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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경계에 섰던 심훈
    작가의 고향 2022. 11. 6. 23:11

     

    <상록수>의 작가로 친숙한 심훈(본명 심대섭)은 우리에게는 '그날이 오면'이란 시로 잘 알려진 시인이기도 하다. 교과서에 시가 소개됐기 때문인데, 이 시는 1930년에 3.1만세운동 11주년을 기념해서 쓴 것으로, 자작 시집 <그날이 오면>의 제목으로도 쓰였다. 먼저 그 시를 다시 한번 감상해보자.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한다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따로 해석할 필요도 없이 이 시에는 조국의 광복을 바라는 심훈의 뜨거운 열망이 직설적으로 실려 있다. 그래서 이 시가 그 시절에 어떻게 발표될 수 있었을까, 의아해지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시는 기실 해방 후에 발표됐다. 그는 1932년도에 그동안 쓴 시를 모아  시집 <그날이 오면>의 출판을 시도하지만 검열에서 무사할 리 없을 터, 위 시를 비롯한  많은 시가 부적격 대상이 되었다. 심훈은 "그렇다면 나 역시 출판할 필요가 없다"며 과감히 출판을 접었던 바, 그의 시집는 해방 후인 1949년 둘째 형인 심명섭에 의해 출판되었고 이 시도 그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미 심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심훈(沈熏, 1901~1936)

     

    '그날이 오면'은 교과서에 수록되기 안성맞춤인 작품이라서 사실 아니 실릴 수가 없다. 그래서 예전의 국정 교과서부터 검인정 교과서에까지 빠짐없이 실렸던 것인데, 그가 조금 더 활동을 했자면, 쉽게 말해 요절하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그는 35세에 죽었다) 아마도 이 시는 교과서에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주변 인물 때문이다. 

     

    자주 거론되는 이야기이지만 심훈의 경기고보 동창의 면면은 화려하니, 한국광복군 참모장과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과, 해방 후의 대표적 공산주의자 박헌영이 동기다. 특히 박헌영과는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사이였다.

     

    그리고 1923년 일왕 암살을 기도한 죄로 투옥돼 해방 후인 1945년 10월까지 무려 26년간의 최장수 수형자가 됐던 아나키스트 박열은 심훈의 경기고보 1년 후배다. 아울러 사회주의 이론가로서 1925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돼 고문을 받고 옥사한 박순병은 시대일보사 동기인데, 1927년에 쓴 '박군(朴君)의 얼굴'이라는 시에는 이 세 명의 박군이 모두 등장한다.

     

    처음에 등장하는 박군은 박헌영이다. 그는 당시 중국 상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체포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 복역했는데, 이후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조직한 죄로 1925년 11월 다시 체포돼 투옥되었다. 당시 박헌영은 매우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이때 얻은 병으로 1927년 10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박군의 얼굴'은 그때 쓴 시이다.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올 병에 담가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같이 부풀어 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XX(헌영)아!
    사랑하는 네 안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갈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주마!
    너와 같이 모든 X(한)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이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심훈 역시 독립운동을 하고 감옥살이도 하고 중국 망명생활도 했다. 그는 경기고보 재학 중 3.1만세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과 단재 신채호를 만나 그들의 사상에 감화빋는다. 이후 발표한 <선생님 생각>이라는 시와 <단재와 우당>이라는 수필은 그들과의 중국에서의 추억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로 유명한 우당 이회영(1867~1932)의 흉상 / 서울 명동

     

    반면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한 <동방의 애인>은 박헌영과 그의 부인 주세죽을 모델로 쓴 작품으로, 소설의 주인공인 김동렬과 강세정으로 등장한다. 팔봉 김기진이 이 작품을 가리켜 '마르크스주의 통속소설'이라 평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앞서 '여간첩 김소산과 대원각 & 길상사'에서 소개한 그대로 박헌영과 주세죽은 공산주의 사상에 투철했던 '동방의 애인'으로서 충분히 대하소설의 주인공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비운의 공산주의자 김단야가 등장한다.

     

    소설은 경성, 상해, 모스크바, 동경 등을 무대로 전개되는데, 대하소설을 표방했던 것과 달리 39회로 연재가 중단된다. 일제의 검열에 걸린 탓이었다. 심훈은 연재가 중단된 후, 이 소설의 주제이자 스스로가  말한 "사랑에 겨워 껴안고 몸부림칠 만한" 애인들의 러브 스토리와 그에 얽힌 비극적 시대상황을 영화로 완성하려 했지만 스케일을 뒷받침할 엄청난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결국 포기한다. 

     

     

    박헌영 주세죽 부부와 딸 박 비비안나
    레닌국제대학 시절의 박헌영 (앞줄 왼쪽 세 번째) / 그 왼쪽 안경 쓴 사람이 김단야이고, 윗줄 오른쪽 끝에 베트남 독립영웅 호치민, 그리고 주세죽(●)이 보인다.
    주세죽이 다녔던 모스크바 푸쉬킨 광장의 동방노동자공산대학 (왼쪽 극장같은 건물) / 심훈 소설 속의 세정은 '눈이 맑고 살빛이 희며 대리석으로 아로새긴 듯한 똑똑한 얼굴 윤곽을 가진 총명한 여성'으로, 주세죽이 그대로 묘사됐다.
    당시의 모스크바 거리

     
    서울 흑석동 효사정 문학공원과 인근 '심훈 길'에 마련된 심훈 안내판들을 보면 그는 시인이나 소설가보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던 것 같다. 일대의 근린공원을 따로 심훈 공간으로 꾸민 이곳에는 그의 시 '그날이 오면' / '첫 눈' / '밤' / '기적'의 총 4편의 시를 각각 새겼고, 기타 연대기(年代期)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심훈의 동상이 한강의 절경을 등지고 앉아 있다. 2018년 동작구가 아름다운 풍광과 정자를 있는 이곳에 심훈 문학공원과 따로 산책로를 조성해 시민에게 개방한 곳이다. 당시의 흑석리가 심훈의 고향인 까닭이다. 

     

     

    효사정
    심훈의 동상과
    뒤로 보이는 한강
    '그날이 오면' 시비
    영화인으로서의 심훈

     

    이를 보면 심훈은 중국 망명 시절부터 연극과 영화에 관심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본인이 직접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으니 1925년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장한몽>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때는 이수일 역을 맡아 열연했다. 그리고 그 열정은 1927년 봄 일본으로 건너가 일황촬영소에서 단기 수학(修學)했으며, 이를 토대로 식민지 현실을 다루는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직접 제작했다. (원제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었으나 일제의 검열로 제목이 바뀌었다)

     

    1927년 단성사에서 개봉된 이 영화는 1938년에 조선일보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지금까지의 영화 중 '베스트 5' 안에 (1위-나운규의 <아리랑>, 2위-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 들 정도로 평이 좋았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캐스팅도 화려해 강홍식, 한병룡, 김정숙, 신일선 같은 당대의 톱 배우들이 출연했다.

     

     

    영화 《먼동이 틀 때》의 한 장면

     

    이후 심훈은 문학과 영화에 애정을 균등히 하며 <탈춤>, <상록수> 등의 소설을 섰다. 아울러 이 소설들을 영화화하려 했지만 제작비의 문제와 일제의 방해 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36년당시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갑자기 사망했다.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그의 <상록수>는 이후  1961년에 신상옥 감독에 의해, 그리고 1978년에 임권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1961년 영화 《상록수》
    1978년 영화 《상록수》
    심훈의 영면을 알린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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