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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위로 시집간 고구려 여인 문소황태후 고조용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9. 22:49

     

    앞서 북(北魏, 386∼534)를 3회에 걸쳐 집중 포스팅한 적이 있다. 북위라는 나라가 중국 역사에 미친 영향도 지대하지만 우리나라의 고구려, 백제의 역사·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까닭이다. 이 나라의 이름은 본래 위(魏)였으나 조조의 위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로 불린다. 하지만 조씨의 위나라는 단명한 반면 북위는 250여 년간이나 장수했다. 조씨의 위나라는 동방의 고구려와 충돌이 잦았지만 북위는 고구려 ·백제와도 친했다.

     

    그렇듯 친밀한 관계가 오히려 문제가 된 적도 있다. 472년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고구려 정벌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와의 관계가 무난했던 북위는 이 청을 들어주지 않았고, 오히려 이 사실이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는 바,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침공에 당하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는 <위서(魏書)>에「백제상 위주청벌 고구려표(百濟上魏主請伐高句麗表)」라는 이름으로 자세히 실려 있다.    

     

     

    교과서에 실린 북위의 지도 / 130년 동안 16개국 이상의 나라가 명멸하던 화북지방은 439년 북위에 의해 통일된다.
    개로왕이 참수당한 서울 광진구 아차산성 / 몽촌토성에서 붙잡힌 개로왕은 아차산성으로 끌려와 참수되었다.

     

    말하자면 북위는 백제보다 고구려와 더 친했다 할 수 있겠는데, 그것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물증이 2004년 중국에서 발견됐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4년 11월 백석대학 민경삼 교수가 중국의 뤄양(낙양)과 시안(서안) 일대에서 출토된 <낙양출토역대묘지집승(洛陽出土歷代墓誌輯繩)>이라는 묘지명 탁본집을 조사하다 북위 선무제(宣武帝, 483~515)의 황태후인 문소황태후의 묘지명을 찾아낸 것이다. (낙양은 북위의 수도였던 곳으로, 민교수는 낙양 문소황태후의 딸·사위·조카들의 묘지명도 함께 확인했다)  

     

     

    뤄양의 북위 경릉(景陵)
    2016년 중국이 공개한 경릉의 내부
    경릉은 선무제 원각(元恪)의 무덤으로 1년 간의 수리 공사 끝에 시민에 개방됐다.
    현실(관이 있는 방)에서 밖을 향해 찍은 사진
    선무제의 관

     

    뤄양 문소황태후의 무덤 영릉(寧陵)은 1946년 효문제(孝文帝, 재위 471~499)의 무덤인 장릉(長陵) 부근에서 도굴된 채 발견됐는데, 이때 '魏文昭皇太后山陵誌銘幷序'(위문소황태후산릉묘지명병서)라는 제목이 쓰여 있는 묘지명이 훼손된 모습으로 수습되었다. 발견 당시 크기는 59.5cm x 49.5cm였고 16행의 글자가 쓰여 있었다. 묘지명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고조용(高照容, 469~497)이라는 이름의 고구려 여인이었는데, 그 내용을 확인한 사람이 바로 민교수였다. 

     

     

    문소황태후 묘지명 / 뤄양 고묘박물관
    문소황태후 묘지명의 탁본
    발견된 당시의 영릉 모습 / 높이 23m,둘레 170m에 이르는 거대한 능묘다. 1947년 A. G. Wenley에 의해 확인됐다.

     

    묘지명에는 문소황태후 고조용이 기주(冀州) 발해수인(渤海蓚人)이며 어릴 적 고구려 땅 발해에서 북위로 이주하였고, 효문제의 귀인(貴人)이었다가 뒤에 아들이 즉위하자 황태후로 책봉되었다는 사실 등이 기록돼 있었다. 중국역사서 <위서>와 <자치통감> 등에도 고조용의 기록이 전하는데, <위서>에 적혀 있는 '젊은 시절 햇빛이 그의 몸을 따라가며 비추었다'는 이야기는 고구려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부인의 이야기와도 흡사하다.

     

    이와 같은 상서로운 햇빛에  감응되어 태어난 사람이 바로 북위의 8대 황제 선무제이다. <위서>에 따르면 문소황태후는 고구려인 아버지 고양과 어머니 개씨 사이에서 난 4남3녀 중 가운데 딸로, 13살 이전에 가족을 따라 발해에서 북위로 이주하여 용성진(龍城鎭)에 살았는데, 그 덕과 미모가 뛰어난 후궁으로 상표되었고 당시 정권을 쥐고 있던 헌문제(獻文帝)의 모친 풍태후(馮太后)의 눈에 들어 입궐하게 되었다. 이후 효문제의 둘째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곧 선무제 원각인 것이다.  

     

    선무제는 외척인 고조용의 오빠  사도공(司徒公) 고조(高肇)에 휘둘렸다. 이에 조정은 고조를 비롯한 고구려인들에 좌지우지되었고, 문소황태후 고조용 역시 정치력을 발휘해 작은오빠 고언의 딸 고영을 선무제의 비(妃)로 들이는 한편 자신의 딸인 장락장공주 원영을 큰오빠의 아들 고맹에게 시집보내어 조카를 부마로 삼았다. 고씨 일가의 아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고조와 북위 황제의 혼인 관계

     

    이에 북위의 조정은 고씨의 천하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 되었는데, 이쯤에서 고조용의 고향인 기주(冀州) 발해수(渤海蓚)를 다시 주목해 보자. 다시 말하지만 기주와 발해는 고구려 5대 왕 모본왕 이래로 고구려의 영토였던 곳이다. 

     

     

    기주 발해수의 위치 / 수나라 때의 행정구역 지도다. 위 중국 지도에서는 기주 전체를 수나라 영역에 포함시켰으나 문소황태후 묘지명으로써 기주의 북부가 대대로 고구려의 영토였음이 확인된다.
    북위를 배경으로 하는 넷플렉스 인기 드라마 '금수미앙(锦绣未央)' 속의 한 장면 / 505년 시작된 양나라와의 전쟁이 배경이다.

     

    선무제는 당연히 고구려와 가깝게 지냈으니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과 면접하고 대화한 내용이 <위서>에 전한다. 그는 또 불교에 심취하여 이에 간언하는 황실 종친과 신하들을 숙청하기도 했는데, 515년, 이른 나이인 33세로 붕어했다. 문소황태후 고씨는 그에 앞선 496년, 북행궁(北行宮)에서 낙양으로 돌아오다 한 무리의 도적떼의 습격을 받고 횡사했다. 대부분의 사가(史家)들은 실각한 또 다른 외척 풍씨 일가의 반격이라고 말한다. 

     

    아들 선무제는 귀인 고씨를 문소황태후로 추존한 후 후히 장사 지냈는데, 손자인 효명제(孝明帝) 때 효문제의 무덤인 장릉 부근으로 옮겨졌다. 오빠인 고조는 고조용 사후에도 계속 실권을 유지했다. 그는 514년 황명을 받아 서촉(西蜀) 일대를 정벌하던 중 선무제의 급서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다 대기하고 있던 태위(太尉) 고양왕과 영군(領軍) 우충에게 살해당했다. 그럼에도 고구려 계통의 고씨 일족은 계속 정권을 유지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이 죽었을 때 위의 효문제가 흰 예복을 입고 동쪽 교외까지 나가 애도했다고 하는 바, 고구려와 북위가 밀접한 우방이었음을 알 수 있다. 어느 사학자는 고구려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장수왕 때 더욱 중원으로 나아가지 않고 평양으로 천도한 것이 위나라와의 특수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라 했는데, 꽤 일리가 있다. 장수왕 때인 484년 고구려가 북위에 외교사절을 보냈을 때 위나라는 고구려를 강대국(我方强)이라 하여 남조(南朝) 제(齊)나라와 같은 레벨의 큰 관저를 내주었고, 이에 제나라 외교관이 매우 유감스러워했다는 사실이 <남제서(南齊書)>에 전하기도 한다.

     

    2021년 중국 관영매체인 신화통신이 갑자기 효문제를 띄워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북위 효문제와 그와 부인 문소황후로 분장한 배우가 룽먼석굴(북위가 조성한 불교석굴)에서 시종들의 시중을 받으며 분향하고 예불드리는 동영상을 공개한 것인데, 티베트의 장족, 신장의 위구르족을 포함한 이민족 유화정책의 일환으로써 북위 효문제를 띄우는 일종의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효문제는 한족이 아닌 선비족 출신이나 중원을 점령한 후 국가체계를 한족화(漢族化)한 이른바 한화(漢化)정책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성(姓)마저 탁발씨에서 원(元)씨로 바꾸었다. 

     

     

    신화통신이 공개한 예불 준비 장면 / 뒤에 용문석굴 봉선사동의 석불이 보인다.
    낙양 인근의 용문(룽먼)석불은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494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수·당 시대까지 조성되었다. 사진은 675년 완성된 '봉선사동'으로 용문석불의 얼굴 같은 곳이다.

     

    위 행사는 꼼한 고증으로 인해 준비 기간만 석 달이 걸렸다 하며, 용문석굴의 부조 '효문제 예불도'와 '문소황태후 예불도'의 장면을 충실히 재현했다고 한다. '효문제 예불도'와 '문소황태후 예불도'는 효문제와 문소황태후 고조용이 용문석굴에서 예불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용문 빈양중동(賓陽中洞)에 있던 이 부조는 일찍이 도굴돼 지금은 미국 캔자스시티 넬슨-애킨스 미술관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각각 소장돼 있다. 북위를 배경으로 하는 넷플렉스 인기 드라마 '금수미앙(锦绣未央)' 속 의상 '문소황태후 예불도'의 복식을 따라 고증했다는 후문이다. 

     

     

    용문석굴 봉선사동
    용문석굴 빈양동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효문제 예불도'
    효문제 예불도 부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빈양동 '제후예불도'
    캔자스시티 넬슨-애킨스 미술관의 문소황태후 예불도
    예불도 속 문소황태후
    신화통신이 제공한 예불도와 재현 장면 비교 사진
    용문석굴 빈양중동
    '효문제 예불도'와 '문소황태후 예불도'가 있던 내벽 (아래쪽 붉은 표시가 된 곳)
    그림으로 옮겼다.
    복원도를 그렸다.
    각각의 부조가 있던 곳
    부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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