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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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서대묘 사신도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16. 00:04
7개월 간의 대규모 개편 끝에 국립중앙박물관 선사고대관과 고구려실이 2월 14일 재개관했다. 기다리던 개관이라 일반개관일인 다음 날 곧바로 찾았다. 가장 기대가 컸던 곳은 고구려실이었다. 위상에 비해 턱없이 작았던 고구려실이 약 2배로 확장되고 한번 도 공개되지 않았던 고구려 유물이 진품으로 전시된다는 사전 보도도 기대가 됐거니와, 한동안 볼 수 없었던 강서대묘의 사신도(四神圖)를 다시 보게 되어 기뻤다. 강서대묘 사신도가 전시된 공간에 들어서면 흔히 말하는 '기(氣)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는 1907년 한 프랑스 학자가 중국 집안에 위치한 연화문총 고구려 고분에서 처음 발견한 후 이를 학계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학계에서는 도교의 영향으로 등장한 고급진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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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로 시집간 고구려 여인 문소황태후 고조용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9. 22:49
앞서 북위(北魏, 386∼534)를 3회에 걸쳐 집중 포스팅한 적이 있다. 북위라는 나라가 중국 역사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지만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의 역사·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까닭이다. 이 나라의 이름은 본래 위(魏)였으나 조조의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로 불린다. 하지만 조씨의 위나라는 단명한 반면 북위는 250여 년간이나 장수했다. 조씨의 위나라는 동방의 고구려와 충돌이 잦았지만 북위는 고구려 ·백제와도 친했다. 그렇듯 친밀한 관계가 오히려 문제가 된 적도 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관계가 무난했던 북위는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는 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침공에 당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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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서 10성을 설치한 태조왕 고궁(高宮)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3. 20:53
오늘은 5대 모본왕에 뒤 이은 6대 태조왕의 서방 경략(經略)을 이야기를 하려 한다. 태조왕에 관한 기록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3년(AD 55년) 봄 2월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는 의 내용이다. 보통 요서는 랴오허(遼河) 강의 서쪽으로 비정된다. 그 동쪽은 당연히 요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배우기를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했다고 배웠고, 이것은 고구려의 확장에 일획을 긋는 큰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서안평은 내내 지금의 단둥시(丹東市) 일대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이율배반이다. 앞서 말한 대무신왕과 모본왕이 지금의 하북성·산서성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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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서성까지 진출했던 고구려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1. 21:39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의 북경과 천진시, 하북성 일대까지 미쳤다는 앞서의 포스팅에 대해 거의 인격모독적인 댓글로써 저격한 분이 있었다. 필시 중국인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험한 말을 할 턱이 없기에. 까닭에 답글을 생략하고 그냥 댓글을 지워버렸다. 앞으로도 중국인들로 여겨지는 글이 올라온다면 고민 없이 곧바로 삭제시킬 생각이니 애써 댓글을 달지 말길 바란다. 차제에 말이거니와 사실 고구려의 영토는 하북성뿐 아니라 산서성에도 미쳤다. 물론 사료에 기인한 주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말한 유주자사 진(鎭)의 경우처럼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광개토대왕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5대 모본왕(?~53) 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동명성왕의 건국 이후 2대 유리왕부터 정복사업을 시작하였던 바, 유리왕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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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하북성 갈석산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1. 30. 19:48
앞서 '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에서 주목한 갈석산(碣石山)은 우리 고대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河北省) 진황도(秦皇島, 친황다오)시 북쪽 창리현(昌黎县), 푸닝구(抚宁区), 루롱현(卢龙县)의 교차점에 자리하며, 남북 24㎞, 동서 20㎞, 면적 320㎢에 높이는 해발 695.1m로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발해만 연안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니 갈석산이 영산(靈山)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도 그와 같은 지리적 조건에 부합된 바 클 것이다. 아울러 갈석산은 중국의 역대 7명의 황제가 오른 산으로서 유명한데, 나열하자면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과 2대 황제 호해(胡亥), 한(漢) 무제(武帝), 위(魏)의 조조(曹操), 당 태종 등으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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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1. 27. 21:58
앞서 언급한, 고구려가 만리장성 이남까지 진출해 기주(冀州) 요서군(遼西郡)까지 다스렸다는 것은 (隋書 卷四 煬帝 下)에 실려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수양제 양견은 한나라와 위나라 때부터 중국의 영토였던 그곳을 맥족(貊族)의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분개하고 있는데, 원문 중에서 그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而高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荐食遼·獩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窟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實繁以迄今, 眷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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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서쪽 국경은?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1. 26. 23:57
475년 음력 9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를 개시한 일, 그 장수왕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공격에 수도 하남 위례성이 함락되고 사로잡힌 부여경(扶餘慶, 개로왕)이 아차산성 아래서 참수된 일, 부여경의 아들(혹은 동생) 부여흥(扶餘興,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하여 웅진백제를 연 일, 그리고 당시의 국경이 안성 도기동 산성과 안성천을 잇는 라인이라는 것을 앞서 말한 바 있다. (☞ '백제·고구려의 국경선이기도 했던 안성 도기동') 그렇다면 고구려 전성기 때의 서쪽 경계, 즉 중국과의 국경은 어디였을까? 그것을 추정할 만한 기록을 영양왕 9년조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589년 2월 고구려가 말갈군사 만 명을 이끌고 요서(遼西)를 공격했다는 내용인데, 통일제국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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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의 고구려 다리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2. 6. 20. 00:28
과거 군복무 시절, 북한이 살포한 전단 제거작업에 나갔다가 그중 한 삐라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내용인즉 월북한 국군 출신의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도식적인 체제 선전이었다. 물론 모두 사진이 함께 실렸다. 그리고 그중에는 그들이 단체로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광경도 있었는데, 내가 놀란 것은 월북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뱃놀이를 즐기던 대동강의 풍경이 흡사 파리 세느강과 같은 이국적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여긴 이유는 단 한가지로 강변 가까이 고층건물이 밀집돼 있는 까닭이었다. 이것은 한강 등 남한의 강에서는 낯선 풍경이었으니, 이른바 냉대 하계고온기후(쾨펜의 세계기후구분에 따른 분류)에서 비롯된 여름철 집중호우기를 거쳐야 되는 서울의 한강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