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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중립외교 (II)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8. 06:00
* '광해군의 중립외교 1편'에서 이어지나, 아래 도입부는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에서 인용했다.
베트남은 우리보다 앞서 똑같은 대규모 경제 보복을 당했었다. 지난 2014년 베트남은 자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인 파르셀 군도(群島)에서 행해진 중국의 석유 시추에 극력 반대했던 바, 중국의 대대적인 경제 보복을 받게 되었다. 공산품이 대부분인 우리와 달리 베트남은 농산물이 주력 수출 상품이었으므로 공항과 국경에서 통관을 저지당한 컨테이너 안의 농산물(생과일 야채 카사바 고무라텍스 등)은 모두 썩어나갔으며, 이후 판로를 찾지 못한 농산물들은 헐값에 떠넘겨지거나 폐기돼야만 했다.
아울러 저들 또한 우리와 마찬가지의 관광 보복을 당했으니, 예정된 관광객의 대규모 취소사태를 필두로 하롱베이(우리나라의 제주도와 같은)를 비롯한 베트남 곳곳의 관광객은 급감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은 자국 내에서의 베트남 기업의 입찰 참여 또한 제한시켰던 바, 저들 기업의 피해 또한 우리 못지않았다.(베트남의 대중국 경제의존도는 오히려 한국보다 높다)
파르셀 군도의 위치
베트남은 황사군도(Huong sa Quan dao), 중국은 시사군도(四沙群島)라 부르는 이 섬들은 현재 중국이 실효지배 중이다.
그런데 이때 보여준 저들 베트남인들의 대응은 우리와는 사뭇 달랐다. 2016년 중국의 경제보복 이후 시종일관 저자세로 대응했던 우리 대한민국과 달리 베트남 국민들은 결기를 표출하며 거국적으로 중국에 저항했다. 그리하여 수도 호치민 시를 비롯한 곳곳에서 반중 시위가 일어 100여 명이 부상당한 것을 필두로,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중국과 맞서 싸웠던 바, 흡사 전쟁도 불사할 분위기로 치달았다. 중국상품 불매 차원쯤을 훨씬 넘어선, 보다 적극적인 국민 저항운동이었다. 저들은 15세기 초 자국을 침입한 명나라 영락제의 대군을 10년 동안 싸워 패퇴시킨 바 있고, 제국주의 프랑스와 미국을 격퇴한 화려한 전력도 있어서인지 중국과의 전쟁에 있어 우리만큼 겁을 안 먹는다. 언제든 한번 해보려면 해보라는 식이다.(알다시피 베트남은 막강 미국과 싸워 이긴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다)실제적으로 1979년, 베트남은 자국을 쳐들어 온 중국의 20만 대군을 주력군을 투입하지 않고도 보기 좋게 물리쳤다.(당시 베트남은 크메르 루즈의 캄보디아를 침공하였던 바, 주력군은 남쪽 전선에 집중돼 있었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불과 29일 만에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국제적 망신 속에 허겁지겁 물러가야만 했다.(최근 한 중국인과 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이 전쟁이 중국의 승리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흥분했다. 그는 인터넷 자료를 보여줘도 인터넷도 전부 사실은 아니라며 믿을 수 없다 하더니, '그럼 뭘 믿어야 되는가, 당신들 중국 측 주장만 믿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비로소 말문을 닫았다. 하긴 중국발 미세먼지도 자기네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그들이니.....)떵샤오핑의 마지막 전쟁, 중국 VS 베트남 전쟁 돌아보기
1979년 2월 17일 아침, 10만의 중공군이 운남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침공했다. 자신들의 지원을 받는 크메르 루즈의 공산 캄보디아를 베트남이 점령한 데 대한 응징으로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철군이 목표였다.
하지만 중공군은 베트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딛혀 10만 병력을 더 증파했음에도 소기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북부도시를 파괴시킨 것으로 징벌적 임무가 완수됐다고 선언하고 한 달만에 철수했다. 캄보디아에서의 베트남군 철군은 10년 후인 1989년에야 이루어졌다.
중공군은 29일 동안 26,000명이 전사하고 43,000명이 부상당하는 등 11개 사단이 거의 괴멸당하는 피해를 입어 공산당 수뇌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베트남측 주장은 41,705명 살상. 전차 421대, 야포 66문 파괴 및 노획임) 반면 특유의 게릴라전으로 일관한 베트남군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베트남군에 파괴된 중공군 63형 탱크. 중공군의 낡은 무기 체계와 구닥다리 인해전술식 공격은 패전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역사적 이유에서인지 베트남은 우리보다 경제 수준이 훨씬 낮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나 미국이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2014년 베트남의 반중국 시위가 격화되어 베트남 주재 중국공장들과 대사관 차량이 방화되었을 때도 중국 외교부의 반응은 그저 유감이란 것이었고, 오히려 미국은 이를 기화로 적극적으로 베트남을 거들고 나섰다. 아무리 작은 체구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싸움에서 한번 이기고나면 덩치 큰 놈들도 감히 까불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랄까? 1979년과 달리 현재의 국력으로 베트남이 중국과 맞짱을 뜬다면 베트남은 필패겠지만, 그만큼의 피해를 주겠다는 그들의 깡다구를 중국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마지막 문구는 인터넷 어느 논객 분의 글을 빌려온 것인데, 만일 우리가 베트남 같은 시위를 벌였다면 어찌 되었을까?)
반면 중국이 우리를 두려운 상대로 보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그 단적인 예가 2017년 4월 22일 미 트럼프 대통령이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말한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의 후일담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시진핑 주석이 중국과 한국의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북한이 아니라 한국 전체의 이야기였다. 중국과 한국은 수천 년의 역사다. 많은 전쟁도 있었다.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Korea actually used to be a part of China)는 내용 등이었다. 나는 10분간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쉽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And after listening for 10 minutes, I realized that it's not so easy)”
트럼프가 깨달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것이 북핵 문제일 것임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는 그보다도 중국 시진핑 주석의 한반도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다. 나중에 이것(시진핑의 발언)이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해석상의 오류 어쩌고 하는 우리 당국의 해명 아닌 해명이 있었지만, 이 내용을 중국에 확인했는지에 대한 기사는 못 본 것 같다.(중국은 가만있는데 한국 정부가 오히려 중국 외교부 대변인 역할을 한 셈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히려 미국에의 반응이 들을 만했으니, 미국 온라인 매체 쿼츠는 이 발언을 ‘확연한 역사적 오류’라고 지적한 후 ‘한국을 격분할 수 있게 내용’이라 보도했다. 미국에서도 이것을 분명히 잘못된 발언이라 여기고, 나아가 한국민의 일그러졌을 자존심을 걱정했음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우려는 크게 빗나갔다. 한국에서는 여야 정치인들의 상투적인 일과성 비난 발언 외에 그 어떤 항의의 몸짓도 찾아볼 수 없었던 바, 국회의원의 소임은 무엇이며, 그 많은 좌익과 우익의 단체들은, 또 그 다양한 이름을 가진 소위 시민단체라 하는 모임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 역할은 무엇인지 새삼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게다가 근자의 민족주의적 방향타는 어처구니없게도 ‘국뽕’이라는 단어로 매도되기도 하는 바, 도대체 이건 어떤 놈이 만든 말인지 또한 궁금하다. 또 그 말을 떠드는 주체가 여(與)인지 야(野)인지, 진보인지 보수인지도 궁금한데, 다행히도 이 말은 요즘 좀 사그러들었다.
우리는 우리끼리(남북한이) 잘하면 한반도는 통일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절대 착각이다. 십여 년 전부터 중국이 동북공정(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을 떠들어대고 있는 것은 여차하면 한반도의 북부는 자신들이 드시겠다는 생각이다.(얌얌!) 왜? 그곳은 원래 자신들의 영토였으니까.(물론 이것은 그들만의 주장이다. 나 깡패! 내 꺼라면 내 꺼임!)
'중국역사지도 대도감'의 삼국시대 강역도위나라의 영토가 지금의 북한 지역을 거의 다 점하고 있는데, 그래도 한쪽에 고구려를 써 놓은 것을 보면 그래도 고구려는 중국이 어려워 한 역사상의 유일한 나라였던 듯싶다.그런데 그러면 뭘하노? 동북공정에서는 고구려도 중국의 지방정권이라고 말하고 있는데....(중원의 왕조는 수십 번 바뀌었는데 지방정권은 700년간 단일 정권으로 존립했단다. 쯧쯧....) 사진은 고구려는 중화민족이 건국했다는 증명으로서 중국 교과서에 실려 있는 성자산성 출토 비석이다.
또한 그들이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 하는 것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의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의 통일을 싫어하고 두려워 하고 있는 바, 그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은 아마도 북한 땅에 친중 괴뢰정권이 들어서는 일일 것이다.(따라서 그들은 북한이 내부적으로 붕괴되면 곧바로 그것을 실행에 옮길 터, 우리로서는 김정은 정권의 붕괴를 바라지도 못할 일이다)
화제를 바꾸어, 엊그제 내한한 미국의 고위급 관료들의 모습은 나를 섬뜩하게 했다. 데이비드 스틸웰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와 SMA(한미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 미국측 수석대표를 맡고 있는 제임스 드하트 국무부선임 보좌관 등인데, 그들이 대거 한국으로 몰려온 이유는 사실 뻔하다. 지소미아(GSOMIA,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의 원상회복과 주한미국 방위비 분담금의 대폭 증액을 압박하기 위해서이다. 트럼프가 가장 호구로 여기고 있는 한국부터 족쳐 방위비를 대폭 올려 씌운 뒤 그걸 선례 삼아 다른 유럽 국가 등의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다.(그래서 정말로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잘못하면 한국은 글로별 호구로 세계 여러 나라에 찍힌다)
이례적으로 같은 날 방한한 3명의 거물
(왼쪽부터) 제임스 드하트 SMA 수석대표, 데이비드 스틸웰 미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키이스 크라크 미 국무부 경제차관
이에 대한 나의 견해는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해법일 듯싶다. 일단 자존심은 좀 상하더라도 지소미아는 회복하는 쪽이 유리하다.(그저 내놓을 카드가 없어서 버린 것이지 원래 실익보다는 손해가 많은 카드였다. 청와대에서는 지소미아를 자꾸 수출규제와 연계시키려 하는데 정말 하책이다) 다만 기존의 5배 증액을 요구하는 방위비 분담금은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또 아무리 깎아 수용해도 글로벌 호구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럴 경우 미국은 방위비를 깎아준 댓가로 이란 호르무즈 해협에의 파병이나 남중국해 공동순찰과 같은 부담스런 요구를 해올 것이 뻔하다.
~ 그리 되면, 굴종 외교로 애써 회복한 중국과의 관계는 다시 무너질 뿐더러(앞서 중국이 남중국해 영유권에 대해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설명한 바 있다) 외국에서 이상히 여길 정도로 사이가 좋은 한·이란 관계는 순식간에 악화되고 만다.(우리로서는 둘 다 받아들이기 힘든 카드다)
따라서 이때는 더 이상의 파병을 거부한 광해군처럼 정공법의 배짱을 부리는 것이 상책이니, 방위비에 걸맞은 주한미국만 유지하겠다는 카드를 내놓을 필요가 있다. 이럴 경우 저들은 방위비를 증액시킬 명분이 없어지며 또한 파병과 같은 요구도 할 수 없게 된다. 딱 까놓고 얘기하자면, 우리에게는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 만 명의 주한미국이 있으나 한 명의 주한미군이 있으나 똑 같은 것이고, 그들이 운용할 무기체계도 숫자에 따른 감축은 별 의미가 없다. 어차피 현대전은 첨단 무기의 싸움이므로 숫자만 많은 재래식 무기 역시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중·월전에서도 중국의 63형 구식 탱크는 소련제 고성능 로켓포에 의해 원샷원킬로 박살났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된다면(당연히 왕창 삭감된 금액이라는 전제 하에) 지금 우리 군의 숙원과제인 미사일 거리 제한 해제나 햄잠수함 기술 이전 같은 것을 조건으로 요구해야 된다.(이것이 받아들여지게 되면 오히려 전화위복일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안 될 때는 아무 것도 내줄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 필요한데, 과연 우리 정부가 그럴 배짱이 있을는지는 의문이다. 북한은 지금 아래와 같은 무시무시한 것들을 쏘아대고 있는데, 우리는 그저 걸음마 수준이니 참으로 불안하며 역대의 외교력이 그저 한심스레 여겨질 따름이다.
새로운 위협으로 등장한 북한 방사포
방사포라고 해서 대포에서 쏘아대는 폭탄으로 생각하면 오해다. 미사일 발사대가 아닌 이동식 발사대에서 쏘는 것만 다를 뿐 똑같은 다연장 로켓으로, 실전에서는 미사일보다 더 위력적일 수 있다.
제일 한심한 건 북한과 대화하면 핵폭탄은 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래서 딱하게 열심히 술상을 차려줘봤자 칼자루 쥔 쪽이 하는 말은 뻔하다. "그딴 거 너나 먹어!" (역사적으로 그런 소리를 3번 들었다. 660년 7월 당나라 군대가 기벌포에 상륙한 후 백제 측에서 술상을 봐갔을 때, 1637년 1월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나라 장수에게 술과 고기를 갖다 주었을 때, 올해 5월 북한에 쌀 5만t을 공여하고자 했을 때) 지금 필요한 건 저 광해와 같은 똑바른 상황 판단과 당시 그가 지녔던 철판과 같은 배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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