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서 10성을 설치한 태조왕 고궁(高宮)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2. 3. 20:53
오늘은 5대 모본왕에 뒤 이은 6대 태조왕의 서방 경략(經略)을 이야기를 하려 한다. 태조왕에 관한 기록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3년(AD 55년) 봄 2월 요서(遼西)에 10성을 쌓아 한나라의 군대에 대비하였다(三年 春二月 築遼西十城 以備漢兵)"는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의 내용이다.
보통 요서는 랴오허(遼河) 강의 서쪽으로 비정된다. 그 동쪽은 당연히 요동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는 배우기를 311년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공격했다고 배웠고, 이것은 고구려의 확장에 일획을 긋는 큰 사건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서안평은 내내 지금의 단둥시(丹東市) 일대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한 이율배반이다. 앞서 말한 대무신왕과 모본왕이 지금의 하북성·산서성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모본왕의 다음 왕인 태조왕이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역사적 사실마저 말이 안 되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무위키'에서 말하는 서안평의 위치 따라서 기존의 학설을 무시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무시해야 되는 지경이다. 더욱이 기존의 역사·지리지에서 말하는 요서는 요하를 기준으로 나뉘는 땅이 아니라 랴오닝성(辽宁省) 베이진시(北镇市, 북진시)에 위치한 이우뤼산(医巫闾山, 의무려산)을 중심으로 나뉘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 해석이다. 지금의 이우뤼산은 우리나라의 국립공원과 같은 국가급풍경명승구로 지정돼 있으며 총 면적은 630㎢이다.
의무려산의 위치 이우뤼산(의무려산)은 후이산(微山, 휘산), 우뤼산(无虑山, 무려산), 류산(六山, 육산)으로 불렸으며 간칭으로는 리산(闾山, 려산)이라 불린다. 산세는 동북에서 서남 주향이며 인산산맥(阴山山脉, 음산산맥)의 여맥(餘脈)으로 종으로 45㎞, 횡으로 14㎞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50여 좌의 산봉우리가 있다. 최고봉 왕하아봉(望海峰)은 해발 866.6m이며, 오악 오진 10대 명산(五岳五镇十大名山) 중의 첸산(千山, 천산), 창바이산(长白山, 장백산)과 더불어 동북 3대 명산의 하나다.
'서남문'이라 불리는 의무려산의 구조물 의무려산의 명나라 산성 의무려산에서 본 북쪽 평원 의무려산의 운무 국사편찬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요서군(遼西郡)은 전국시대 연(燕)나라에 의해 처음 설치되었다. 요서군은 전한(前漢)까지는 이우뤼산(醫巫閭山)~롼허(灤河) 강 일대를 포괄하면서 14개 현(縣)을 거느렸지만, 후한 시기에는 현의 수가 5개로 줄어들었다. 조위(曹魏, 조씨의 위나라) 시기에는 수현(首縣)인 양락현(陽樂縣)을 비롯해 소속 현을 모두 롼허강 중·하류에만 두었고, 서진 시기에는 현의 수가 3개로 줄어들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요서의 지리적 정의를 이와 같이 정의하고 있음에도 기존 학자들의 학설을 들어 태조왕이 설치한 요서 10성이 '요서'에 있지 않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요서 10성을 요하의 훨씬 동쪽에서 찾아야 한다) 음주운전을 하고 왔지만 술은 마신 적 없다는 말과도 비슷하다.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이 구축한 아성이 얼마나 굳건한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하겠다.
반면 요서 10성을 롼허(난하) 아래서 찾으려는 학자들도 있는 바, 아래 지도는 그중의 한 사람이 <환단고기>와 같은 나름대로의 사료를 바탕으로 비정한 요서 10성의 위치다.
1. 안시(安市)성이니 개평부의 동북쪽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2. 석성(石城)이니 건안성에서 서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3. 건안(建安)은 안시성에서 남쪽으로 70리 떨어진 곳에 있고
4. 건흥(建興)은 난하의 서쪽에
5. 요동(遼東)은 창려의 서남쪽 경계에 있고
6. 풍성(豊城)은 안시성의 서북쪽으로 100리 떨어진 곳에 있고
7. 한성(韓城)은 풍성의 남쪽 200리에
8. 옥전보(玉田堡)는 옛날의 요동국으로 한성에서 서남쪽 60리 떨어진 곳에 있고
9. 택성(澤城)이니 요택성에서 서남쪽으로 50리 떨어진 곳에 있고
10. 요택(遼澤)성이니 황하 북류의 왼쪽 언덕에 있다.그림으로 설명한 바는 이러하다.
위 10성의 위치가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하기는 물론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태조대왕 69년조'의 기사는 만족시킨다. 거기에는"태조왕 69년 4월 여름, 왕이 선비족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니 요동태수 채풍(蔡諷)이 전사했다"고 쓰여 있는 바, 요동태수가 다스리던 요대현을 통념을 좇아 요하의 동쪽에서 찾게 되면 이 또한 이율배반이기 되기 때문이다. 태조왕 3년에 요동을 지나 요서를 경략했음에도 다시 요동을 공격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한 면이 있다. (반란 같은 것이 일어났을 수는 있겠지만)아무튼 태조왕은 무척 호전적이었던 듯하니 <후한서>에도 "장성함에 용맹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학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문제가 늘 따라붙는다. 무려 118년을 향유한 수명이다. 6대 태조왕 고궁(高宮)은 20대 장수왕보다 더 오래 산 사람으로 118세를 살며 94년 간 재위했다.(53~146년)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에 대한 수수께끼를 앞서 나름대로 풀은 바 있기에 전재한다.
..... 주몽은 북부여왕 해모수의 아들로 분명 해씨거늘 왜 고씨(고주몽)라 부르는가? 광개토대왕비에도 태초에 시조 추모(주몽)왕이 나라의 터전을 잡을 때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돼 있는 바, 주몽의 성이 해씨임을 알 수 있다.(惟昔始祖 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양서(梁書)>에서도 고구려의 동명왕은 북이(北夷, 북쪽 오랑캐) 이왕의 아들로써 이왕을 떠나 나왔다고 되어 있다.(高句驪者其先出自東明 東明本北夷 離王之子 離王出行)
..... 그런데 광개토대왕비에서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이 추모왕의 17세손이라 명시하고 있어 우리가 아는 고구려 왕의 족보와 어긋난다.(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우리는 광개토왕을 고구려 19대 왕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인의 사고에는 우리가 아는 광개토왕 이전의 18명의 왕 중에서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1명 있다는 뜻이다.
그 왕을 찾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다. 바로 5대 모본왕(慕本王, 재위 48~53) 해애루(解愛婁)로 대무신왕 해무율의 아들이다. 그는 형인 민중왕 해색주에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성군이었던 전왕(前王)들과 달리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망을 사다 결국 신하인 두로(杜魯)에게 살해되고 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태조왕 고궁의 어불성설의 수명과 재위 기간, 그리고 역성(易姓, 해씨에서 고씨로 성이 바뀜)은 문자 그대로 역성혁명이 일어났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 혼란이 무려 70년이나 지속되었다. 즉 해씨 정권이 고씨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해씨와 고씨 간의 피 비린내 나는 싸움이 있었고 왕좌가 몇 번이나 뒤바뀐 끝에 결국 고궁이 집권하는 파노라마틱한 광경을 엿보게 해주는 것이다. 사서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고궁은 고추가(高鄒加) 고재사(高再思)의 아들로 모본왕의 아들 해익(解翊)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으로 추론하면 고재사가 역성혁명의 주인공이었던 듯하나 나이가 많은 관계로 아들 고궁이 왕위에 오르고 그는 잠시 섭정을 하다 죽은 듯하다. 고궁이 왕좌에 연착륙했음은 국조왕(國祖王), 혹은 태조왕이라는 시호로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각주에는 스스로를 태조대왕이나 국조왕으로 호칭했다는 설명도 있다) 이는 태조왕 고궁으로부터 고씨의 고구려가 시작됐다는 뜻으로, 이후 마지막 28대 보장왕까지 고씨의 왕위 세습이 이어지게 된다.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북위로 시집간 고구려 여인 문소황태후 고조용 (0) 2025.02.09 중국 산서성까지 진출했던 고구려 (5) 2025.02.01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하북성 갈석산 (1) 2025.01.30 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 (3) 2025.01.27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0) 2025.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