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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난설헌 시 표절 문제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3. 23:55
     

    허난설헌의 난설헌(蘭雪軒)은 조선 중기의 시인 허초희(許楚姬)의 자(字)이다. 그녀는 '눈 속의 난초가 핀 집'이라는 멋드러진 자를 스스로 지었던 바, 이쯤되면 그 별호(別號)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호는 경번(景樊), 중국 도가의 여(女)신선 번부인(樊夫人)을 경모(景慕)해 붙인 것이다.* 확실히 당대의 여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포스가 풍겨난다. 하지만 그의 동생 교산(蛟山) 허균이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처럼 호+이름으로 불려지지 않고 성+자로 불려진 듯하니 우리 귀에 익숙한 허난설헌이 바로 그녀이다.


    * 당나라의 시인 번천(樊川) 두목(杜牧)을 경모해 붙인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오주연문장전산고')


    아버지 초당 허엽은 당대의 여자가 갖기 힘든 이름을 지어주었고 호와 자를 갖는 것도 허락하였으나 깊은 글공부는 삼가토록 했다. 당대의 사회에서는 무용(無用)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신 허씨 집안의 관심은 가히 천재성을 보여온 막내 허균에게로 집중되었던 바, 당대 최고의 문사였던 손곡(蓀谷) 이달*을 독선생으로 붙여주었다. 이달은 여러모로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또한 난설헌에게도 그러했으니, 이때 그녀도 허균에 뭍어 이곡에게 시를 배운 까닭이었다.(이때 넓어진 시야는 그녀에게 결국 독으로 작용한다)


    * 최고의 시인이며 문장가였음에도 서얼로 벼슬길로 나서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제자 허균이 엮은 시집 '손곡집'이 전한다.



    허균과 난설헌이 공부하던 강릉 집

    허균과 난설헌의 생가이기도 하며 근방에 기념공원과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이 조성됐다.



    강릉 난설헌로 93번길, 난설헌의 생가 부근에 조성된 '허균, 허난설헌 기념관'에 그녀가 그즈음 지었을 법한 죽지사(竹枝詞)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나의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갯가로                                         

    문 앞에 흐르는 냇가에서 비단옷을 빨았지요.                          

    아침에 노젓는 배 한가히 메어두고는              

    짝지어 나는 원앙새를 부럽게 바라보았네요.     


    家住江陵積石磯

    門前流水浣羅衣

    朝來閑繁木蘭棹

    貪看鴛鴦相伴飛





    그녀는 이때 이미 시와 그림과 문장에 두루 천재성을 보이기 시작했던 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廣寒殿 白玉樓上樑文)이라는 건물 상량문(대들보를 올림을 축하하는 글)을 지었다고 한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이때 그녀의 나이 7, 8세..... 그런데 그녀의 천재성을 증명한 듯 보이는 이 사육체(四六體)의 변려문(騈儷文)은 이수광('지봉유설'의 저자)에 의해 일축당한다. 그녀가 지은 이 장문의 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명나라 시의 모방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남긴 많은 시가 표절이거나 위작이라는 것이니 이와 같은 지적은 신흠, 김시양, 홍만종, 한치윤, 김만중 등 우리 귀에 익숙한 명사들에 의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읽어보면 누구나 한 가지는 명확히 알 수 있다. 천재성은 차치하고 이것이 7, 8세 소녀가 지을 수 있는 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식을 떠나서 경험이 있어야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으니, 이 시가 바로 그러하다.(누구의 것을 어떻게 베꼈는지 모르겠지만 읽어보니 단박에 어린 소녀가 지은 글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허균과 이재영(李再榮)의 합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MBC 다큐 드라마 '허난설헌'의 스틸컷



    그 시절 난설헌이 연정을 품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녀가 남긴 시 200여 수 가운데 '채련곡'(採蓮曲, 연밥 따는 노래)이라 하는 예쁜 시가 있다. 그래서 이 시는 많이 회자된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미스터 션사인'이란 드라마에서 여주인공 애신이 읊었던 시도 바로 이 채련곡이다.(좌우지간 작가 김은숙의 내공은 보통이 아니다)


    맑은 가을날 큰 호수에 옥류가 흐르는데,          

    연꽃 우거진 곳에 조각배 메어둔다.                
    물 건너편 님을 보고 살짝 연꽃을 던지고는      
    지나는 누가 보았을까, 반나절을 부끄러워 하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스틸컷



    하지만 이 역시 표절 시의 강력한 후보 중 하나다. 당나라 시인 황보숭의 '채련자'(採蓮子)를 베꼈다는 것이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햇살 반짝이는 맑은 가을날 호수에 배를 띄워   

    젊은 그 도령을 보고자 물 따라 흘러가네.         

    까닭없이 물 건너로 연밥을 따 던지고는          

    지나는 누가 보았을까, 반나절을 부끄러워 하네.      


    船動湖光灩灩秋

    貪看年少信船流

    無端隔水抛蓮子

    遙被人知半日羞


    이어 최근의 연구결과로 나온 난설헌집의 '축성원'(築城怨), '가객사(歌客詞)', '빈녀음'(貧女吟), '양류지사'(楊柳之詞) 등은, 당나라 원진의 '축성곡'(築城曲), 양릉의 '가객수'(歌客愁), 장벽의 '빈녀'(貧女), 이익의 '도중기이이'(途中奇李二)와 거의 유사해 표절이라 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과거 이수광은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에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비롯해 '유선사'(遊仙詞)와 '송궁인입도'(送宮人入道) 등을 예로 들며 난설헌의 시 가운데 본인이 지은 것은 2~3 편에 불과하다는 짠내나는 평을 남겼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이중 '빈녀음'(가난한 여인의 노래)의 첫 수는 '빈녀'와 단 몇 글자만 틀리다.(맨 아래가 장벽의 '빈녀'이다) 게다가 난설헌은 가난한 집의 자식도 아니었던 바, 저작에의 개연성도 빈약하다.


    얼굴 생김새야 어찌 남에게 뒤지리오.                      

    바느질에 길쌈 솜씨도 모두 뛰어나건만,                 

    가난한 집에서 자란 탓에                                     

    중매쟁이들이 모두 나를 모른 척하는구나.                  


    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少小長寒門

    良媒不相識


    豈是乏容色

    豈不知機織

    自是生寒門

    良媒不相識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나의 시각으로는 이와 같은 표절의 문제는 난설헌의 불행한 일생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즉 그 대강은 다음과 같다.


    난설헌은 15세에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이란 자에게 시집을 갔으나, 시댁은 그녀의 재주를 마뜩치 않아 했으며 남편 또한 그러했다. 아니 남편은 오히려 그녀의 재주가 버거워 시기하였던 바, 기방을 즐기며 밖으로 돌았다. 난설헌으로서는 당연히 살 맛이 나지 않았을 터, 게다가 두 아이를 병으로 잃고(게다가 복중의 태아마저 잃는다) 친정도 풍비박산나자 그나마 붙잡고 있던 삶의 희망도 사라져갔다. 아래의 시는 당시에 지은 것들이다. 




     


    강사에 공부하러 간 낭군에게(奇夫江舍讀書)


    봄 제비 짝을 지어 처마 끝을 스쳐날고                     
    지는 꽃은 어지러이 비단옷에 떨어진다.                    
    방에서 하염없이 보는 이 몸, 봄시름에 맘 아픈데         
    풀은 푸르러지건만 강남 간 임은 돌아오지 않네.         


    燕掠斜簷兩兩飛
    落花撩亂撲羅衣

    洞房極目傷春意

    草綠江南人未歸



    규방의 원망(閨怨)


    달 밝은 누각에 가을은 가고, 잘 꾸민 방은 텅 비었네.   
    서리 내린 갈대 섬에 밤 기러기 내려 앉는다.             
    소리나게 거문고를 타도 임은 보이지 않고                   
    연꽃만 연못으로 하나 둘 떨어지네.                         


    月樓秋塵玉屛空 

    霜打蘆洲下暮鴻

    瑤瑟一彈人不見

    藕花零落野塘中



    아이들을 생각하며 통곡함(哭子)


    지난해 사랑하는 딸을 여의고,               去年喪愛女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었네.            今年喪愛子  
    슬프디 슬픈 이 광릉 땅이여.                 哀哀廣陵土   
    두 무덤이 마주 보고 있구나.                 雙墳相對起   
    백양나무에 소슬한 바람 불고,               蕭蕭白楊風   
    도깨비불은 무덤가 소나무 밝히네.         鬼火明松楸  
    종이돈 살라 너희 혼을 부르고               紙錢招汝魂   
    정화수를 올려 제사를 지낸다.               玄酒奠汝丘  
    너희 혼은 응당 오누이임을 알지니         應知第兄魂  
    밤마다 서로 어울려 놀겠지.                  夜夜相追遊  
    비록 뱃속에 아기가 있다 한들               縱有服中孩   
    어찌 잘 크기를 바랄 수 있으리오.          安可冀長成   
    부질없이 황천가를 읊조리고                 浪吟黃臺詞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슬퍼한다.        血泣悲呑聲 





    그녀는 결국 27살의 나이로 생을 다하는데, 이때 그녀는 자신이 지은 글들을 모두 불태워 없앴고 동생 허균에게 친정집에 남아 있는 자신의 많은 글들도 모두 태워달라는 부탁을 했다.(平生著述甚富 遺命茶毘支) 하지만 누이의 삶과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허균은 그녀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이 외고 있는 시와(그는 암기의 천재였다 함으로) 본가의 시를 목판에 남겨 세상에 알렸던 바, 문제는 여기에서 불거진 것 같다. 그가 누이의 시를 모두 태워 세상에 전하지 않았다면 물론 일세의 천재 허난설헌의 존재도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허균의 과욕과 무지(無知)이다. 그는 1608년 발행된 난설헌집의 발문에 이렇게 적었다.


    "부인의 성은 허씨인데, 스스로 호를 난설헌이라 하였다. 균(筠)에게는 셋째 누님으로 저작랑(著作郞, 종 8품의 벼슬) 김성립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자식이 없어 저술로 생을 살았으므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죽을 때 모두 다비(茶毘)에 처했으므로 정작 남은 것은 많지 않으니 균이 베껴 적은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나마 그것이 세월이 오래갈수록 더 없어질까 염려되어 이렇듯 나무에 새겨 널리 전하는 바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난설헌집은 중국 사신 주지번과 양유년에 의해 중국으로 건너갔고, 그 난설헌집에는 그들의 서문이 붙여졌다.(서문은 시집에 무게를 실으려는 허균의 부탁으로 쓰여졌다 한다) 그리고 그 시집은 중국에서 가히 한류 열풍을 일으키며 조선으로 역수입되었고 일본에도 전해졌다. 문제는 그 시집에 그녀의 표절 글이 실려 있었다는 것인데,(그녀는 발표를 염두에 두고 시를 지은 것이 아니니 표절이란 말을 붙이기는 사실 껄끄럽지만) 특히 그녀가 친정집에서 지은 유년기 시에서 당연히 중국의 명시를 흉내낸 작품들이 많았을 터,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중 김시양의 반응은 아래와 같았다.('부계기문')


    "어떤 사람은 그 시집에 표절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믿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와서 '명시고취(明詩鼓吹)'라는 시집을 구해보니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귀에 떨치니 봄 구름 따사롭고 ,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搖琴振雪春雲暖 環佩鳴風夜月寒)라는 율시 여덟 구절이 그 시집에 실려 있었다. 바로 영락(永樂)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充)의 시구였던 바, 이에 나는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비로소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시를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는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중국에서도 당연히 반응이 나왔으니 청나라 전겸익과 같은 시인은 난설헌의 시는 가려 읽을 필요가 있다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고, 주의존도 난설헌집의 위작 흔적을 지적했다. 이에 급기야 서포 김만중은 다음과 같은 글을 쓰기에 이르렀다.('서포만필')


    "난설헌 허씨의 시는 손곡(이달)과 오빠 하곡(허봉)으로부터 나왔는데, 그의 문재(文才)는 옥봉(玉峯, 백광훈)과 같은 사람에 미치지 못하나 총명함과 재기(才氣)는 가히 그들을 넘어서니 우리나라 규수 중에서는 오직 그 한 사람 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 아우 균이 역대의 명시와 원·명대(元·明代)의 시문 가운데 희소한 것을 골라 난설헌의 시집에 삽입하여 명성과 위세를 높인 점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일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되 이를 다시 중국에 보냈나니 이는 마치 도적이 소나 말을 도적질하여 그것을 마을에 되파는 것과 같은즉 어리석기 그지없는 노릇이다..... 천고에 이름을 날리는 사람은 본래 많지 않다. 허씨와 같은 재주는 저절로 일세의 혜녀(慧女)가 되기 충분하였음에도 (허균은) 이런 짓을 하여 스스로를 더럽혔다. 사람으로 하여금 매 편마다 매 구(句)마다 흠집을 찾게 만드니 탄식할만한 일이다." 


    허균과 당쟁 관계에 있던 신흠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정적들 역시 모두 한 마디씩 보탰으니 위 '강사에 공부하러 간 낭군게 부치는 글'이나 '규방의 원망(閨怨)' 등에 대해서는 표절의 의혹 외에 정숙치 못한 여인의 자세라는 악평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그래도 신흠은 당대 사람이라 난설헌에 대해 듣는 귀가 있었던 바, 그녀의 인성만큼은 다음과 같이 정확히 기술했다. "난설헌은 시에 능할 뿐 아니라 그 기백도 매우 호방한 사람이다."('시화휘성')


    난설헌집에 실린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 그녀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 다만 다음과 같은 세간의 주장, 즉 허균이 제 누이의 이름을 높이려고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옛 시들을 개작해 (고의적으로) 끼워놓았다거나, 자신이 외운 시들을 필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유명한 시문들이 (고의적으로) 섞여 들였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힘들며, 또 그러면서 자신의 저작도 슬쩍 끼워넣었다는 주장은 더더욱 받아들이기 힘들다.(1984년 허미자 교수는 '허난설헌 연구'라는 논문에서 '허균에게 그럴 시문의 능력이 있었다면 누님의 이름을 높이는 대신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을 것'이라는 탁견을 피력한 바 있다)


    아무리 암기 천재라 해도 누이의 시 200여 수를 외우고 있었다는 것이 일단은 말이 안되며, 누이보다 시작(詩作)의 격이 낮은 허균이 제 누이를 위해 위작(僞作)을 시도했다는 것은 언어도단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시간이 가면 당연히 노출된 진실에 잠시 위장막을 씌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을 것이니, 그것이 오히려 죽은 제 누이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누이를 두 번 죽이는 일임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오히려 허균이 시에 조예가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표절의 냄새가 나는 시를 제외하거나 혹은 고쳐서 내보냈을 것이다.(이렇게 보는 것이 훨씬 상식적이다)


    ~ 게다가 그는 난설헌 시집을 꾸민 뒤 서해 유성룡에게 발문을 받았는데, 자신이 표절을 알았거나 위작을 끼워넣었다면 그같은 파렴치한 짓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가면 빤히 실상이 드러날 일에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 욕을 먹이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이때 유성룡이 난설헌의 시를 읽고, 당나라 전성기의 시문들보다 뛰어나다며 허씨 일가의 문재에 다시금 놀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수광이나 신흠이 악평을 한 것은 우선은 허균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서 일것이니 당시의 격심했던 당쟁을 보자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난설헌의 시가 2~3수에 불과하다는 평도 그러하니 시작(詩作)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옛 문장의 인용과 답습은 일절 허용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자가 시를 지어 문명(文名)을 낸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이 허균의 누이라는 점에 일층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난설헌이 지은 아래 규방가사의 명문(名文)을 읽었다면 이런 말을 쉽게 하지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엊그제까지 젊었는데 어찌 벌써 이렇게 다 늙어 버렸는가? / 어릴 적 즐겁게 지내던 일을 생각하니 말을 해도 소용이 없구나. / 이렇게 늙음 위에다가 서러운 사연을 말하자니 목이 메이는구나. / 부모님이 나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몹시 고생하여 이 내 몸 길러낼 때는 / 높은 벼슬아치의 배필은 바라지 못할지라도, 군자의 좋은 짝이 되기를 원하셨더니 / 전생에 지은 원망스러운 업보요, 하늘이 준 부부의 인연으로 / 장안의 호탕하면서도 경박한 사람을 꿈과 같이 만나서 / 시집 간 뒤에 남편을 시중하면서 조심하기를 마치 살얼음 디디는 듯하였다. / 열다섯, 열여섯 살을 겨우 지나면서 타고난 아름다운 모습이 저절로 나타나니 / 이 얼굴과 이 태도로 평생을 살 것을 약속하였더니 / 세월이 빨리 지나고 조물주마저 시샘이 많아서 / 봄바람과 가을 물, 곧 세월이 베틀의 올이 감기는 북이 지나가듯 빨리 지나가 / 꽃같이 아름다운 얼굴은 어디 두고 모습이 얄밉게도 되었구나. / 내 얼굴을 내가 보고 알거니와 어느 임이 나를 사랑할 것인가? / 스스로 부끄러워 하니 누구를 원망할 것인가?


    삼삼오오 여러 사람이 떼를 지어 다니는 술집에 새로운 기생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 꽃 피고 날이 저물 때면 정처없이 나가서 / 흰 말과 금 채찍(호사스런 행장)으로 어디어디에서 머물러 노는가? / (집안에만 있어서) 가깝고 먼 지리를 모르는데 임의 소식이야 더욱 알 수 있겠는가? / 인연을 끊었지마는 생각이야 없을 것인가? / 임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 그립기나 말았으면 좋으련만, / 하루가 길기도 길구나, 한 달이 지루하기만 하구나. / 규방 앞에 심은 매화는 몇 번이나 피고 졌는가? / 겨울 밤 차고 찰 때는 진눈깨비 섞어 내리고 / 여름 날 길고 긴 때에 궂은비는 무슨 일인가? / 봄날 온갖 꽃이 피고 버들잎이 돋아나는 좋은 시절에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아무 생각이 없구나. / 가을 달빛이 방 안을 비추어 들어오고 귀뚜라미가 침상에서 울 때, / 긴 한숨으로 흘리는 눈물 헛되이 생각만 많도다. / 아마도 모진 목숨이 죽기도 어려운가 보구나.


    돌이켜 여러 가지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니 이렇게 살아서 어찌할 것인가? / 등불을 돌려놓고 푸른 거문고를 비스듬이 안고서 / 벽련화 한 곡조를 시름으로 함께 섞어서 연주하니 / 소상강 밤비에 댓잎 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 망주석에 천 년만에 찾아온 이별한 학이 울고 있는 듯 / 아름다운 여자의 손으로 타는 솜씨는 옛날 가락이 그대로 있다마는 / 연꽃 무늬의 휘장이 드리워진 방 안이 텅 비었으니, 누구의 귀에 들려지겠는가? / 간장이 구곡되어 굽이굽이 끊어질 듯 애통하구나.


    차라리 잠이 들어 꿈에나 임을 보려고 하였더니 / 바람에 지는 잎과 풀 속에서 우는 벌레는 / 무슨 일로 원수가 되어 잠마저 깨우는가? / 하늘의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가 막혔을지라도 / 칠월칠석 일년에 한 번씩 때를 어기지 않고 만나는데 / 우리 임 가신 후는 무슨 장애물이 가려있길래 / 온다간다는 소식마저 그쳤을까? / 난간에 기대어 서서 임 가신 곳을 바라보니 / 이슬은 풀에 맺혀 있고, 저녁 구름이 지나가는 때이구나. / 대숲 우거진 푸른 곳에 새소리가 더욱 서럽구나. / 세상에 서러운 사람이 많다고 하겠지만 / 운명이 기구한 젊은 여자야 나 같은 이가 또 있을까? / 아마도 임의 탓으로 살 듯 말 듯하구나.


     

    난설헌의 그림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 '허난설헌 시 표절 문제 (II)'로 이어짐.(←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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