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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외교관 이장용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13. 23:52

     

    고려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나라로, 따라서 국호도 고려라고 칭했다. 국시는 당연히 북진 통일이었으니 북진하여 고구려와 발해가 품었던 만주와 연해주의 땅을 회복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그것이 만만치 않았다. 고려의 건국과 더불어 북쪽에서는 거란족이 나라를 세워 대요(大遼)라는 큰 나라가 들어섰던 바, 단 한 발 자국도 앞으로 내딛을 수 없었고, 겨우 한 것이라고는 발해·거란 교체기에 무주공산이 되었던 평양 이북 땅을 슬그머니 점령해 청천강 유역까지 국경선을 끌어올린 것뿐이었다.

     

    하지만  993년 요나라가 대군(무려 80만)을 몰아 쳐들어오자 그나마 그조차도 지키기 힘들어졌으니 조정에서는 요나라에 항복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자는 항복 투항론과 북쪽의 땅을 떼어주고 화평을 맺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대두되었다. 이것은 그만큼 고려의 상황이 절박했음을 말해주는 것인데, 그때 서희(서희, 942-998)라는 자가 나섰다. 자신이 나가서 요나라 장수 소손녕을 만나 그들의 침략 명분과 요구가 정당한지를 우선 따져보고, 항복이나 할지(割地)는 그다음에 논하자는 것이었다.  

     

    소손녕을 만난 서희는 일단 기싸움에서 이기고자 무릎을 꿇라는 소손녕을 요구를 거부하고 제 숙소로 돌아가버렸다. 각자의 왕을 모시는 동등한 입장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소손녕은 어쩔 수 없이 동등한 위치의 좌석을 마련하고 서희를 다시 불러 옵션을 내놓았다. 첫째는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끊고, 둘째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답게 고구려의 후예인 자신들 요나라에 고구려의 옛 영토를 토해내야 하며, 셋째는 요에 입조(入朝)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서희는, 송나라와의 외교는 단절하겠으나 할지의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 그것은 우리가 진정한 고구려의 후계자이기 때문이요,(고려라는 국호와 평양을 수도로 하고 있는 것, 그리고 그 논리 대로라면 오히려 요나라의 수도인 동경 땅도 고려의 영토라는 것을 강조함) 요에 입조를 하기 위해서는 강동(압록강 동쪽) 땅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곳을 지금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어 여의치 않은 바, 당신들이 쳐들어 와 점령한 그곳을 고려에게 줘 길을 열어주면 입조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에 소손녕은 그 말의 합당성을 인정해 강동 6주를 고려에게 넘겨주고 물러가는 바, 이것이 그 유명한 서희의 외교 담판이다.  

     

     

    서희가 얻은 압록강 동쪽의 6개 주/ 이로써 고려는 압록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게 된다. 위기를 오히려 복으로 만든 쾌거의 외교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세계 

     

    이후 북쪽에서는 요나라에 이어 대금국(大金國)이라는 더 큰 나라가 일어서고, 다시 몽골제국이라는 사상 유래 없는 대제국이 발흥하였던 바, 고려는 그야말로 망국의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몽골의 침입에 강도(江都, 강화도)를 수도 삼아 40년 간이라는 긴 항쟁을 이어온 고려는 결국 강화를 맺고 강도 땅을 벗어나게 되니 말하자면 무조건 항복에 다름아니었다.(1259년) 하지만 이때도 또 한 명의 출중한 외교관이 출현하여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바, 고려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장용(李藏用, 1201-1272)이다.

     

    고려가 항복한 해는 1259년 고종 18년이었다. 그 조건 중의 하나가 강도에 쌓은 성을 모두 허물고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이지만 고려가 환도를 한 것은 1270년 원종 11년이었다. 상황을 살피며 계속 미적거렸던 것인데, 이에 화가 난 쿠빌라이는 원종을 몽골로 불러들인다.(1264년) 이때 원종 본인은 물론이요 신료들이 모두 입조를 꺼렸으나 이장용은 홀로 왕의 입조를 주장한다.

     

     

    당시의 세계

    강화도 고려궁지 / 일대가  모두 고려의 강도(江都) 궁이 있던 곳이나 1270년 환도와 함께 파괴되었다. 가운데 건물은 조선시대 지어진 외규장각이다. (사진제공: 강화군청)

    강화 산성의 동문 망한루(望漢樓)

     

    이장용의 입조 주장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지금 왕이 입조를 하지 않으면 강화를 깨는 것과 다름없으니 필시 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만일 왕이 갔다가 무슨 변고라도 생기면 어찌할 것이오?"

     

    최씨 정권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조정의 일인자 김준이 따져 물었다.

     

    "제 생각에는 아무 일도 없을 듯합니다. 제가 수행하겠거니와, 만일 무슨 일이 생기거든 제 처자식을 죽이는 처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막상 입조를 하고 보니 쿠빌라이의 목적은 환도보다도 일본 정벌이었으니 고려군에의 징발 요구가 거셌다. 그런데 그 주장을 하는 놈은 원나라 사람이 아니라 일찌감치 몽고에 투항해 영년공(永寧公) 벼슬을 하고 있던 왕준이었다.

     

    "고려에는 38령(領)의 군대가 영(領)당 1천 명을 거느리고 있어 그 인원이 모두 3만8천 명입니다. 저를 고려로 보내 그들을 인솔해 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쿠빌라이가 그것을 이장용에게 확인했으나 장용은 확실하게 오리발을 내밀었다.

     

    "우리 태조 때는 그러했으나 지금은 전쟁과 흉년으로 많이 희생되어 말만 1천이지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원나라의 만호 패 자두(萬戶牌子頭)의 수가 꼭 채워지지 않는 실정과 같습니다. 혹 제 말이 의심 나거든 왕준과 함께 고려로 가 점검하게 하십시오. 그래서 제 말이 틀리거든 제 목을 베시고, 왕준의 말이 틀리거든 그의 목을 베십시오."

     

    이에 왕준이 아무 말도 못하고 발을 빼는데, 그러자 원의 승상이 고려 주군(州郡)의 호수(戶數)를 물었다. 이를 미루어 군사의 수를 파악해 징발할 요량이었다. 이장용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알지 못하오."

     

    "그대는 일국의 재상이거늘 주군의 호수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는가?"

     

    승상의 거친 힐난에 장용이 창문의 문살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승상께서는 저것이 몇 개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승상이 머뭇거리자 장용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의 주군 호수는 해당  관청이 아는 것이지 재상이 아는 것이 아니오. 제 집에 있는 창문의 문살도 다 세지 못하거늘 어찌 주군의 호수를 셀 수 있겠소?"

     

    이 정도의 배짱과 말주변이면 적이라도 존경심이 생기는 법, 이후 쿠빌라이는 그를 아만메르겐(阿蠻滅兒里干, 언변의 달인) 이재상(李宰相)이라 불렀고 신하들도 '해동의 현인'이라며 예를 표하였다. 원종은 귀국 후 그 공을 기려 문하시랑(門下侍郞)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의 벼슬과 함께 식읍 1천호를 내렸다. 그의 외교력은 이후로도 발군이었으니 원종 8년(1267) 몽고가 병부시랑 흑적(黑的)을 보내 일본의 조공을 독려하도록 했을 때 장용은 일본을 두둔하며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바다로 만리나 떨어져 있으며, 가끔 중국과 내왕하기는 하나 해마다 공물을 바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중국도 그들을 열외로 두었으니 찾아오면 잘해주고 안 오면 그저 관계를 끊었습니다. 이는 그들을 얻어봤자 크게 실익이 없고 버리더라도 황제의 위신에 손상을 주지 않는 존재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국서를 보냈다가 만일 불경한 언사로 교만하게 답신할 경우, 내버려둔다면 조정의 허물이 될 것이요, 반대로 정벌을 하려 든다면 바람과 파도가 험난하여 필시 황제의 군대가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것입니다."

     

     

    강화 산성의  서문 첨화루(瞻華樓) 
    강화 산성의  남쪽 성벽

     

    이어 장용은 다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상국(上國)이 꼭 항복을 받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한즉 차라리 천자께서 국서를 보내지 않는 편이 득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덕을 저들도 필히 알 것이거늘 저들이 조공을 미룸은 자신들이 먼바다 가운데 위치함을 믿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을 두고 천천히 무마하다가 차후 그들이 귀부해오면 칭찬해주고 입조하지 않으면 아예 도외시하여 먼 땅에서 무지몽매한 상태로 살아가게 두는 것도 옳을 줄 압니다. 이것이 오히려 황제의 덕을 높이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저의 생각은 결코 사사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황제를 두 번이나 뵙고 그 은총을 입은 사람이 충성으로써 그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드리는 말씀입니다."

     

    장용이 이렇듯 일본을 두둔한 것은 그들을 위해서라 아니라 실제로 일본의 반응에 따라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일이 닥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렇게 되면 일본 원정 비용을 고려가 전부 부담하게 될 터, 인명 피해와 방위비 부담에서 일체 자유로울 수 있는 최선책을 강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병부시랑 흑적을 수긍케 해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국왕 원종은 자신과 상의 없이 국사를 처리한 것이 혹 다른 마음이 있어서인가 의심하여 그를 인천 영흥도로 유배 보냈고, 이 사실을 들은 흑적은 오히려 경위를 해명하여 장용을 구명하였던 바, 원나라 관리로서는 매우 보기 드문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원종 9년(1268) 이장용은 최고위직인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는 환도를 결행하였는데, 그는 이를 반대하는 김준과 그 일당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소. 과거에는 강(화)도로 오는 것이 종묘사직에의 근심을 없애고 나라 안팎을 편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송경(松京, 개경)으로 가는 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오. 정 나가기 께름칙하다면 원나라 같이 두 도읍을 두어 여름에는 송경에 머물도록 합시다."

     

    이리하여 이를 관장할 출배도감(出排都監)을 만들었던 바, 비로소 원나라의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상 '고려사 열전' 15>

     

     

    갑곶 돈대에서 본 염하 / 강화해협을 흐르는 염하의 길이는 대략 20km, 폭은 400~1,500m 정도이다. 

     

    초지진 에서 본 염하와 초지대교 / 초지대교 쪽의 염하 폭은 가장 긴 편에 속한다. 이 염하와 갯벌은 몽고군의 넘사벽이었다.

     

    그러나 원 세조 쿠빌라이는 결국 일본 원정을 결심하였고, 또한 남송 원정에도 고려군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협조하지 않으면 토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던 바, 이를 말리려 원에 입조한 이장경과 쿠빌라이 간의 팽팡한 설전이 <고려사 절요>(1268년 6월)에 전한다.

     

    "짐이 너희 고려가 군대를 내어 전쟁을 도우라 하였거늘 너희는 군사의 수를 분명히 보고하지 않고 모호한 말만 하고 있다. 왕준이 이르기를 일찌기 고려에 4만의 군사와 잡색군(雜色軍, 민방위) 1만 명이 있다고 했다. 나라에 군대가 없으면 안 되므로 1만 명은 남겨서 나라를 지키고 4만 명은 와서 전쟁을 돕도록 하라"

     

    "우리에겐 5만의 군사가 없습니다. 왕준의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믿지 않으신다면 시험 삼아 그렇게 아뢴 자에게 사신을 딸려 보내 군사의 숫자를 점검하게 하십시오. 만일 실제로 군사 4만 명이 있으면 신이 죄를 받을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거짓으로 보고한 자가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너를 신뢰할 수 없다. 네가 만약 숫자를 정확히 보고했더라면 짐이 어찌 이런 말을 하겠느냐?"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4만 명의 군사를 보유했으나 30년 사이에 전쟁과 역병으로 거의 죽어 백호(百戶), 천호(千戶)의 제도는 다만 이름 뿐입니다."

     

    "죽은 자만 있고 태어나는 자는 없단 말이냐? 너희 나라에도 부녀자들이 있을 터, 어찌 태어나는 자가 없겠느냐? 너는 나이가 많아서 사리를 잘 알겠거늘 어찌 거짓말만 하려 드느냐?"

     

    "황제께서 성은을 베푸시어 군대를 거두어 가신 이후로 우리나라에도 새로 태어나 자라나는 어린이들이 생겼으나 이제 겨우 9, 10세로 군사로 충당할 수가 없습니다."

     

    "알았다. 아무튼 너는 돌아가 빨리 군사의 숫자를 보고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 나라부터 토벌할 것이니라. 지금 세상에 남은 나라는 송나라와 일본뿐이다. 지금 짐은 너희 나라를 한 집안처럼 생각하니, 만일 너희 나라에 환란이 있으면 짐이 어찌 구원하지 않겠느냐? 짐이 내조(來朝)를 하지 않는 나라를 도모하고자 하면 너희도 군사를 내어 짐을 도와야 마땅하다. 너는 돌아가 왕에게 말하여 군량 3, 4천 석을 실을 수 있는 전함 1천 척을 만들도록 하라."

     

    "어찌 감히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다만 너무 서두르시면 배를 만들 목재가 마련되더라도 기간에 맞추지 못할까 걱정됩니다."

     

    그러자 쿠빌라이는 다음 같은 협박을 늘어놓았다.

     

    "삼황오제 이래 역대의 일은 너희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므로 짐은 가까운 예를 들어 말하겠다. 옛날 칭기즈(成吉思) 황제 때 하서국(河西國)의 국왕이 딸을 바치며 화친을 청하면서 극력으로 도울 것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는 칭기즈 황제께서 회회(回回, 위구르)를 칠 때 정벌을 도우라 명했음에도 끝내 응하지 않아 황제가 토벌해 멸망시켰다는 것을 그대 또한 들어서 알 것이니라."

     

    그가 말한 것은 칭기즈칸이 호라즘 왕국을 칠 때 원정을 거부한 서하(西夏)를 멸망시키고 백성 전원을 몰살시킨 유명한 사건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이었다.

     

    "또한 너희 나라에서 순풍을 만나면 송나라에 2~3일 만에 갈 수 있고 일본에는 아침에 출발하면 저녁에 닫는다던데, 이건 너희 나라 사람과 일본 오랑캐가 하는 말이다. 너는 내게 어찌 이런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느냐?"


    쿠빌라이의 말은 제법 준엄한 꾸짖음이었음에도 장용은 겁먹은 기색없이 오히려 대질하러 나온 왕준을 몰아세웠던 바, 급기야 기세 좋던 쿠빌라이마저 왕준을 거들어야 했단는 게 <고려사 절요>의 기록이다. 백방의 노력으로도 이장용은 결국 쿠빌라이의 의지를 막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원정에 실패하였던 바, 장용의 혜안은 더욱 빛났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원정 과정에서 고려의 희생을 최소화시켰을 것임은 두 말할 나위없을 터였다.

     

    이장용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전달하고 이해시키려 하고 있는 바, 천하제일의 몽고 황제 앞에서도 절대 꿀리는 법이 없었다.(이러한 외교관이 있었다는 게 정말로 놀랍고도 신기하다. 

     

    또한 서희는 80만 대군을 몰고 온 소손녕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외교관은 현재 중국에서 가장 말석(末席)에 앉혀지고도 한 마디 따지지도 못하고 있으며, 돈 뜯으러 온 SMA(한미 방위비 분담 특별협정) 미국측 대표에게는 도리어 협박이나 당하고 앉았다.(외교문서는 시간이 지나면 공개되니 누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중국이나 미국에겐 꼼짝 못하고 그마나 주변 4강에서 우리가 큰소리 치는 나라는 일본이 유일한데, 거듭 말하거니와 바람직한 경우는 아니다. 국민들에게는 감정적으로 호소하고 있고 국민들은 덩달아 흥분하고 있다. 뭐, 그건 좋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계속 손해를 볼 것 같다. 저들이 전쟁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데 우리가 뭐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냉정하게 힘을 키워야 할 듯한데, 그것을 선도해야 할 지도자들은 계속 감정팔이에만 나서고.... 뭐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러면서 뒤로는 굴종외교에 나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매번 그랬왔던 터라....) 

     아, 그러면 진짜 열받는데.... 

     

    '왜 몽골 제국은 강화도를 치지 못했는가'의 저자 이경수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 강국, 영향력 확대를 노리는 러시아, 군국주의의 향수를 떨쳐내지 못하는 일본, 이들의 한가운데 지금 우리가 있다. 정권과 정당의 이해 타산을 넘어, 좌 · 우의 시각을 넘어, 진정으로 나라의 앞날을 대비하는 외교 전술과 외국관(外國觀)이 절실하다. 고려를 통해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슬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로 요원 할 터, 차라리 고려 외교관 이장용의 다음 시 한편을 새기는 편이 나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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