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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이 고향에 가지 않은 이유ㅡ효사정과 한강신사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2022. 11. 7. 08:41
조선시대 한강에는 누정(樓亭)이 대략 80개 정도 있었다고 한다. 많은 것도 같지만 800리 장강(長江)임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편도 아닌 듯하고, 그것이 경강(京江; 조선시대에는 한양 앞을 흐르던 한강)에 집중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또 많은 듯도 하다. 아무튼 그러한데, 그 많은 정자 중 가장 빼어난 곳은 어디였을까? 어려운 질문이긴 하지만 대답은 쉽게 나오니 곧 몇 개의 정자가 추려지는데, 그중 빠지지 않는 곳이 노량진 부근에 위치했던 효사정(孝思亭)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미(美)란 주관적 관점(aesthetic consciousness)이니 미추(美醜)에 있어서의 서열은 절대적일 수 없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보편적 논리라는 것이 적용되는데, 그 점에 있어 효사정은 적어도 풍광만은 만족시킨다. '적어도'라는 전제가 붙는 것은 과거의 누정 자체의 모습은 알 길 없는 때문이니 지금의 것은 조선 초기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 1376~1443)이 지었다는 기록만을 가지고 1993년 노태우 대통령 때 재현된 정자이다. 현판의 글씨도 그가 썼다. (노한의 17대손이라고 함)
그리고 그 기록이라는 것도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금천현(衿川縣) '누정조에 "노량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 정자"라는 정도로 간략해 위치에 대한 고증 문제가 따라붙지만,(정자 터가 확인된 것은 아니라서)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지은 <효사정기(孝思亭記)>의 다음 내용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위치에 대한 고증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이곳이 정자의 자리로서 최적지이기 때문이다.
노한은 세종 21년(1439년)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어머니인 개성왕씨 대부인을 선산에 예장하고 무덤 옆에 초막을 지었다. 3년간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사는 시묘살이를 하고도 서러워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노한은 묘지 북쪽 깎아지른 듯한 언덕 위에 정자를 만들고 묘소를 바라보며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슬퍼했다.... 무릇 한강을 끼고 지은 정자가 그 몇인지를 모르거니와, 경치가 온전하고 또 요긴한 지역은 실상 이 정자를 첫째로 친다.
그리고 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 효사정의 정취를 시(詩)로 남겼으니 노사신, 정인지,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중국사신 체수, 기수 등이 대표적이다. 또 굳이 그들의 시가 아니더라도 이곳에 오르면 효사정이 경강 최고의 정자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 풍광을 앞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경계에 섰던 심훈'에서 소개했던 바, 이번에는 해 질 무렵의 사진을 올려보았다.
이와 같은 절경을 지녔기에 일제시대에는 왜놈들도 이 장소를 탐냈다. 그래서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동안 '한강신사(漢江神社)'라는 이름의 일본신사가 자리했다. 1926년 발간된 <경성의 광화(京城の光華, 후지이 가메와카 지음)>라는 책에는 한강신사의 건립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한강신사는 인도교(人道橋) 건너 동쪽 작은 언덕의 숲속으로 난 한줄기 끈과 같은 가느다란 길이 끝나는 꼭대기에 있다. 제사를 모시는 대상은 미야지대사(宮地大社), 코토히라대신(金刀羅大神), 스가와라대신(菅原大神)의 삼신(三神)이다. 이 신사는 인도교를 건설한 시키 노부타로(志岐信太郞) 씨가 대정 원년(1912년) 금상폐하(今上陛下, 다이쇼 일왕)의 즉위를 기념하고, 조선 거주 일본인 및 조선인에게 경신숭조(敬神崇祖)의 미풍을 가르치려는 돈독한 뜻으로써 산자수명한 이곳에 사재 십수 만 원을 들여 그 3신을 한강 수호신으로 삼아 헌립(獻立)한 것이다.
그리고 매년 봄·가을에 행해지는 대제례일에는 내선인(內鮮人) 참배자가 원근에서 운집하여 번잡했다고 하는 바, 평상시의 참배 외에도 따로 정기적인 제례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왜놈들이 한강의 신으로 모셨다는 '미야지대사'는 일본 후쿠오카 소재 미야지다케 신사(宮地嶽神社)를 가리키는 것으로, 시키 노부타로의 고향에 있는 신사 그 자체가 통째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두 번째 귀신인 스가와라대신은 일본 헤이안시대의 정치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로서 '학문의 신'으로 추앙된다. 세 번째 귀신 스가와라대신은 인도 힌두교에서 유래된 물의 신이다.
일제 말기에는 여기에 일본 귀신의 대빵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까지 합사되는데, 앞서 말한 남산신사(조선신궁), 경성신사, 노기신사 외에도 이와 같은 대규모 신사가 있었다니 놀랄 일이다. 그리고 놀람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니 아래의 기사를 보면 서울에는 이외에도 많은 신사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임진왜란 때 가장 악랄했던 전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신사도 있었다니 (당고개 소재) 가히 기절할 것만 같은 일이다. 한강신사의 사진은 너무 많아 대충 추렸다.
앞서 말했지만 시인 심훈의 고향은 서울 흑석리(지금의 동작구 흑성동)이나 아래의 시 '고향은 그리워도'에서는 절대 고향에 가지 않겠노라 잘라 말한다.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들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일본 신사가 들어앉았다는데,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 그 꼴을 스스로 찾아가 어찌 볼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니 '목을 매어 끌어도 고향에 않겠다'는 의지인즉 민족의식과 독립의지가 투철했던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고향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10년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너머련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이 서고
사당 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5대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의 은행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이 든 그 산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드란 말이요?
번잡하던 식구는 거미 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 아래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취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 고향엔 가지 않겠소'토박이가 부르는 서울야곡'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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