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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시 표절 문제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4. 07:56
아래 허난설헌의 시집('난설헌집')에 살려 있는 '소년행'(少年行, 젊은이의 노래)은 확실히 남자가 쓴 작품으로 보이니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젊은 이들은 신의를 중히 여기니
의리있는 사내들과 어울려 논다.
구슬노리개를 허리에 차고
비단 도포에는 쌍기린을 수놓았네.
조회를 마치자 명광궁(明光宮)을 나와
장락궁(長樂宮) 언덕길로 말을 달린다.
위성(渭城)의 좋은 술 사가지고
꿈 속에서 지내다 해가 저무네.
황금채찍 베고 기생집에서 자며
놀기에 정신팔려 세월이 간다.
그 누구 양웅(楊雄, 한나라 학자 양자운)을 가련타 하랴.
문닫고 들어앉아 '태현경(太玄經)'이나 짓고 있으니.
少年重然諾
結交遊俠人
腰間玉轆轤
錦袍雙麒麟
朝辭明光宮
馳馬長樂坂
沽得渭城酒
花間日將晩
金鞭宿倡家
行樂爭留連
誰憐楊子雲
閉門草太玄
하지만 그 옆의 '감우'(感雨, 난초 내 모습)란 시는 한없이 여성스러우니, 앞서 말한대로 '소년행'은 유년기 시절 작자 미상의 어떤 시를 모방해 시를 지었던 것이고,('소년행은 악부의 곡명이어서 많은 시가 이 제목을 차용했다) '감우'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해 읊은 창작시이다.
하늘거리는 창가의 난초
가지와 잎 그리도 향기롭더니
가을바람 잎새를 한번 스치고 가자
애석하게도 찬서리에 다 시들어버렸네.
아름다운 그 모습 이그러져도
맑은향기는 끝내 죽지 않으니
그 모습 보면서 못내 가슴 아파져흐르는 눈물 옷소매를 적시네.盈盈窓下蘭
枝葉何芬芳
西風一披拂
零落悲秋霜
秀色縱凋悴
淸香終不死
感物傷我心
涕淚沾衣袂
'난설헌집'
오빠 허봉의 소식을 듣는 난설헌
어릴 적에 쓴 습작 외에는 그녀의 모든 시는 거의가 창작이다. 특히 아래의 '기하곡'(寄荷谷, 하곡 오라버니께)은 오빠 하곡을 생각하며 쓴 시이니 표절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있는 시이다. 그녀의 둘째 오빠 하곡 허봉은 그녀가 가장 사랑하던 가족이었으며 손곡 이달과 더불어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하곡은 율곡 이이와의 당파 싸움 끝에 갑산으로 귀향을 갔다가 풀려나지만 한양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단서가 붙었으므로 금강산 등을 떠돌다 병을 얻는다. 하곡은 병 치료를 위해 의원을 찾아 김화 땅까지는 왔으나 그곳에서 그만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어두운 창가에 촛불 나직히 흔들리고
반딧불은 높은 지붕을 날아 넘네요.
깊은 밤 시름에 겨워 날은 더욱 쌀쌀해지니
나뭇잎은 우수수 떨어져 흩날리네요.
산과 물이 가로막혀 이젠 소식도 뜸하니
그지없는 이 시름을 어찌 풀런지요.
청련궁 오라버니를 멀리서 그리노라니
산속 담쟁이 사이로 달빛만 창백하네요.
暗窓銀燭低
流螢度高閣
悄悄深夜寒
蕭蕭秋落葉
關河音信稀
端憂不可釋
遙想靑蓮宮
山空蘿月魄
하곡 허봉과 난설헌, 그리고 교산 허준은 허씨 6형제 중에서도 같은 어머니를 둔 관계로 그 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동인이었던 허봉은 경기도 순무어사 시절 서인인 병조판서 이이(율곡)의 병권(兵權) 전횡을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역풍을 맞는다. 이에 창원부사로 좌천당해 내려갔고, 말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삼수갑산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때가 계미년(1683년)이었으므로 이때의 동인의 하옥과 귀양과 죽음을 역사적으로는 계미삼찬(癸未三竄)이라 부른다. 시에서 나오는 청련궁은 당나라 시인 이백의 호가 청련거사(靑蓮居士)였으므로 오빠 허곡을 이백에 견주어 그리 부른 것이다.
또한 그녀는 갑산으로 귀양가는 하곡을 보고 '송하곡적갑산'(送荷谷謫甲山)이라는 오언율시를 짓기도 했는데, 이 시에 한나라 재상 가의(賈誼)나 초나라 회왕과 같은 인물이 등장해 이 또한 중국 시의 표절이라 여기는 사람이 없잖지만, 억지의 다른 표현이거나 무식의 표출로밖에 볼 수 없다. 제 오빠가 귀양감을 안타까워 읊은 시이거늘 어찌 표절 같은 것이 있겠는가.
그녀는 표절에 있어서는 당당히 그 원문을 밝혔던 바, '최국보*의 체를 본받아 짓다'(效崔國輔體)라는 오언절구나 '손학사의 북리** 시에 차운하다'(次孫內翰北里韻)라는 칠언율시는 그 대표적인 시가 되겠다. 하지만 정작 이것에 대해서는 주목하는 이가 없으니 그저 세인들의 고약한 심보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듯하다.
* 최국보는 당나라 현종 때의 시인으로 여인들의 정한(情恨)을 담은 시를 많이 썼던 바, 이에 많은 사람들, 특히 여인들이 그의 시를 모방했다.
** 손학사의 북리는 당나라 시인 한림학사 손계(孫棨)가 쓴 북리지(北里志)를 말하는 것으로서, 서민들의 주색잡기를 읊은 시가집이다.
하곡의 죽음에 앞서 1579년에는 그의 아비 초당 허엽이 경상감사 직을 사퇴하고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의 한 객관에서 객사하였던 바, 난설헌에게는 힘든 시련이 연속되었다 하겠는데, 거기에 두 아이를 잃고 복중의 태아까지 잃었으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굳이 살고 싶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녀는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몸을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리고는 밤에 전설 속의 난새(鸞)*가 짝을 만나 즐겁게 노니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금년이 바로 3·9의 수에 해당되니(3X9=27) 오늘 연꽃이 찬서리를 맞아 붉게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들어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니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 되던 해였다. 때는 1589년 3월 19일..... 그녀가 피안에서는 과연 난새와 같이 자신에 걸맞은 짝을 찾았을는지.....
꿈에 광산산에서 노닐었네.
푸른 바다는 아름다운 바다 속으로 스며들고
전설 속의 푸른 새는 전설 속의 채색 깃의 새와 어울렸건만,
연꽃 스물일곱 떨기 늘어지니
달밤 찬서리에 붉게 진다.
夢遊廣桑山
碧海侵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 이 시 속의 난새는 남북조시대 송나라 시인 번태의 '난조시서'(鸞鳥詩序)에 등장한다. 계빈 왕에게 사로 잡힌 난새는 노래 부를 것을 강요당하나 이를 거부하고 울지 않고 버티며 홀로 스러져간다. 이렇게 삼년이 지난 어느날, 계빈 왕이 거울을 걸어 모습을 비쳐주었는데, 거울 속의 피폐해진 몰골을 본 난새는 처음으로 슬피 울어 노래를 부르고는 그대로 거울로 달려가 부딪혀 자살을 하고 만다. 난설헌은 난조시서의 그것을 빌려 자신의 신세와 죽음을 절묘하게 비유했음에도 어떤 놈은 이 시 '몽유광산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 또한 당나라 포용(鮑溶)의 시 '요수사(瑤水詞)'의 표절이라 말한다.
경기도 광주군 초월읍 지월리 산 29-5번지 경수산에 있는 허난설헌의 무덤 옆 시비(詩碑)에는 위 '몽유광산산시서'가 유서처럼 써 있는데, 말한대로 이 또한 표절의 시비를 받고 있은 바, 난설헌이 영면을 이룰런지 걱정된다.
난설헌의 묘와 시비
그런데 중국은 과연 우리네의 생각대로 허난설헌을 시를 훔쳐간 도둑이라 생각할까? 주지번과 양유년이 가져간 '난설헌집'과는 별개로 정유재란 즈음(1597-1598) 조선에 왔던 명나라 사신 오명제는 이덕형을 통해 수집한 난설헌의 시를 '조선시선'이라는 책에 담아 중국에 소개했다. 이 시집은 난설헌의 시에 힘입어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몰이를 했으니, 이후 주지번과 양유년이 직접 허균을 만나 '난설헌집'을 가져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 무렵 중국에서의 난설헌의 인기는 선풍을 넘어 거의 광풍 수준이었는데, 그중 경란이란 여인은 자신을 난설헌의 후생(後生)이라 여길만큼 시에 흠취돼 '조선시선'에 소개된 123수에 모두 차운(次韻, 댓글)을 달아 시를 썼을 정도였다. 그녀는 난설헌의 죽음의 방식마저 흠모했으니 자신도 27살에 죽으리라 예언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구지참(三九之讒, 3X9=27)이다. 하지만 그녀는 27살이 넘도록 죽지 않았던 바, 역시 자신은 난설헌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라고 몹시 한탄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이 그와 같은 극성팬에게만 국한됐던 것이 아니었으니 난설헌의 시에 대해 처음으로 표절을 제기했던 '열조시선'에서도 '난설헌의 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세인들에게 화자되고 있다'고 상찬해 마지않았다. 더우기 시인들은 표절의 문제를 시상(詩想)의 승화나 청출어람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던 바, 청나라 시인 손도(孫濤)는 '대부분의 시인들은 옛 시를 많이 외우는데, 시를 짓다 보면 이것을 자기 것으로 생각해 무의식 중에 갖다 쓰는 경우가 있다' 했으며, 오교(吳喬)는 '옛 시인의 시구가 너무 많다보니 뒷사람에게는 중복된 구절이 따르기 마련이다. 어찌 일일이 옛 시구를 따져가며 시를 지을 수 있겠는가. 의경(意境, 작가의 imagism)을 표현하다보면 서로 같아지는 경우는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는 일'이라며 '이것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까지 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조선에서는 오히려 찾아보기 힘든 경우였으니, 서포 김만중처럼 매 편마다, 매 구마다 흠집을 찾았다. 그리하여 위작과 표절의 문제가 400년 넘게 이어져오고 있는 바, 어떤 이의 말대로 '그녀가 조선에서,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 3가지 불행이었다'는 그 불행 중의 하나를 여하히 만족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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