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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티벳의 역사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0. 29. 00:12


    티벳이 1950년까지 자주 독립국이었다고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마구잡이로 영토를 넓히던 강희제(청 제국의 4대 황제, 재위 1661-1722) 시절 복속된 이후로 내내 청나라의 영토였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땐 그랬었다. 1717년 강희제가 티벳을 침공하여 수도 라사(Lhassa)를 함락시킨 후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시킨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옹정제의 치세인 옹정 2년(1724) 이후로는 티벳의 영수 달라이 라마(Dalai Lama)를 티벳 총독 주장사대신(駐藏事大臣)과 같은 반열에 두어 사실상 자치를 허용하였다.(그렇다고 속국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역사·민족적 티벳의 영역


    티벳 개와 포즈를 취한 장족(藏族) 처녀

    장족은 티벳 국민의 대종을 이루는 민족으로 중국어로는 '짱쭈'로 발음된다.



    이후 청나라가 무너진 1912년 티벳도 독립을 선언하며 주권을 되찾았으나, 1950년 10월 7일 마오쩌뚱의 중국 공산당이 전격적으로 티벳을 침공하였다. 1947년 영국이 인도에서 완전 철수하며 티벳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고,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유엔과 미국이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 벌인 공격이었다.


    달라이 라마는 국제사회에 자국에 대한 관심과 원조를 호소했으나 한국전쟁에 미국과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는 터라 티벳은 관심 밖의 일이 되었고 결국 티벳은 다시 중국에 먹히고 말았다. 티벳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자치권과 달라이 라마의 권위는 인정하되 종주권은 중국에 있다'는 합병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재의 티벳 자치구 영역

     


    티벳의 국기


     

    하지만 중국은 이 조건을 뒤집고 직접 통치를 실행하였던 바, 1956년에는 참도 지방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무장 봉기가 일어나 인민해방군과의 교전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59년 3월 10일, 드디어 수도 라싸를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 반중국, 반공산당 봉기가 발발하였으나 단 며칠만에 무자비하게 진압되었고,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가 망명정부를 세우게 된다.


    이상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가 '티벳에서의 7년'이다.(1997년) 하인리히 하러의 자전적 기록을 바탕으로 '불을 찾아서'의 거장 장 자크 아노 감독이 만들었는데, 시대적 배경과 스토리를 '윤무학 교수의 동양철학' 까페에서 빌려보았다.



    라싸의 포탈라 궁

    본시 달라이 라마의 궁으로서 티벳 사람들의 신앙 같은 곳이다. 티벳 독립 운동 당시 중국은 포탈라 궁의 폭파를 운운했고 실제로 포탄이 날아들었다.


    영화 '티벳에서의 7년' 포스터



    영화감독 : 장 자크 아노

    배우 : 브래드 피트


    1939년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는 임신한 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히말라야의 낭가 파르파트(해발 8,125m : 독일에서는 우리 산이라고 부른다) 등반을 위해 독일 원정팀에 합류한다. 해발 67백미터에 베이스 캠프 4개를 세웠지만 원정에 실패하고 대영제국과 독일 사이 전쟁이(2차 세계대전) 선포되어 전쟁포로가 되는데 하인리히 하러도 포로가 된다.


    하러는 포로수용소에서 5번의 시도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원정 대장 피터 아우프슈나이터와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집에 돌아가지 않기로 하고 거리상 가장 가까운 티베트로 향한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고립된 나라 티베트 달라이 라마가 있는 금단의 도시 라마에 들어간 몇 안 되는 외국인이다. 그는 종교적 영적인 지도자인 당시 13세 달라이 라마에게 서방세계의 문명을 가르쳐주며 마음의 변화를 가진다.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는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의 살아있는 현신으로 추앙받는다.


    티벳에서의 7은 오스트리아의 등반가이자 작가인 하인리히 하러의 티베트 생활을 담은 실화이다. 그는 중국의 티베트 침략이라는 역사적인 슬픔을 뒤로하고 1951년 오스트리아로 돌아간다. “중국은 티베트를 점령하며 6천개의 수도원이 파괴되고 백만 명의 티베트 인이 목숨을 잃었다. 1959년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 라마는 중국과의 관계에 평화적인 해결책을 간구하며 현재 망명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198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하인리히 하러와는 생전에 좋은 벗이었다고 한다.”(하인리히 하러, 2006년 사망)


    티베트에는 이런 어차피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고 해결하지 못할 일은 걱정해도 소용없다.”는 말이 있다. 광활하고 경이로운 자연을 가진 티베트의 독립을 기원한다.



    영화의 실제 주인공 하인리히 하러

     오른쪽은 말년의 하인리히 하러와 인도 망명 중의 달라이 라마


    아이거 북벽의 하인리히 하러

    1938년 하인리히 하러는 세계 최초로 알프스 3대 북벽 아이거를 정복했다.(사진 가장 왼쪽)


    히말라야 낭가파르파트

    1938년 하인리히 하러는 이 산에 도전했다가 영국군의 포로가 돼 파키스탄에 구금되는데, 이후 5번의 탈출 끝에 2,000km가 넘는 길을 길을 걸어 티벳에 도착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어린 달라이 라마를 만나 우정을 쌓지만.....


    1950년 중공군에 체포된 하인리히 하러


    이후 그는 오스트리아로 추방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티벳에서의 7년' 


    1983년에 쓴 '티벳으로 돌아와서' 


    변치 않은 우정


    1950년 라싸를 점령한 중공군


    포탈라 궁 앞을 지나는 인민해방군


    티벳 독입 시위를 제압하는 인민해방군



    그런데 우리가 언뜻 오해하는 게 있다. 티벳이 원래부터 유명무실했던 별볼일없는 나라이지 않았겠나 하는 인식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니 티벳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강했던 나라로,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어 겨우 삼국을 통일했을 당시 티벳의 전신인 토번(吐蕃)이란 나라는 당제국과 막상막하의 국력으로 고하(高下)를 다투던 나라였다.


    우리가 잘 아는 백제 유장(遺將) 흑치상지는 토번의 공격을 7년 동안 막아내며 이름을 알린 경우였고, 그들의 등살에 당 황실에서는 문성공주를 토번 왕 송첸캄포에게 출가시켜 비위를 맞춰야 했다. 747년 고구려인 고선지가 이름을 높인 파미르 고원 연운보(連雲堡) 전투도 바로 토번과의 싸움이었다. 



    당번회맹비

    당과 토번 간에 체결된 5.6m의 평화협정비문이다.


    당과 토번의 영역



    위 당번회맹비(唐蕃會盟碑)는 석가모니 성지인 라싸 죠캉(大昭) 사원 앞에 세워진 토번과 당나라 간의 평화협정문으로, 두 나라가 아저씨(토번)와 조카(당)의 관계로써 서로 침범하지 말고 사이좋게 각자의 영역 속에서 잘 살자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 비는 문성공주를 시집보낸 당 황실에서 그 평화 무드 속에 조영한 것인데, 토번이 아저씨의 입장인 것을 보면 당 제국으로서는 상당한 굴욕을 감수했음을 알 수 있다. 토번은 그만큼 강한 나라였던 것이다.(우리가 언제 이런 입장이었던 적이 있는가?)


    이제 이 글의 의미는 분명해졌다. 우리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정신 바짝 차리자는 것이다. 일의 성격상 중국인들을 많이 만나는데, 앞서도 말했지만 그들의 태도는 늘 고압적이다.(이들에게는 애오라지 한국이 자신들의 속국이요 번국이다) 더 같잖은 것은 오리지널 중국인보다 소위 조선족이라 불리는 족속들이다.


    그들에게는 한국인의 DNA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피의 동질성을 기대하면 오산이니, 그들 또한 근거 없는 우월감을 지니고 있다. 아니, 오리지널 중국인보다도 더 중국의 이익을 대변한다.(오죽하면 내가 '왜놈들보다 왜놈 앞잡이 노릇하는 조선놈들이 더 무섭다더니....' 라는 말을 했을라구)


    또 다른 의외적인 것은 만주족이 보이는 한국인에 대한 친밀성이다. 그들은 한족이나 조선족에 비해 훨씬 살갑고 순수하다.(그들은 소수이기도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이 만주족이라는 것을 숨겨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아마도 한족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는 듯하다)


    아무튼 그들은 우리 민족과의 무언의 유대감이 흐르는 듯한데, 과거 역사 시간에 배웠던 말갈, 여진, 숙신, 읍루 등 우리 민족과 이웃했던 이런 민족들이 떠오르며 괜히 친숙한 감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떨 때는 불연듯 이런 생각도 든다. 기회가 되면 그들 민족과 합쳐 북방민족 연합국가를 이뤄보면 어떨까 하는.....


    그런데 조선족에게서 (다 그런건지 내가 만나본 놈들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정체성의 고민 따위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일까? 그래봤자 중국화된지 겨우 3대에 불과한 놈들인데..... 혹시 이런 것도 우리 민족의 특질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재일동포 중에서는 한민족에 대한 정체성으로서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 귀화를 거부하며 불이익을 견뎌내는 사람이 상당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유독 중국교포에게서는 민족적 자긍심을 찾아볼 수 없는 건지, 정말로 두고두고 연구해볼 일이다.


    끝으로 달라이 라마의 방한에 관해 한 줄 쓰고 싶다. 그는 1959년 인도로 망명한 후 그후 60년간 세계 각국을 돌며 티벳의 독립을 호소했고, 이와 같은 비폭력 투쟁으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불교도가 있는 한국에는 한 번도 온 적이 없다. 한국정부에서 내내 비자발급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는 물어보나 마나이다. 반면 일본에는 22년간 34차례의 초청을 받아갔던 바, 우리가 과연 주권국가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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