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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축구 리즈 시절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0. 16. 08:40

     

    오늘 남북한 간에 벌어진 월드컵 예선 경기는 결국 중계되지 않았다. 세상은 www(world wide web)의 시대가 열린 지 오래지만 북한이란 나라에서는 그것도 통용되지 않았다. 현지 생방송은 물론 인터넷 문자 중계조차 허락되지 않은 그 깜깜이 경기의 결과는 9시 10분경 KBS 뉴스 시간에 흘러나왔다. 소식을 전하는 앵커의 목소리가 힘이 없어 순간 덜컥했다. 졌거나 혹은 다른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짐작에서였는데, 결과는 0:0 무승부였다. 물론 결과는 불만족스럽지만 선수들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경기를 끝낸 것만도 다행이라 여기며 위안을 했다. 북한은 모든 예측을 불허하는 알 수 없는 나라이므로.....

     

    북한이 예측할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을 실감케 해주는 일이 오늘도 있었다. 어떠한 미디어도 동반되지 않은 이상한 경기라는 것을 앞서 말했지만, 그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관중이 한 명도 없이 진행됐다는 사실이었다.(앵커는 경기 결과보다 이 사실을 먼저 보도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전력 평가에서 뒤지는 북한이 '자신들이 크게 지는 꼴을 인민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라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을 듯싶다. 그와 같은 결정은 당연히 북한의 최고 실력자 김정은이 내렸을 것이다.(하지만 옳은 결정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우려하던 것은 오직 북한 4만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 속에서 달라질지도 모를 경기 흐름이었는데, 그런 합법적 어드벤티지를 스스로 걷어차다니.....)

     

     

    ???
    관객도 중계진도 취재진도 없었던 역대급의 이상한 시합

     

     

    21세기에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게 속상하기는 하지만 스포츠가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일은 사실 비일비재했다. 축구 하나를 놓고 봐도 그러한즉, 지난 60년대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선수단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아 우리가 홈 어드벤티지를 버리고 제3국에서 경기를 치러야 했으며, (다행히도 한국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 1966년 영국 월드컵 예선에서는 북한에 전력이 크게 뒤지자 아예 예선전 자체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 이유는 오늘 북한이 무관중 경기를 치른 이유와 같았으니 '대한민국이 크게 지는 꼴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싫어서'였다.(한국은 벌금을 물었다)

     

    오늘 포스팅하려는 내용이 바로 그때의 일로서, 당시 북한은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를 대표하는 유일한 나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었다.(그때는 그 3대륙에 걸린 본선 티켓이 달랑 1장이었다) 북한은 예선전에서 마지막 결전을 호주와 치렀는데, 당시는 두 나라가 서로 국가로 인정하지 않던 시절이라 홈 & 어웨이 방식이 채택되지 못하고 제3국인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두 게임이 벌어졌고, 모두 북한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며 본선에 진출하게 된 것이었다. 아시아 팀으로 쾌거라 할만한 일이었다.

     

    ~ 반면 우리나라는 1970년 멕시코 월드컵과 1974년 서독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아시아·오세아니아 대륙에 배당된 단 1장의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호주와 붙었지만 아쉽게도 분패했다. 1969년 서울에서 열린 마지막 결정전, 경기 스코어 1:1 상황에서 후반 페널티 킥 찬스를 놓친 한국은 종합 전적에서 밀려 탈락했다.(그때 똥볼을 찬 임아무개 선수는 국민들의 비난 속에 결국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최종 예선은 더욱 안타까웠으니, 이스라엘을 누르고 이번에도 호주와의 최종 예선을 치른 한국은 홈 & 어웨이에서 1:1 무승부가 되어 결국은 제3국인 홍콩에서 마지막 결정전을 치렀는데 1:0으로 분패했다.(내가 생각하는 가장 아쉬운 경기임)

     

    ~ 당시 호주에서의 1차전을 비기고 2차전을 치르러 왔던 호주 감독은 한국의 장신 스트라이커 김재한 선수를 평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그냥 선수라고 생각한다'고 답했고, 호주 골키퍼 프레이저 선수는 한국의 동네 꼬마들하고 공을 차는 등 시종 여유를 부리다 김재한 선수에게 동점골을 먹고 물러갔다. 그래서 홍콩에서 파이널 게임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 막판 체력이 달린 한국이 1:0으로 지고 말았다.(얼마나 억울하고 분하던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서울 경기에서의 김재한의 동점골


    1966년 영국 월드컵은 특히 이변이 많았던 경기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이 강호 브라질의 조별 리그 탈락이었다. 토너먼트에서 브라질과 맞붙게 될 것을 염려한 주체국 잉글랜드는 브라질의 예선 3경기 중의 2경기(헝가리전과 포르투칼전)에 영국심판을 배정해 편파판정을 획책했다. 브라질은 서독 심판이 배정된 불가리아전만을 이기고 나머지는 모두 져 1승 2패로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 3연패를 노리던 브라질에게 닥친 사상 초유의 조별 리그 탈락 사건이었다.

     

    두 번 째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아시아·오세아니아 대표로 참가한(당시 아프리카 대륙팀은 FIFA의 홀대에 예선 불참을 선언했다) 북한의 선전으로, 특히 유럽의 전통 강호 이탈리아를 침몰시킨 사건은 월드컵 사상 최대 이변 중의 하나로 지끔껏 일컬어지고 있다.(2018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은 이 사건을 월드컵 역대 충격적 사건 중 4위로 선정했다. 참고로 1위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독일에 1:7로 대패한 것,  2위는 작년에 우리나라가 독일을 2:0으로 꺾은 것, 3위는 1950년 잉글랜드가 미국에 1:0으로 패배한 것)

     

     

     

    1966년 영국 월드컵 기념우표

    여왕만을 도안으로 삼을 수 있다는 관례를 깨고 최초로 축구 선수를 도안으로 한 우표가 발행됐으나(여왕의 실루엣을 넣어) 3종 모두 FIFA가 규정한 명백한 반칙(키킹 파울, 골키퍼 차징 등)에 해당돼 논란을 낳았다. 그런데 선견지명이었을까, 1966년 영국 월드컵은 가장 많은 파울과 오심으로 얼룩진 최악의 월드컵이 되었다. 


     

    북한의 조별 리그 1차전 상대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북한이 스피드를 앞세운 팀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자신들의 체격적 우위를 앞세워 고의적인 파울을 자행했다. 그리하여 북한의 중앙공격수 강용운 선수를 퇴장시켰던 바,(당시는 부상당한 선수에 대한 교체제도가 없었다) 10명으로 싸워야 했던 북한은 결국 0:3으로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2차전 상대인 칠레에게는 1:1 무승부를 거두어 아시아팀 사상 처음으로 승점 1점을 확보하였다. 0:1로 끌려가다 후반 43분 박승진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진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북한 감독 명례현은 다음과 같은 기염을 토했다. "우리 선수들이 점점 좋아지고 있어. 다음에는 내레 이태리를 꺾어보이갔어!"

     

     

    북한전에서 첫 골을 넣고 기뻐하는 소련의 말로피에프

     

     

    북한 감독의 발언에 유럽 기자들은 모두 코웃음을 쳤다. 본선 진출 16개 팀 중 최약체로 평가받고 있는 북한이 한 게임을 비겼다고 다음에는 유럽의 강호 이탈리아를 이기겠다 큰 소리를 치다니..... 명례현의 호언은 며칠 후 북한과 이탈리아와의 시합이 벌어지자 다시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시작하자마자 거칠게 밀어붙이는 이탈리아에게 북한은 3번이나 결정적인 위기를 맞았던 바, 본선에 올라온 변방의 출전국들이 거의 그러했듯 북한 역시 대량 실점의 선물을 안겨줄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당시 이탈리아는 칠레에 2:0으로 이겼으나 소련에는 0:1로 패했던 바, 북한에 지면 무조건 탈락인 위기 상황이었다)

     

    그런데 명례현의 호언은 전반 중반부터 현실이 될 듯도 보였으니, 북한은 게임이 진행될수록 그들의 장기인 놀라운 스피드를 보여주었고, 이에 가끔 역습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카데나치오(빗장수비)가 뚫리는 광경이 연출됐던 것이었다. 그러자 전반 34분, 이탈리아의  주장 자코모 불가렐리가 역습해 들어오는 북한의 오른쪽 공격수 박승진의 다리를 향해 깊은 태클을 시도했다. 물론 스피드를 제어할 의도였다. 그런데 그 태클은 오히려 자신에게 큰 부상을 안겨주었으니 태클을 피해 넘어지던 박승진이 불가렐리의 다리를 깔아버린 것이었다. 결국 불가렐리는 부상으로 퇴장당했고, 북한은 이탈리아의 흐트러진 수비 틈을 더욱 파고들었다.

     

    전반전이 끝나가던 42분 무렵, 드디어 일이 벌어졌다. 북한 공격수 임성휘가 센터서클에서 길게 센터링한 공을 이탈리아 수비수가 걷어냈고, 이 공은 공격에 가담한 북한 수비수 하정원의 머리를 맞고 다시 이탈리아 진영으로 넘어왔는데, 그것이 한번 바운스되어 주공격수 박두익 앞으로 굴러왔다. 박두익이 그것을 몰아 골 에어리어 앞까지 가나싶더니 그대로 골문을 향해 쏘았다. 골키퍼 알베르토가 반응했지만 워낙에 벼락같은 슈팅이었던 바, 반응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었다. 공은 왼쪽 골네트 그대로 꽂였다.

     

     

    전반 42분, 박두익의 벼락같은 결승골이 터지는 순간
    이 골로 세계는 경악했다.

     

     

    후반들어 이탈리아는 만회를 위해 진력했지만 수적 열세 때문인지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고, 북한은 전반과 다름없이 수비 위주로 나가며 가끔 기습적인 역습을 선보였는데, 그중 박두익의 킬 패스를 받은 김봉환의 슈팅에 이탈리아 사람들은 또 한번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골키퍼 알베르토의 선방에 실점은 면했지만 골키퍼와 1:1 상황에서의 노마크 슈팅이었다. 이탈리아 역시 비슷한 찬스를 맞았으나 이번에는 북한 골키퍼 리찬명이 선방했다. 이후로도 이탈리아는 계속 문을 두드렸으나 끝내 골문을 열지 못한 채 경기는 끝이 났다. 1:0. 전반전에 터진 박두익의 골은 그대로 결승골이 되었고, 이탈리아는 아시아 팀에게 져 탈락한 최초의 유럽 팀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돌아가야 했다.

     

     

     

    전설이 된 사다리 전법

    평균 신장 165cm의 북한 팀이 장신의 이탈리아 파케티 선수와 경합해 로빙 볼을 따내고 있다. 왼쪽부터 김봉환, 박승진, 박두익, 한봉진, 임승휘 순이다.(이후 다른 선수를 의지한 헤딩은 반칙으로 규정되었던 바, 다시는 볼 수 없는 광경이 됐다)

     

    승리에 기뻐하는 북한 선수들과 임원들

    3년간 합숙을 하면서 호흡을 맞춘 '천리마 축구팀'으로 알려졌다. 이때의 북한은 우리보다 훨씬 GNP가 높던 시절로 북한팀의 축구화가 경제 수준을 말해준다.

     

     

    소련에 이어 조 2위로 8강에 진출한 북한은 브라질을 3:1로 꺾고 올라온 포르투갈과 만났다. 기세가 오른 북한은 포르투갈마저 몰아붙였던 바, 경기 시작 23초만에 박승진이 중거리 슛으로 첫 골을 터뜨렸다. 이어 전반 21분 리도운이 두 번째 골을, 1분 뒤에는 양성국이 한 세 번째 골을 넣었다. 북한의 완승이 예상되는 순간으로 이대로 가면 북한은 주최국 영국과 4강전을 치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북한의 기적은 거기까지였다. 흑표범의 별명을 가진 포워드 에우제비오가 전반 27분 문득 포효하며 첫 골을 만들어내나 싶더니 이후 후반 14분까지 연달아 4골을 성공시키며 게임을 역전시킨 것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은 다시 한 골을 보탰고 게임은 그렇게 끝났다. 공은 둥글다는 만고의 진리가 또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에우제비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북한팀

    북한팀이 조금만 더 영리하게 운영했다면 4강에 오를 수도 있는 게임이었다. 그들의 기적은 여기서 멈췄지만 이들은 북한으로 돌아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충분히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그들이었다.

     

     

    북한팀은 이렇듯 거짓말처럼 나타나 거짓말 같은 게임을 하고는 그 후 거짓말처럼 세계 무대에서 사라져 버렸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들의 전력은 이제 찾아볼 길 없고, 지금은 그저 차고 달리는 뻥 축구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 모두가 폐쇄 사회로 들어서면서부터 세계와 점점 멀어진 때문이다. 따라서 발전하고 싶으면 부지런히 세계 선진 축구와 교류하며 그 갭을 좁히는 수밖에 없을 텐데 오히려 무관중 무중계 경기라니..... 북한은 정말이지 예측을 불허하는 알 수 없는 나라이다.

     

     

    그때를 기념해 1978년 북한에서 발행한 우표

     

    그때를 기념해 2005년 북한에서 제작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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