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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편전쟁과 홍콩의 탄생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26. 07:09


    앞서 포스팅한 '홍콩 시위의 역사적 타당성'에서 홍콩 시민의 시위가 왜 정당한지를 아편전쟁과 홍콩의 반환 과정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반환 과정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청나라가 이른바 아편전쟁에서 패해 영국에게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할양했고 이후 다시 신계(新界)지역을 99년간 빌려줬는데, 그에 대한 반환이 1997년에 이뤄지게 된 것이었다. 사실 영국은 신계 지역만을 99년간 빌렸고 홍콩섬과 구룡반도는 영구 할양된 것이었으니 돌려주지 않았도 되었지만 모두 한꺼번에 돌려주었는데, 대신 50년간의 홍콩민에 의한 민주통치를 조건으로 걸었고 중국도 이를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갑자기 힘이 커진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공산당의 직접 통치를 획책했던 바, 이에 대규모 반발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후 홍콩의 시위는 한국 대학에까지 여파를 미쳤고, 짜장면이 대자보를 훼손하는 과정에서 우리 학생들과의 충돌도 벌어졌다 해서 분노와 염려로써 더욱 홍콩 사태를 주시하게 되었다. 홍콩 경찰이 강경진압에 나선 뒤로는 정말로 저러다간 홍콩 사람들이 크게 다치겠다 싶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막판 홍콩 이공대에 고립된 시위 학생들이 처참하게 끌려나오는 광경은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어제 거대한 반전이 있었다. 11월 24일 치러진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범민주 진영이 18개 구의회 452석 가운데 388석을 싹쓸이하며 압도적 승리를 거둔 것이었다. 샤이 차이나의 표심도 있어서 이런 결과가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이번 선거 결과는 임박한 대만 총통 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며, 중국의 패권주의를 추구해 온 시황제 시진핑의 입지도 크게 흔들릴 것이라는 예상이다. 홍콩 시민들의 승리를 함께 기뻐하며 오래 전에 포스팅했던 글을 다시 손 봐 올린다. 자유 홍콩이 탄생하게 된 아편전쟁을 정리한 글이다.





    범민주 진영의 승리에 환호하는 시민들(2019. 11. 25)


     

    100여년 전, 동서의 강국이었던 청나라와 영국이 한판 전면전을 벌였던 제 1차 중영전쟁, 이른바 아편전쟁의 시작은 무역마찰이었다. 당시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차(茶)였고, 영국은 모직물과 인도산 면직물이었다. 지금 중국이 대미 무역에서 큰 이득을 보고 있듯 과거 대영 무역에서도 중국은 큰 재미를 보았다. 중국 차의 독특한 맛은 영국민의 입맛을 빼앗은지 오래였지만,(이른바 티타임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영국이 수출하는 조악한 옷감들은 중국인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어마어마한 인구의 중국인들에게 자국산 옷을 입혀 어마어마한 돈을 벌겠다는 영국 상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오히려 중국에 차값으로 지불할 은(銀)을 매일매일 걱정해야만 했다. 결재 수단인 은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건륭제를 알현하는 영국 경제사절단

    1793년 영국에서는 무역역조를 개선시키기 위해 메카트니를 대표로 하는 100명의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파견하지만 이들을 맞는 청나라 황제는 그저 거만하기만 하다. 영국왕 조지 3세의 친서를 내미는 메카트니 뒤로 영국 관리들은 갖가지 진귀한 진상품을 든채 눈치를 보고 있고 몇 명은 아예 땅에 코를 박았는데, 반면 청나라 관리는 칼을 들고 위세를 부리고 그 옆의 시종은 중국의 주력 수출품인 차와 도자기를 받쳐들고 약을 올린다. 당대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일러스트레이션이다.  



    상호 무역에서 큰 타격은 입은 영국 동인도회사에서는 궁리 끝에 나름 묘안을 생각해냈다. 은 대신 인도산 아편을 공급하기로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해 돈 대신 마약을 물건값으로 지불한 것인데, 전략은 대성공이었다. 아편에 중독된 중국 사람들은 이제 오히려 영국에 은을 지불하고 앞다투어 아편을 구매하는 형국이 되었고 영국 상인들은 땅 짚고 헤엄치는 입장이 되었다. 국경지대의 아편은 지천에 널렸던 바, 장사도 이렇게 쉬운 장사가 없었다.(이때 중국으로 들어간 아편이 무려 300만 톤이다)





    아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 꽃. 그리스어 꽃 이름인 '오피움'이 아편(阿片)으로 음차되었다. 중국어 발음은 '아피엔'.



    북 인도 지역에서 무더기로 재배되는 아편



    채취도 손쉬워 씨방에 상처를 내 흐른 진액을 모아 굳히면 된다. 진통제 모르핀의 원료로 사용되는데 지금은 대부분 같은 성분의 합성물질로 대체되었다. 아무튼 탐닉성이 강한 마약류인데, 그것이 당대의 중국에 퍼졌으니.....



    종국에는 황실까지 번져 아편전쟁 후에는 황후까지 마약에 취해 헤롱대는 지경이 되었다.(영화 '마지막 황제' 스틸컷)




    반면 청나라 정부는 비상이 걸렸다. 나라의 돈이 하루가 다르게 뭉텅뭉텅 빠져나가고 있었으니 경제의 피폐도 피폐거니와 마약에 비척대는 백성들의 꼴이 도무지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하층민부터 시작되었던 마약 흡입은 군인과 관료들 넘어 어느덧 황실에까지 침투했다. 청조(淸朝)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었다. 


    정부로서는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던 바, 마침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하여 황제 광서제는 강경파인 임칙서(린쩌쉬)와 몇 차례 단독면담을 한 후 그를 전권을 가진 흠차대신으로 임명, 마약 밀매의 본거지인 광동에 파견했다. 1839년 3월 광동 항에 도착한 임칙서는 즉시 조치를 시행, 항구의 마약을 모두 몰수해 불태우거나 바다에 던져버리고 영국 상인들을 추방시켰다.(이때 마약 상자들이 던져진 기간만도 23일이었다고 하는 바, 그 양을 짐작케 해준다)



    아편전쟁에의 불을 지핀 흠차대신 임칙서(1785-1850)


    아편을 수거해 용해시키는 임칙서



    임칙서의 몰수령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은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국 정부에 사정을 호소했다. 자유무역의 원칙에 어긋난 중국 정부의 조치는 자신들 상인들은 물론, 영국 경제에도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정부에서 군대를 파견해 청조를 응징하고 대중국 무역을 재개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의제를 놓고 영국 의회에서는 아편 밀수출을 주장하는 휘그 당과 이에 반대하는 토리 당이 표결을 벌었는데, 근소한 표차로 휘그 당이 승리했다. 영국 자본가들의 로비의 결과였다.(찬성 271:반대 262. 1840년 2월)


    제국주의 영국에서도 대청(對淸) 전쟁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은 마약 무역에의 부도덕성에 대한 일말의 양심 같은 것도 작용했지만, 그보다는 당대 중국의 국력을 두려워 한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대의 청나라는 세계 무역의 40%를 좌우하는 강국이었던 바, 언필칭 '잠자는 사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는 걸 인식한 영국 정부는 4천 여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전면전보다는 일단 간만 볼 심산이었다.(그때까지도 영국은 잠자는 사자의 콧털을 건드리게 될까 두려워 하는 분위기였다)


    첫 전투는 1839년 9월 4일 구룡반도 해안에서 영국 엘리엇 함대와 중국 해군 사이에 벌어졌다. 훗날 '세계사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려지게 된 아편전쟁에의 서막이었다. 이 싸움은 영국 선원에 의한 중국 선원 피살 사건으로 촉발되어진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사고 같은 전투였는데, 이 싸움에서 영국군은 여유로운 승리를 거두었다.(아직은 영국은 본대가 도착하기 전이었음에도) 세계 곳곳에서 넉넉한 전투경험을 쌓은 싸움꾼 영국군에 비해 중국군은 실전 경험이 전무한 그저 덩치만 비대한 헐랭이 주먹이었다. 전투는 11월 3일 천비(川鼻)에서 또 한 번 벌어졌으나 이번에도 청군은 대패를 했다.  


    본격적인 싸움은 1840년 6월 영국의 본대(16척의 군함과 28척의 보조함)가 마카오에 상륙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청군이 의외로 허약하다는 것을 눈치챈 영국군은 이후 빠르게 전쟁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전술 또한 앞섰던 바, 당연히 공격할 것을 예상해 지키고 있던 임칙서의 광동 항을 피해 그해 7월 위쪽의 하문(廈門), 상해 인근의 정해(定海)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천진의 외항(外港)인 대고(大沽)를 들이쳤다. 아무런 대비가 없던 대고 역시 무력하게 함락되었고, 영국군은 그해 9월 북경의 외곽 도시인 천진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개시된지 석달도 안 돼 수도 북경까지 위협받는 지경이 된 것이었다. 



    아편전쟁 전황도


    경, 천진, 대고의 위치



    함락된 대고 포대와 널부러진 청군의 시신들 



    놀란 청국은 서둘러 화의에 나섰다. 그리하여 기선(琦善)을 직례총독(直隸總督)으로 삼아 영국군과 협상을 진행하게 했는데, 나름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흠차대신 임칙서를 하직시켜 유배 보내고(마치 모든 잘못은 그에게 있다는 양) 협상장소를 북경에서 먼 광동으로 옮겼다. 하지만 기선은 1941년에 들어서까지 회담을 질질끌며 협상문에의 조인을 미뤘던 바, 뿔이 난 영국군은 곧바로 구룡반도의 호문(虎門) 요새를 포격하고 다시 함대를 북상시켰다. 


    겁에 질린 기선은 곧장 협상 테이블로 달려와 영국 전권대사 엘리엇이 제시한 협상문에 사인을 했다. 주요 내용은 광동 지역에서의 무역 재개, 홍콩의 할양 및 600만 불의 배상금 지불이었다. 이에 영국군은 아무런 비준 절차도 없이 홍콩을 점령하고 그곳이 영국의 영토임을 선언했다. 이 기막힌 소식을 전해 들은 광서제와 청국 조정은 격노할 수밖에 없었을 터, 그 즉시로 기선을 해임시키고 다시 전쟁을 선포했다. 그때까지 끽소리 정도는 지를 수 있는 중국 정부였다. 


    하지만 막상 전쟁이 재개되자 사정은 처음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영국은 다시 호문을 공격해 분전하던 청나라 장수 관천배(關天培)를 전사시키고 요새를 탈취한 후 이어 광동을 함락시켰다. 그리고는 무자비한 약탈을 자행하였던 바, 중국은 재차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청조는 영국의 모든 제안을 받아들이 수밖에 없었으니, 영국군은 홍콩에 일부 병력만을 남기고 배상금 600만 불을 챙겨 유유히 본국으로 철수했다. 



    참 멀리도 보냈다(출저:동아일보)


    아편 폐기 장소에 세워진 임칙서의 동상 

    강한 중국을 표방하는 정부가 최근 곳곳에 건립했다. 




    구룡반도 호문 요새와 그곳을 공격하는 영국군 


    호문 요새와 그 주변도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귀국한 자국군로부터 중국이 '잠자는 사자'가 아니라 '종이 호랑이'임을 인식한 영국 정부는 이 기회에 좀 더 많은 것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리하여 헨리 포틴저를 새로운 전권대표로 하는 영국군을 다시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니, 1차 파견 때보다 훨씬 많은 함선과 군대였다. 1841년 8월 광동에 상륙한 영국군은 일사천리로 북진해 진해(鎭海), 영파, 사포(乍浦), 오송(吳淞), 상해를 차례로 함락시키고 이어 남경으로 진격했다.(위 전황도의 녹색 실선)  


    청국 정부는 이같은 영국군의 행태가 기가 막혔지만 이번에도 협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42년 8월 29일, 청나라 대표는 사방에서 쏘아대는 포화의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 영국 함대의 모함 콘월리스호 선상에서 영국의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인 조약문에 사인을 하였다. 이로써 13개 조의 굴욕적인 '난징(남경)조약'이 체결되었던 바,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i) 홍콩섬의 할양

    ii) 광동, 복주, 영파, 하문, 상해, 다섯 항구의 개항

    iii) 영국 영사관 개설

    iv) 아편 배상금 600만 불, 전비 배상금 1,200만 불, 공행(중국 관허 상인조합) 부채 300만 불 지불

    v) 영국 정부에 수출입 관세 협정권 부여




    난징조약문과 조약 체결 당시의 사진


    훗날 영국의 화가는 위 사진을 바탕으로 당시의 상황을 재현시켰는데, 그림 아래쪽에는 개 한 마리가 늘어져 있다. 이는 당대의 화가들이 즐겨 쓴 에드립이기도 하지만 영국의 여유있고 느긋한 협상 자세를 설명해주는 장식이기도 했다.


    위 그림의 색채화. 이 그림은 훗날 난징조약의 상징화가 되었다. 



    그러나(계속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므로 앞으로 이 단어가 몇 번이나 더 들어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다가 아니었으니, 영국은 이후 다시 난징조약을 보완한 중영5구통상장정(中英五口通商章程, 1843. 7. 22)과 후먼(호문)조약(1843. 10. 8)의 체결을 청나라에 강요했다. 영국의 치외법권 보장,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등의 내용을 담은 불평등 조약으로, 이 조약으로 인해 영국의 군함은 중국 영해에 자유로이 진입할 수 있게 되었고, 외국인이 개항장에 집을 짓고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조계제도(租界制度)의 기반도 마련되었다. 사실상 중국의 반(半)식민지화였다. 


    이어 중국은 미국,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등 외국 열강들과도 마찬가지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이제 중국은 아시아의 용이 아닌 여실한 종이 호랑이였다. 얼마 전까지 사해(四海)를 호령했던 중국 황제와 중화 인민들로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 계속해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것도 아직까지는 서막에 불과했으니 이어서는 청조의 멸망을 재촉시킨 태평천국의 난이 기다리고 있었고, 또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가 함께 침공한 제 2차 아편전쟁이 준비되어 있었다. 1차 때보다 훨씬 더 극심한 자존심의 상실과 뼈아픈 상처를 안겨준 전쟁이었다. 


    * '찌라시 한 장에서 비롯된 태평천국의 난'으로 이어짐.



    어떤 그림은 청국군대를 대놓고 종이 호랑이에 비유했다.


    홍콩은 단계적으로 할양되었던 바, 1차 아편전쟁 후 1842년의 '남경조약'으로 홍콩섬이,(파란 색) 

    그리고 2차 아편전쟁 후 1860년의 '북경조약'으로 구룡반도 및 부속 4개 섬이,(짙은 보라색) 

    그리고 청일전쟁 후 1898년 '경계확장전문조약'으로 '신계'지역 및 235개 도서가 99년간 조차된다.(옅은 보라색)

     * 사진 및 그림의 출처: Google. 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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