다.

     

     

    복원된 영종도 태평루와 전몰영령추모비 / 일본 운요호의 공격으로 희생된 조선군 전몰영령추모비이다.(영종도 에어스카이호텔 제공사진)

     

    1864년(고종 1)  정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 이후 국정 최고 기구였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켜 다시 의정부 체제로 환원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예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시켜버렸는데 그러면서 비변사의 국방기능을 삼군부가 대신하게 했다. 흥선대원군의 목적은 국초의 강력한 왕권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던 바, 이 역시 국초에 있던 의흥삼군부의 부활인 셈이었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정무(政務)는 의정부가, 군무(軍務)는 삼군부가 맡게 되었다.

     

     

    창덕궁 맞은 편의 비변사 터 표석 / 비변사의 해체는 창덕궁 시대가 저물고 경복궁 시대가 개막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삼군부는 조선후기 중앙 부대인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을 비롯한 전국의 군사권을 장악하고 훈련도감 예하의 삼수병(三手兵) 체제를 완성시켰다. 삼수병은 조총을 쓰는 포수, 창과 칼을 사용하는 살수, 활을 사용하는 사수의 전투병과를 말하는데, 여기에 소속된 군사들은 직업 군인으로서 일정한 급료가 지급됐다.

     

    그리고 대원군은 국초의 의흥삼군부 자리에 있던 예조(禮曹)를 밀어내고 삼군부를 의정부와 마주 보게 하였다. 즉 광화문의 왼쪽에는 삼군부를, 오른쪽에는 의정부를 둠으로써 국왕이 있는 경복궁 좌우에 문무(文武)를 거느리는 모양새를 갖추게 만든 것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3년 서울 광화문 앞 육조거리 모습 / 왼쪽 삼군부와 오른쪽 의정부 건물이 그대로 있다. 삼군부 터에는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자리한다.
    삼군부 정문
    삼군부 건물 / 좌로부터 청헌당, 총무당,덕의당
    현재 성북구 삼선동으로 옮겨진 삼군부 총무당 건물
    광화문 삼군부 터의 안내 명판
    현재 의정부는 공사중 / 뉴스포스트 사진

     

    흥선대원군의 기대에 걸맞게 삼수병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빛나는 활약을 보여 프랑스 해군과 미 해병대를 물리쳤다. 하지만 1874년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밀어내고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후로는 삼군부도 따라 무력해졌다. 고종의 정책은 아비 대원군의 정책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었으니 삼군부의 관리는 소홀해지고 강화도 진무영의 예산도 대폭 삭감됐다. 진무영의 사령관은 문관으로 교체됐다. 그리고 그 2년 후인 1876년 일본의 공격이 있었다.

     

    삼군부는 1880년 폐지되고 그 직무는 통리기무아문으로 이관됐다. 통리기무아문은 청국 북양대신 이홍장의 간섭 하에 설치된 청나라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참조한 관청으로, 군무에 외교 업무까지 관장했다. 삼군부는 1882년 임오군란으로 권력을 되찾은 대원군이 곧바로 부활시켰으나 곧 청나라에 붙잡혀 가며 다시 폐지되었다.

     

    이후 삼군부 건물은 통리기무아문과 시위대 청사로 사용되었다. 시위대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조직된 고종의 친위부대였으나, 1895년 을미사변 때 일제의 주도로 조직된 훈련대와 충돌한 후 훈련대에 편입되어 해체되었다가 고종이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재조직되었다.

     

    하지만 1907년 일제에 의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시 재차 폐지되었는데, 당시 이에 항거해 자결한 박승환 참령은 시위대의 제1대대장이었다. 이후 삼군부 건물은 일제에 점령되어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 사령부 건물과 체신관서로 쓰이다 중심건물이었던 총무당(總務堂)은 1930년대 낙산 아래 골짜기 빈터로 옮겨지고, 보조건물인 청헌당(淸憲堂)은 1967년까지 정부종합청사 자리에 남아 있다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내로 이건됐다. 다른 보조건물인 덕의당(德義堂)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삼군부 총무당 / 조선의 마지막 군대 대한제국군의 군무가 행해졌던 곳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공릉동으로 이건된 삼군부 청헌당 / 현판은 총무당과 마찬가지로 신헌의 글씨다.
    지금은 사라진 덕의당
    중앙일보 앞 시위병영터 표석 / 대한제국 시위대 보병 제1연대 제1대대가 주둔하던 곳이다.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 자결순국화 / 독립기념관
    대한상공회의소 앞 대한제국군 서울시가전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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