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영토가 현재의 북경과 천진시, 하북성 일대까지 미쳤다는 앞서의 포스팅에 대해 거의 인격모독적인 댓글로써 저격한 분이 있었다. 필시 중국인일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그렇게 험한 말을 할 턱이 없기에. 까닭에 답글을 생략하고 그냥 댓글을 지워버렸다. 앞으로도 중국인들로 여겨지는 글이 올라온다면 고민 없이 곧바로 삭제시킬 생각이니 애써 댓글을 달지 말길 바란다.
차제에 말이거니와 사실 고구려의 영토는 하북성뿐 아니라 산서성에도 미쳤다. 물론 사료에 기인한 주장이다. 그리고 그것은 앞서 말한 유주자사 진(鎭)의 경우처럼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광개토대왕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라 5대 모본왕(?~53) 때의 일이다. 고구려는 동명성왕의 건국 이후 2대 유리왕부터 정복사업을 시작하였던 바, 유리왕과 그 아들 대무신왕은 초기의 정복군주였다.
그리하여 대무신왕 때는 지금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고구려의 강역을 모두 아우른 듯 보이니, 부여, 개마국, 구다국, 최리의 낙랑국을 정벌한데 이어 서기 42년에는 신라까지 쳐들어왔다. 대무신왕의 신라 침공은 <삼국유사>에 기록돼 있으며,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여러 사서를 유추해 고구려가 후한의 초대 군주 광무제와 9년 전쟁을 벌였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 아들 민중왕 때는 자연재해가 연이어 정복전쟁이 지속되지 못했다.
대무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통구 고분구 마선구 626호분대수림원(大獸林原)으로도 불리는 마선구 626호분 / 나무위키
모본왕이 지금의 하북성, 산서성 지역을 공격한 일은 중국의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모두 기록돼 있으며 내용도 유사하다. 먼저 <후한서/동이전>에는 "맥인(貊人, 고구려인)이 요동 변방의 우북평(右北平) · 어양(漁陽) · 상곡(上谷) · 태원(太原)을 침략해 노략질하였다"고 쓰여 있고, <후한서/광무제 본기〉 '구려 조'에는 "건무 25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 · 어양 · 상곡 · 태원을 침탈하였다. 요동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조치하니 점령지를 돌려주었다"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한 원문은 二十五年春, 句麗寇右北平·漁陽·上谷·太源. 而遼東太守祭彤 以恩信招之 皆復款塞이며,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모본왕 조'에는 "재위 2년 봄, 장수를 보내 후한(後漢)의 북평 · 어양 · 상곡 · 태원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 와 화친하였다"(二年春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而遼東太守蔡彤以恩信待之乃復和親)고 쓰여 있다. 이 지명이 출현하는 지도를 다시 보면 아래와 같다.
북연(北燕, 407~436년) 지도 속의 하북성 유주 각 군(郡) / 북연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에 고구려 귀족 출신 고운(高雲)이 건국한 나라로 훗날 고구려에 편입됐다.위 지도의 주요 지명을 한글로 표시했다.
후한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진(晉)나라의 역사서 <진서>에는 위 지역에 대해 보다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다. (平州案禹貢冀州之域于周為幽州界漢屬右北平郡......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後還合為幽州......咸寧二年十月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앞서도 소개한 바 있는 <진서/지리지>의 내용을 보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일찌기 진(秦)나라는 연(燕)나라를 멸하고 유주(幽州) 땅에 어양 · 상곡 · 우북평 · 요서 · 요동의 5군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 진나라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폐하고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실시했다) 진을 이은 한(漢)나라는 군현제를 답습했으며 고조 때는 상곡을 나눠 탁군을 설치했다.
무제 때는 전국을 13주로 나누었는데, 이때 유주의 명칭은 그대로 존속했으나 위(魏)나라 때는 동이(東夷, 고구려를 위시한 동쪽 오랑캐)를 다스리기 위한 동이교위(東夷校尉)를 두고 요동 · 창려·현토·대방·낙랑 5군(郡)으로 나누어 평주(平州)로 삼았으며, 진(晉)나라 무제 때에는 창려 · 요동 · 현토 · 대방·낙랑의 다섯 군국을 평주(平州)로 삼았다.
이상은 고구려가 "건무 25년(AD 49년) 봄, 고구려가 우북평 · 어양 · 상곡 · 태원을 침탈해 노략질하였다"고 한 <후한서>의 내용 및 "재위 2년 봄, 장수를 보내 후한(後漢)의 북평 · 어양 · 상곡 · 태원을 습격하였다. 이에 후한의 요동 태수 제융(祭肜)이 화친을 청해 와 화친하였다"는 <삼국사기> 내용과의 별다른 상이점을 찾을 수 없는 바, 고구려가 일찍부터 현 하북성과 산서성 지역에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하북성의 위치중국 평주역사지도(平州历史地图) 속 유주(幽州)와 기주(冀州) / 북평·어양·상곡의 지명을 찾을 수 있다.유주자사 진(鎭)의 고분 벽화 / 13개 군 태수가 유주자사 진에게 정무보고를 올리는 모습으로 13개 태수의 명칭은 인물 우측에 쓰여 있다. 북평태수·어양태수·상곡태수를 찾을 수 있다.위 고분이 발견됐을 때의 신문기사 / 일본 아사히 신문의 내용을 전재했다. 일본에서도 피장자는 광개토대왕 때의 유주지방 장관으로 추정했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피장자를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다.
위의 지도와 앞서 말한 평안남도 덕흥리 유주자사 진(鎭)의 무덤 벽화에 그려진 유주 관할 각군(各郡) 태수의 직함을 비교해 보아도 고구려의 유주 진출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태원군은 빠져 있다. 당시 태원군은 병주(幷州)에 속했기 때문인데, 지금의 산서성 지역이다.
산서성의 위치중국 산서성 북악항산(北岳恒山) 용구서봉(龍口西峰) 현공사(懸空寺) 전경 / 현공사는 '공중에 매달린 절'이라는 뜻이다.1400년 됐다는 이 절은 그저 경이스러울 뿐이다. / 현공사는 본문과는 관계 없다. 다만 고구려인도 이 경이스러움을 경험했을 수는 있다.
하북성 현공사 한글자막 동영상
골라듄다큐의 한국어로 설명하는 현공사
중국 태원시 산서성 박물관 '내몽골특별전'에 전시된 고조선의 동검 / 고조선의 세력도 산서성 일대까지 미쳤음을 알 수 있다.내몽골 홍산문화권에서 발견된 비파형 동검과 거푸집 /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할 수 있는 빼박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