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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여류시인들의 살롱 삼호정
    작가의 고향 2022. 10. 17. 06:49

     

    앞서 조선시대의 두 여류시인 허난설헌과 이옥봉에 관해 말한 적이 있다. 그들의 생과 최후는 너무도 가련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들의 불행은 사회적 문제라기보다는 단지 남편을 잘못 만난 탓이다. 허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아내의 글재주를 마뜩지 않아했으며 버거워 시기하였던 바, 기방을 즐기며 밖으로 나돌았다.(☞ '허난설헌 시 표절 문제 I')  이옥봉의 경우는 남편 조원과의 혼인조건이 옥봉의 절필(絶筆)이었다고 하는 바, 더는 말할 것도 없다.(☞ '주검으로 전한 여류시인 이옥봉의 러브레터')


    반면 자유롭게 시사(詩社, 시모임)를 가지며 자유롭게 웃고 즐기다 간 여인들도 있다. 대표적으로 마포 삼호정에서 모였던 
    '삼호정시사(三湖亭詩社)'를 들 수 있겠는데, 주요 멤버는 김금원(金錦園=김금앵), 김운초(金雲楚=김부용), 김경산(金瓊山), 박죽서(朴竹西), 김경춘(金瓊春), 금홍(錦紅), 죽향(竹香) 등이다.

     

    이들은 김금원의 남편 김덕희(金德熙)가 세운 삼호정(三湖亭)에 모여 저희들끼리, 때로는 시문을 즐기는 선비들(홍한주·신위·서유영 등)과 함께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녀들은 모두 시와 술은 한가락하는 사람들이었니 그들의 신원을 축약하면 이렇다.

     

    금원 : 병부시랑 김덕희의 소실

    운초 : 연천 김이양의 소실(기녀 때 만난 친구)

    경산 : 화사 이정신의 소실 (이웃사촌)

    죽서 : 송호 서기보의 소실 (고향 친구)

    경춘 : 주천 홍태수의 소실 (금원의 동생)

     

    그중 이 모임을 만든 김금원에 대해 말하면, ​1817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금원은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나 영리했고, 특히 문재가 뛰어났다. 그리고 자유분방하였으니 그는 14살에 부모의 허락을 받아내 남장(男裝)을 하고 여행길을 떠나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유람하였다. 금원은 특히 시문에 재주를 보였으니 시를 읊으면 훨훨 날았다. 그는 자유로움을 택해 원주 기생이 되었으며(그녀의 어미도 기생이었다) 이후 의주부윤 김덕희의 소실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문우(文友)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시를 주고받는 이가  4명 있다. 그중 한 명은 운초다. 시를 짓는 재주가 뛰어나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어떤 이는 이틀 밤씩 묵고 간다. 다른 한 명은 이웃 친구 경산이다. 박식하고 시낭송(吟詠)에 뛰어나다. 또 한 명은 같은 고향 사람 박죽서다.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들은 걸 잊어먹지 않고,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 마지막은 내 동생 경춘이다. 총명하고 지혜롭고 정숙할 뿐 아니라 경서와 사서에 달통했다."

     

    금원은 남편을 졸라 여행을 즐기었으니 그가 쓴 팔도여행기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에서는 남자도 못해낸 걸 자신이 해냈다는 자긍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롱 문화를 연 그야말로 신여성으로, 훗날 헌종 임금으로부터 세상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하여 '규수 사마자장(司馬子長)'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프랑스 파리에 최초의 문학사롱을 연 마담 랑베르(Madame de Lambert)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까? <호동서락기>에 실린 아래의 '관해'(觀海)라는 시는 그가 얼마나 그릇이 크고 호방한 여인인지를 알게 해 준다. 

     

     

    <호동서락기>

    관해(觀海, 바다를 바라봄)

     

    百川東匯盡

    深廣渺無窮 

    方知天地大

    容得一胞中

     

    모든 강은 동쪽으로 돌아 바다로 들어가니

    깊고 넓기가 아득하기만 하구나

    이제 천지가 큰 것을 알겠으되

    내 품에 안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겠도다

     

     

    용산구 리버힐 삼성아파트 옆의 삼호정 터 표지판
    삼호정 터 안내문에 김금원의 시 '강사(江舍)'의 일부가 써 있다, '강사'는 강가의 집이라는 뚯으로 이곳에 있던 삼호정을 말한다.
    본래 삼호정이 있던 용산성당 성직자 묘지
    성직자 묘지에서 바라본 한강 / 강변에 있던 다른 정자나 누각보다 이곳 삼호정에서의 경치가 더욱 아름다웠을 것으로 보인다.
    용산성당 성직자 묘지의 한켠
    성직자 묘원의 안내문에 1887년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원효로 4가와 이곳 산천동의 임야를 매입해 원효효로 4가 함벽정에는 신학교를,(지금의 성심여고 내) 산청동 산비탈 삼호정 위에는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였다고 쓴 것을 보면 그때까지는 함벽정과 삼호정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호정은 일제강점기 사라졌다.
    용산성당에서 본 한강
    성직자 묘지 쪽 용산성당 입구 / 김수환 추기경이 쓴 현판이 걸려 있다.

     

    김운초가 지은 '삼호정만조(三湖亭晩眺)'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三湖亭晩眺 (삼호정에 올라 낙조를 바라봄)

     

    淸流端合鏡新粧 
    山學峨鬟草學裳 
    別浦來翔無數鳥 
    芳洲時有不知香
    松窓月入衾還薄 
    梧葉風飜露更光 
    春燕秋鴻都是信  
    未須怊悵枉回腸 

     

    맑게 흐르다 끝이 합쳐진 것이 마치 거울을 보고 단장한 얼굴 같이 

    산은 곱게 쪽진 머리요 풀은 치마를 드리웠구나

    먼 포구에는 철새가 무수히 날아들고

    물가 풀에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수시로 인다

    소나무 창에 달이 들어와 얇은 이부자리를 펴고

    오동잎은 바람에 펄럭이며 이슬을 다시 영롱인다

    봄의 제비, 가을의 기러기는 모두 믿을만한데

    정체 모를 섭섭함과 슬픔이 장을 헤집는구나  

     

     

    이미지 사진

     

    <죽서시집(竹西詩集)>에 실린 반아당(半啞堂) 박죽서의 시 166수는 한결같이 절창이라 고르기가 쉽지 않은데, 10살 때 지었다는 '춘조'(春鳥)라는 시와, 그리움을 읊은 '술회'(述懷), 그리고 '유회'(遺懷)를 선택했다. 

     

     

    '춘조' (春鳥, 봄 새)

     

    窓外彼啼鳥

    何山宿便來 

    應識山中事

    杜鵑開未開

     

    창밖에 우는 저 새야  

    어느 산에서 자다 이제 왔느냐

    응당 산중의 일을 네가 알려니

    두견화는 피었든 안 피었든

     

     

    '술회' (述懷, 회포를 읊다)

     

    不欲憶君自憶君 

    問君何事每相分

    莫言靈鵲能傳喜

    幾度虛驚到夕​曛

     

    그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절로 생각나

    님에게 묻나니, 우린 왜 늘 헤어져야 하나요?

    신령한 까치가 기쁜 소식 전한다 말하지 마오

    그것이 몇 번이었던가, 이 어슴푸레한 저녁에 또다시 헛되이 놀랐다오 

     

     

    '유회' (遺懷, 시름에 겨움)


    碧樹和烟鎖遠岑 
    微風時拂倚窓琴 
    一年花事酒中盡 
    半日雨聲樓外深 
    病久幾多遺殘約 
    詩成還欲待知音 
    枕邊莫使來啼鳥 
    驚罷西隣啼裡尋 

     

    안개에 싸인 푸른 숲이 먼 산을 둘렀고

    불어오는 미풍이 때때로 거문고를 스친다

    일 년 필 꽃들이 술잔 속에서 지고

    빗소리는 반나절이나 누각 밖에서 거세다

    병이 깊어 약속을 많이 못 지켰음에도

    시를 지어 놓고 알아줄 벗 오기를 기다린다

    저 새야 베갯머리에 와 울지 말아다오

    깜짝 놀라 깨어서 벗이 곁에 있을까 찾을지도 모르니

     

     

    박죽서의 고향 원주시에서 펴년 <죽서시집>
    <죽서시집> 김금원의 발문

     

    박죽서가 스스로 지은 '반아당'(半啞堂)이란 호는 반 벙어리란 뜻으로,  신상 등의 제약으로서 할 말을 못 하는 제 신세를 지칭함이었다. 그는 일세의 천재답게 서른 중반에 요절했는데, 그가 죽자 남편이 유고를 모으고 채록해 <죽서시집>을 펴냈다. 그 발문을 김금원이 맡아 다음과 같이 썼다.

     

    "아아, 이 시집은 죽서가 지은 것이다. 책을 대하니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초롱초롱한 눈매와 붉은 뺨이 책장에 어린다. 아, 그와의 맺어짐이여. 죽서를 아는 자들은 그의 재주와 지혜가 규중에 이름난 것을 알지만, 그가 고요히 살며 자연을 즐기는 정취가 있었음은 오직 나만이 안다. 올바른 눈을 가진 자가 그의 시를 읽는다면, 또한 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다음 생애에 죽서와 함께 남자로 태어나 형제로서, 혹은 친구로서 시를 창화(唱和)하며 책상을 함께 하고 살 수 있을지....." 
     

    그들이 시모임 '삼호정시사'는 유감스럽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박죽서가 요절하고 김금원의 남편이 지방으로 발령이 나면서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김금원의 후일도 알 수 없으니 <호동서락기>를 쓴 뒤로부터의 행적은 묘연하여 이후로는 한 줄 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 근방 동네의 이름이 '도화동, '도원동'인 걸 보면 잠시 머물었음에도 도화살을 지녔던 그녀들의 자취만큼은 선연한 듯하다. (그저 나의 생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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