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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조선의 칼 비파형동검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15. 23:59


    일전 고조선에 대한 글을 쓰며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의 지표유물이 맞는가에 대해 살펴본 적이 있다.(☞ '동북공정, 고조선에 관한 자충수') 그리고 그에 대한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으나 중국이 그 유물에 오금저려하는 사진만큼은 확실히 게재했다. 2016년, 비파형동검 등 청동기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된 요녕성 심양시 정가자와(鄭家窪子) 마을 유적지를 진열관으로 만들었지만, 장작 개관식에서는 진열관 간판을 천으로 가리고 행사를 진행한 사진이었다. 이곳이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것을 오히려 홍보하는 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개최 측에서 궁여지책으로 간판을 천으로 덮어버린 것이다.

     


    2016년 5월 17일, 개관식에 몰려든 인파. 


    위에서 연락을 받았는지 천으로 간판을 가리는 진열관 당국자들.(끝까지 청동단검의 글자를 떼보려 애쓰고 있다)


    결국 간판을 덮은 뒤 행사가 시작됐다.


    발굴 현장을 살린 전시관 내부

    청동거울 등과 함께 매장된 무덤의 주인공은 필시 고조선의 지배층이었으리라.



    ~ 이 진열관은 결국 폐관되었고, 이곳의 청동기 유물은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으로 옮겨졌으나 요녕성 박물관에 본래 있었던 아래 유물과 함께 최근 전시물에서 아예 사라져버렸다는 후문이다. 



    정가자와 진열관에 전시됐던 비파형동검

    1958년 발견된 동검으로 1961년 발견된 동검과 함께 전시돼 있었으나 모두 사라졌다.


    요녕성 박물관에 전시됐던 비파형동검

    조양시 십이합영자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로, 고조선 것이라는 설명 없이 전시되다 사라졌다. 




    앞서 말했다시피 고조선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에 남은 것이 없고('환단고기' 같은 책은 일단 패스) 여기저기 조금씩 나뉘어서 전하는 중국 측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중국 측에서는 고조선이나 고구려 등에 심한 알러지 반응을 나타내고 있어 새로 발견된 유적 유물(혹은 기록)을 일절 공개하지 않는다는 후문인데, 그래서인지 고조선 연구는 지금도 진척된 것 없이 과거를 답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멸망했다'는 사마천 <사기>의 기록에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던 중 최근 고조선에 관한 두 권의 책을 연이어 읽었다. 한 권은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라는 학술서 형태의 책이고, 또 한 권은 <천년의 금서>라는 소설이다. 전자는 가벼운 제목과는 달리 단재 신채호 이후의 고조선 연구에 대해 비판하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무거운 책이고,(분량을 말함이니 무려 564쪽이나 된다) 후자는 무거운 제목과 달리 쉽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역시 분량을 말함이니 큼직한 폰트의 327쪽의 책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비전공자라 안 된다는 편견은 버린지 오래라.....






    굳이 감상문을 써 내라면 간단하게 둘 다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특히 <천년의 금서>는 저자 김진명이 자신의 작품 중 득의(得意)의 것이라는 생각을 주저 없이 피력한 바 있고, 주장하는 내용도 기존의 학자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기원전 800년 무렵의 고조선에 관한 것이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요약하자면, 이 소설의 주제는 우리나라 한국, 즉 대한민국의 한(韓)은 어디에서 유래되었가를 찾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기원전 800년 무렵 당시 한(韓)이라 불렸던 고조선의 왕이 주(周)나라의 선왕을 만나 국경선을 논했다는 시경(사서삼경의 그 시경이다)의 내용이 옳은가를 추적하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시경의 이 대목으로써 우리나라 고대국가의 역사를 적어도 기원전 18세기까지 끌어올리며(기원전 40년의 신라로부터) 기존의 역사관을 답습하던 서울대, 연·고대, 한양대 교수들을 물먹인다.(학교와 교수의 이름이 실명으로 등장하지만 그런 분이 진짜로 재직하는가는 모르겠다)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의 저자 김상태는 특이하게도 전공이 수학이다. 하지만 2012년 출간된 후 1년 새에 3쇄를 찍은 것을 보면(말한대로 이 책의 볼륨은 장난이 아니다) 그 내공이 보통을 상회함을 할 수 있는데, 알다시피 고조선사(史)는 이른바 '환빠'(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재야학자)라 불리는 사람들과 '식빠'(식민사학 추종자라는 뜻으로 '환빠' 측에서 이르는 말)로 불리는 기득권 사학자와의 전투가 치열한 곳이어서(작가의 표현대로라면 '칼부림이 난무하는') 그가 어느 곳에 섰는지 그 위치가 중요하다. 우선 그는 그 두 파의 싸움을 즐기는 쪽이었다.


    "예전이라면 고조선 전문 학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세상이 발전했죠. 생산력이 진보했습니다. 원하는 논문을 하루 24시간 언제든지 인터넷으로 볼 수가 있지요. 20년 전만 해도 제가 이렇게 연구를 하는 것은 어려웠을 겁니다. 대중이 전문가로부터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전문가와 상호교류하고 검토 비판할 수 있는 물적 조건이 갖춰졌죠. 저는 이게 진짜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비전문가 김상태가 전문가들을 판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한 전문가에게 비판의 칼을 들이댈 때는 다른 쪽 전문가를 고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때그때 고용한 전문가가 상대방 전문가와 어떻게 전투하는지 냉철하게 감시한다. 그리고 어느 쪽이 대중을 무시하지 않고 더 겸손하게 알기 쉽도록 설명하는지, 그리고 더 진실에 가까운지를 판가름하는 것이다. 전문가를 어떻게 고용하느냐고? 방법은 간단하다. 필요할 때 출간된 책을 구해 읽고 인터넷에 접속해 해당 논문이나 글을 찾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 김상태가 내린 판결이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라는 책으로 나온 것이다. 김상태씨는 환빠와 식빠의 망나니 같은 칼부림 속에서 500여 쪽의 탐구 끝에 단재 신채호,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그리고 윤내현으로 이어지는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대고조선론의 손을 들어준다.(이상 세 줄 '책동네'의 기사에서 발췌)


    그가 서 있는 위치를 잘 말해주는 대목은 아래와 같다.



    오강원의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


    오강원이 (주류 사학계의 행동대장) 송호정의 뒤를 잇는 주류 고대사학계의 또 하나의 총아로서 현 시점에서 그의 의미와 활약상은 송호정을 뛰어넘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른다. 고조선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조차 그렇다. 예를 들어 송호정은 이병도, 이기백, 노태돈을 잇는 대표적 식민사학자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인터넷에서도 자주 검색된다. 그러나 오강원에 대해서는 노골적 비판이 드물다. 이는 기묘한 일이다. 오강원이야말로 현 주류 고대사학계의 선봉장인데 말이다. 우선 이 점을 확인해보자.


    .....그의 본색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고고학자이기 때문이다. 사실 고고학 논문은 대중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논문 속에 제시된 낯선 지명과 유물의 이름들은 가독성에 있어 어려움이 많다. 고조선에 대헤 친숙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주로 문헌을 연구하는 재야사학자들 역시 고고학을 싫어한다. 그렇다고 오강원이 고고학을 통해 심원한 학문적 내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 절에서 검토할 핵심적인 내용이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강원의 학문적 주장은 한마디로 '헛발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강원의 문제점이 눈에 잘 띄지 않는 이유는 결국 고고학이라는 낯선 주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주제로 인해 그가 검증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 주류 고대사학계가 지난 30년간 갈망하던 바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자리, 그래서 내용이 빈약해도 자신들 멋대로 떠들어도 되는 자리, 자신들은 검증받지 않은 채 남들의 판단만 하는 자리, 오강원처럼 모든 것을 다하면서 그 본색이 드러나지 않는 자리, 이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소망했던 자리다.


    .....여기서 다루는 오강원의 저서는 그의 박사논문을 증보한 '비파형 동검 문화와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이 잘못 달렸다. 이 책의 진짜 제목은 '비파형동검을 제외한 요령 지역의 청동기 문화'라고 해야 한다. 이유는 잠시 뒤에 설명하자. 어쨌든 이 책도 송호정의 책처럼 600쪽에 달한다. 내용은 고고학 보고서다. 그래도 송호정보다는 조금 낫다. 송호정의 책처럼 어중간하지 않은 정확하게 고고학 전문서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먼저, 이 책이 왜 중요한지 짚어두자. 앞에서 말했듯이 '비파형동검'은 고조선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유물이다. 대(大)고조선론자들은 이 유물이 고조선의 영역과 문화를 대표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小)고조선론자들은 다르다. 비파형동검 하나만으로 고조선의 영역과 문화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강원의 책은 이 소고조선론자들의 이론에 쐐기를 박은 고고학 서적이다.


    그는 비파형동검이 고조선에서 발명된 고유의 문화가 아니라 고조선 밖 시베리아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아 요서 지역에서 발명되어 동쪽인 요동과 한반도로 전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파형동검 이후 시대도 마찬가지다. 고조선은 연나라 등의 우수한 문화를 전수받아 발전할 수 있었고 국가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고조선은 시작부터 주체적인 국가나 족속이 아니었다. 큰 나라는 더더욱 아니었다. 고조선은 소고조선론자들의 본래 주장대로 중국 변방의 원시적 부락집단으로 존재했다가 다른 곳으로부터 문화를 전파 받아 발전하였다. 비파형동검 역시 그런 전파와 전수 과정에서 생긴 유물일 뿐이다.(이상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398- 405쪽에서 발췌)


    저자 김상태는 이에 앞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먼저 적시했다.





    비파형동검을 둘러싼 공방전


    고조선 역사에 익숙하지 않더라도 대중은 이 유물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제 이 유물 비파형동검이 고조선 역사에서 왜 그렇게 유명한지를 알아보기로 하자. 위의 사진은 이덕일의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에서 발췌했다. 비파형동검은 워낙 유명하고 중요한 유물이라 한국 고대사를 다루는 어떤 책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비파형동검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여러 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비파형동검은 학자나 나라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파형동검은 이미 1950년대부터 중국 학자들에게 발굴되어 60년대부터 이 동검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논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든다. 비파형동검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중요할까? 우물 유적이라면 고인돌도 있고 토기도 있고 집 자리도 있고 성터도 있다. 물론 그 유물들도 대단히 중요하다. 그럼에도 고조선 이야기를 하면 최우선의 유물로 비파형동검이 거론된다. 익숙하지 않은 대중은 이 사연까지는 잘 모른다.


    비파형동검이 최우선적으로 중시되는 이유는 이것이 한반도와 만주 전체에 걸쳐 보편적으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만주와 한반도를 통틀어 이처럼 뚜렷하고 일관된 유물은 비파형동검 하나뿐이다. 가령 토기나 묘지나 기타 유물들의 성격은 지역마다 다를 수 있다. 한반도 서북한 지역은 팽이형토기가 주를 이루고 압록강 서북쪽 요동 지역은 미송리형토기가 주를 이룬다.(<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표지에 그려진 토기) 하지만 비파형동검은 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 발굴된 모든 비파형동검은 청동기 시대 지배계급의 독점물이다


    . ..... 나는 고고학을 잘 모르지만 최고 지배계급의  유물이 이토록 넓은 지역에서 이토록 일관된 모습으로 발견된 사례가 또 있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신기할 정도다. 청동기 유물로서 비파형동검의 이와 같은 성격이 의미하는 것은 명백하다. 최소한 서기전 15세기 이래로 만주와 한반도는 통일된 지배계급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규모의 통일국가, 곧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 역사에서 동검이 중요하다.


    이에 대한 주류 고대사학계의 반론은 무엇일까? 역시 한결같다. 송호정을 포함한  주류 고대사학계는 각 지역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비파형동검 하나만을 검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말끝마다 아우성이다. 대신 다양한 유물, 즉 위에서 말한 팽이형토기나 미송리형토기 등 전반적인 유물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다. 언뜻 들으면 그럴 듯하다. 하지만 그 다음의 결론은 뻔하다. 비파형동검을 빼고 토기 등의 나머지 유물은 지역마다 차이가 나므로 이는 분산된 집단이 흩어져 있었다는 증거이자 통일적인 국가는 없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이 결론을 듣는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사람들은 나를 포함한 대중을 무슨 바보로 안다. 비파형동검이 없었으면 그런 말도 가능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일관된 비파형동검의 지배문화 아래 각 지역의 차이가 있다는 게 어떻게 국가가 부재하다는 증명이 될 수 있겠는가?(<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255- 259쪽에서 발췌)


    이쯤되면 저자 김상태가 서 있는 곳의 위치와 고조선의 지표유물 비파형 동검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상의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아울러 이제껏 별로 주목받지 못한 고조선의 지표유물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돈이다. 이제껏 우리가 연나라의 돈이라고 배웠으며, 어느 퀴즈대회에서 물었던 '연나라의 화폐는 무엇일까요?'에 대한 답으로 등장했던 명도전(明刀錢)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 모양새만큼은 눈에 익다. 관운장이 휘둘렀다는 청룡언월도처럼도 생겼고 형장의 망나니 칼처럼도 생겼으며, 작두 같기도 하고 접이식 주머니칼 같기도 한데, 용도는 분명 돈이다. 그것도 고조선의 돈이다.


    * 노파심에서 가라사대 명나라의 돈은 절대 아님. 

    ** '다음백과' 등의 백과사전에서는 여전히 연나라의 돈으로 소개돼 있음.  (정말?!)



    명도전(국립중앙박물관)



    * 2편 '고조선의 화폐 명도전'으로 이어짐.


    ** 앞서 본인이 주장한 비파형 동검의 요서식과 요동식의 분류는 일단 유보하기로 하겠음.



                                                                             

    요서식 동검


                                                                                  

    요동식 동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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