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구려와 동북공정 / 알아서 기는 학계와 셰셰를 외치는 정치인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2025. 1. 27. 21:58
앞서 언급한, 고구려가 만리장성 이남까지 진출해 기주(冀州) 요서군(遼西郡)까지 다스렸다는 것은 <수서/ 양제기> (隋書 卷四 煬帝 下)에 실려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수양제 양견은 한나라와 위나라 때부터 중국의 영토였던 그곳을 맥족(貊族)의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분개하고 있는데, 원문 중에서 그 내용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而高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荐食遼·獩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窟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實繁以迄今, 眷彼華壤, 翦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日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亟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擒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翻爲長惡, 乃兼契丹之黨, 虔劉海戍, 習靺鞨之服, 侵軼遼西.
(고구려는.... 발해와 갈석산 사이로 감히 밀고 들어와 요·遼와 예·濊의 지경을 자주 침범했다. 한나라와 위나라 때 이들을 토벌하여 그 소굴이 한때 허물어진 적도 있지만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되자 고구려의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어 그 땅을 영구히 차지하였고.... 나아가 그들은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해안의 수비군들을 죽이는가 하면 과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고구려가 요서(遼西)를 공략했다는 것은 <삼국사기/고구려 본기>에서도 나온다. 앞서 말한 고구려 영양왕 9년인 589년 2월 고구려가 말갈군사 만 명을 이끌고 요서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통일제국 수나라가 고구려 침공을 준비하고 있음을 안 영양왕이 일찌기 요서를 공략한 전력이 있는 말갈군을 전면에 내세워 기주의 요서군을 친 것이다. 수문제 때의 일이다.
수문제는 이에 분기탱천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604년 죽었다. 그러자 그 아들 양제는 100만 대군으로 고구려에 대한 재침을 감행하니 612년 정월, 기주 탁군(涿郡)에 대군을 집결시킨 후 병부상서 단문진을 좌후위대장군으로 임명한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큰 덕으로서 추상과 같은 명령을 내렸으니 황제는 도적의 무리를 정벌하겠다'고 천명한다.
(大業) 八年(612)春正月辛巳, 大軍集于涿郡. 以兵部尙書段文振爲左候衛大將軍. 壬午, 下詔曰: 「天地大德, 降繁霜於秋令, 聖哲至仁, 著甲兵於刑典. 故知造化之有肅殺, 義在無私, 帝王之用干戈, 蓋非獲已. 版泉·丹浦, 莫匪龔行, 取亂覆昏, 咸由順動. 況乎甘野誓師, 夏開承大禹之業, 商郊問罪, 周發成文王之志. 永監前載, 屬當朕躬.
결과는 잘 알려진 그대로이다. 양국의 전쟁은 수나라의 대패로 끝이 났으니, 수양제는 612~614년에 걸쳐 3차례나 대공격을 감행하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와 같은 대규모 전쟁은 국력의 피폐를 불러와 대제국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만다. 아무튼 이상으로 볼 때 고구려가 만리장성을 넘어 기주의 일부까지 점령했음은 분명한데, 당시 기주 북쪽 땅 유주(幽州)를 다스렸던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이 1976년에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서 화려한 벽화와 함께 발견된 바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무덤의 피장자 유주자사 진을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교과서 속 고구려의 최대 강역은 요하를 겨우 넘어선 수준이니 유주가 고구려의 영토일 리 없기 때문이다. 유주는 지금의 중국 북경을 포함하는 일대의 땅이니 딴은 황감하고, 한편으로는 쫄릴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기주 북부 요서군까지 공략한 고구려이거늘 기주 위의 유주를 다스리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덕흥리 고분 현실 입구 벽에 쓰여진 무덤의 축조연대는 AD 408년, 즉 광개토대왕 18년으로 고구려가 웅비하던 시절이기도 하다. 이렇듯 시기가 확실한 무덤임에도 우리는 스스로 쫄려 피장자 진을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치부하고 있으니 그저 한심할 뿐이다. 학계마저 이러하니 정치권이 중국에 설설 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중국은 더욱 동북공정을 견고히 하여 '고구려=중국의 지방정부'임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유력 정치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그저 '셰셰'를 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으니 앞으로 이 나라가 어찌 될지 심히 걱정스럽기만 하다.
무덤 안에 기록된 묵서명에 따르면 피장자가 역임한 관직은 건위장군(建威將軍)·국소대형(國小大兄)·좌장군(左將軍)·용양장군(龍驤將軍)·요동태수(遼東太守)·사지절(使持節)·동이교위(東夷校尉)·유주자사(幽州刺史)로서, 마지막 치소인 유주는 지금의 북경지방이다. 즉 당시 고구려의 영토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일대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유주자사 진에게 정무보고를 하는 무덤 속 유주 관할 태수들의 그림과 중국의 지도를 비교해보면 학계가 얼마나 편향된 생각으로 알아서 기고 있는지가 금방 파악된다.
'지켜야할 우리역사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산서성까지 진출했던 고구려 (5) 2025.02.01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였던 하북성 갈석산 (1) 2025.01.30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0) 2025.01.26 대동강의 고구려 다리 (0) 2022.06.20 구국의 영웅이 된 다문화 가정 출신 온달과 아차산성 (0) 2021.04.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