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하북성 갈석산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1. 30. 19:48
앞서 '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에서 주목한 갈석산(碣石山)은 우리 고대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갈석산은 현재 하북성(河北省) 진황도(秦皇島, 친황다오)시 북쪽 창리현(昌黎县), 푸닝구(抚宁区), 루롱현(卢龙县)의 교차점에 자리하며, 남북 24㎞, 동서 20㎞, 면적 320㎢에 높이는 해발 695.1m로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발해만 연안에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니 갈석산이 영산(靈山)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도 그와 같은 지리적 조건에 부합된 바 클 것이다. 아울러 갈석산은 중국의 역대 7명의 황제가 오른 산으로서 유명한데, 나열하자면 중국 최초의 황제 진시황과 2대 황제 호해(胡亥), 한(漢) 무제(武帝), 위(魏)의 조조(曹操), 당 태종 등으로, 지금의 진황도라는 도시이름도 진시황에서 비롯됐다.
갈석산 발해만에서 보이는 갈석산 / 연봉이 발해만까지 이어진다. 겨울 갈석산 / '신악(神岳)갈석'이라는 푯돌이 서 있다. 진시황은 자신이 통일시킨 중국 대륙을 순력하며 동쪽 끝의 갈석산에 올랐던 바, 이곳이 당시 진나라의 동북쪽 땅끝임을 알 수 있다. 갈석산에는 당시 진시황이 재상 이사에게 새기게 했다는 '갈석명'(碣石銘)의 명문(銘文)이 있고, AD 207년 조조가 북방 오랑캐 오환을 물리치고 개선하는 길에 갈석산에 올라 바다를 보며 읊었다는 '관창해'(觀滄海)라는 시의 각자도 찾을 수 있다.
갈석산 연산산맥 갈석명이 새겨진 바위 갈석산의 도교사원 / 영산답게 유·불·선의 성지이기도 하다. 해발 695.1m가 표시된 갈석산 정상 바위 갈석산 정상부의 기암괴석 바다 쪽 괴석도 유명하다. 내가 갈석산을 장황히 소개하는 이유는 당연히 관광 홍보용은 당연히 아니고, 우리 민족과의 불가불의 연관성 때문이다. 앞서 <수서/ 양제기> (隋書 卷四 煬帝 下)의 기록을 소개한 바도 있지만, 갈석산 일대는 고구려가 408년(광개토대왕 18년)부터 589년(영양왕 9년)까지 적어도 180년 이상 점령해 다스렸던 지역이다. 이것은 시기까지 명확한 사실임에도 흔히 간과되고 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고구려는 만리장성을 넘어 최소한 59.9km까지 (산해관에서 갈석산까지의 거리) 진출해 일대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물론 <수서>에는 "고구려가 발해와 갈석산 사이로 밀고 내려와 요와 예의 지경을 자주 침범했다"(崇聚勃碣之間 荐食遼獩之境)고 쓰여 있으므로 그보다 훨씬 남쪽까지 진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산해관 · 갈석산 · 발해의 위치 만리장성의 최동단 관문 산해관 산해관 노룡두(老龍頭) 산해관 노룡두 또 한가지 상기해야 될 갈석산 관련 기록은 <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실려 있는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의 기점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라는 내용이다. <태강지리지>는 서진(西晉)의 초대황제인 무황제 태강(太康, 280~290) 년간에 <사기>색은의 용도로 편찬된 지리서로, 태강은 <삼국지연의>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사마염이 칭한 연호다.
요지는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그 고토(故土)에 설치했다는 한(漢)의 사군 중의 하나인 낙랑군이 지금의 진황도시(市)가 있는 하북성에 있었다는 사실이니, 고조선의 영토 역시 지금의 하북성을 포함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낙랑군=한반도 평안도'설과는 너무 거리가 있어 쉬 믿어지지 않는다. 아울러 <태강지리지>가 고조선이 멸망(BC108년)된 후 거의 400이나 지나 편찬된 책이므로 <사기>가 편찬된 한나라 때의 지명이 서진 때까지도 온전했을까 하는 것도 의문이다.
하북성의 위치 / 북경과 천진시를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진서(晉書)/지리지>에 <태강지리지>의 문구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이니 <진서/지리지> '평주(平州)조'에는 기주 → 유주 → 우북평군 → 유주 → 평주로 이어지는 현 하북성 지역의 변천사가 실려 있다.
"평주는 <상서(尙書) /우공편>에 나오는 기주(冀州) 지역으로 주나라 때에 유주(幽州)의 경계가 되었으며 한(漢)나라 때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다.... 위나라에서 동이교위(東夷校尉)를 두어 양평(襄平)에 거주하게 하여 요동(遼東) · 창려(昌黎) · 현토(玄菟) · 대방(帶方) · 낙랑(樂浪) 5군(郡)을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며 후에 다시 합하여 유주(幽州)로 삼았다.... 함녕(咸寧) 2년 10월에 창려(昌黎) · 요동(遼東) · 현토(玄菟) · 대방(帶方) ·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개를 설치하고 평주(平州)로 삼았다."
(平州案禹貢冀州之域于周為幽州界漢屬右北平郡......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後還合為幽州......咸寧二年十月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이라는 군현에 대해 가장 먼저 기술한 사람은 한나라의 사마천이다. 사마천의 생몰년은 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이다. 즉 한사군이 설치된 시기는 사마천이 살아 있을 때이니 그가 <사기/조선열전>에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킨 때라고 한 기원전 108년(원봉 4년/한무제 33년)은 명확하다 할 것이다. 또 조선의 옛 땅에 한의 사군(四郡)을 설치했다고 한 기술도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4군의 위치는 물론이요 이름마저 명시하지 않았다. 대신 이후의 사서들에 띄엄띄엄 4군에 대한 기록이 출현하며 유추를 도왔는데, 한반도 북부에 존재했다고 고정화된 지금의 통념과 달리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에 있지 않고 위에서 말한 하북성 부근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갈석산이 있다.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서 10성을 설치한 태조왕 고궁(高宮) (0) 2025.02.03 중국 산서성까지 진출했던 고구려 (5) 2025.02.01 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 (3) 2025.01.27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0) 2025.01.26 대동강의 고구려 다리 (0) 2022.0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