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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지(直指)와 금속활자 (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27. 06:29


    지난 주말 고려의 금속활자를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도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덕수궁 선원전 터에서 열린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발굴 성과 전시회('개성 만월대, 열두 해의 발굴')에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 6개가 전시된 까닭이다. 복제품이긴 해도 그 활자들을 보는 순간 뭉클했다. 나아가 그것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의 책 '상정예문'(詳定禮文)과 '직지'를 찍어낸 바로 그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살짝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에서 주관한 전시회 리플렛(배경은 만월대의 정전인 회경전 계단임)


    만월대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전시장 설명문


     2015년 발굴조사 때 출토된 전()자

     


    그런데 그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 광화문 지하철 역에 전시된 김진명의 소설 '직지'('직지, 아모르 마네트')의 광고판을 보게 되었다. 빨려들어가듯 교보문고로 들어가 책을 샀고 어젯밤 다 읽었는데, 앞서 '천년의 금서' 때처럼 내용을 소개하기는 힘들 듯하다. '천년의 금서'는 저자 본인이 공개 석상에서 스포일러를 자진 공개했고 또 출간된지 오래되었지만 '직지'는 신간인지라.....


    그래도 구성상 어쩔 수 없이 스포를 흘릴 수밖에 없는데, 우선 개요를 대강 말하자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고려 금속활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추론을 입증해나가는 특유의 팩션이다.



    김진명 신작 소설 <직지, 아모르 마네트>

    아모르 마네트는 '세월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는 뜻이라고



    김진명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진작 못했는가 하는 후회를 말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이번 작품에 대한 만족감을 표했고, 독자들의 평도 대체로 작가와 생각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생각은 좀 달랐던지라 과거 직지 찾기에 몰두했던 한 사람으로 이에 한마디 얹고자 예전에 썼던 글을 리포스팅(이런 말이 있나?)하게 되었다. 내가 소개하는 아래의 글은 기존에 알려진 '직지'에 관해서도 좀 다른데 나름대로 팩트에 입각해서 쓴 글임을 밝혀둔다.


    고려에서 금속활자를 이용해서 찍은 최초의 책은 아래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로, 고려 고종 26년인 1239년 무신정권의 우두머리 최우가 강도(江都, 강화도 임시수도)에서 출간했다. 내용은 당나라 승려 현각(665-713)이 선종의 육조(六祖) 혜능대사를 만나 깨우친 깨달음의 경지, 즉 증도(證道)를 읊은 증도가의 각 귀절을 송나라 승려 남명화상 법천이 320편으로 늘어붙여 깨달음의 뜻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 책은  목판본만 있고(공인박물관 & 삼성출판박물관 & 개인소장) 금속활자본은 전해지지 않으나, 그나마 다행히 그 책의 말미에 1239년 진양공 최이가 쓴 '어시모공 중조주자본'(於是募工 重彫鑄字本, '이에 장인을 모집해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다시 새겼다')이라는 발문이 남아 있다.

     

    ※ 重彫鑄字本을 '금속활자로 거듭 인쇄했다'고 해석하고, 경남 양산 공인박물관 소장의 책에 금속활자본의 성질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 책을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내가 그 책을 직접 본 적이 없기에 뭐라 말하기 힘들다. 하지만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전래되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 3권은 모두 목판본이며 그중에서 공인박물관본이 가장 늦게 찍은 후쇄본으로 여겨진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개인소장본)
     
     
    이는 이 책의 모본(母本)이 금속활자본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이 책은 꽤 유명했던 듯 조선시대에 출간된 '증도가남명계송언해'라는 한글번역본도 전한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보면 이보다 앞선 금속활자본이 있을 수도 있는 바, 고려 무신정권 때의 문신 이규보(1168-1241)가 지은 개인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나오는 '상정예문'[각주:1]이 그것이다. 즉 '동국이상국집'에는 최우가 하나 남은 '상정예문'의 가장본(家藏本)[각주:2]을 보존하기 위해 '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 금속활자)로 28부 찍어 여러 기관에 나눠 보존케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추정 시기는 고종 21년인 1234년에서 고종 28년인 1241년 사이의 어느 때이다. 따라서 1239년에 주자로 인쇄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보다 '상정예문'을 먼저 인쇄했다면 이 책이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 될 수도 있다.(학교 다닐 때 배운 1234년에 찍은 '상정고금예문'이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말은 인쇄 시기의 상한선에 맞춘 말이므로 사실 옳지 않다. 아울러 고금의 예문을 모았다는 뜻이 덧붙여 들어간 책 이름 '상정고금예문'도 정식 명칭인 '상정예문'으로 불러야 맞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추정하자면 1231년 몽고가 쳐들어왔고 그 이듬해인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를 하는 바, 이 급박한 시기에 한가롭게 고래(古來)의 예법을 다룬 책을, 그것도 금속활자를 주조해 찍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상정예문'은 1231년 이전 개성에서 인쇄되었다 보아야 옳을 것이니, 위에서 소개한 만월대 출토 금속활자들은 '상정예문'을 찍어낸 바로 그 활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455년 인쇄된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216년이 앞서는데, '상정예문'이 1231년 이전에 인쇄됐다고 하면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최소한 225년이 앞서는 책이 된다.


    동국이상국집
                                                     

                            

    그래도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우리나라 것으로,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직지(直指)’다. 정식 제명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백운화상이란 스님이 불조(佛祖: 과거 이름난 고승들)의 깨달음의 방법을 초록하여(필요한 부분만 뽑아) 요점 정리한 책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여기서 직지심체(直旨心體)란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禪)의 명구(名句)에서 따온 말로서, ‘참선하여 사람의 마음을 직시하면 그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좋은 말이다. 쉽게 말해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고 개 돼지의 눈에는 개 돼지만 보인다는 뜻이다.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백운화상이란 분은 고려 공민왕 때의 스님으로 1372년부터 불조들의 깨달음 법을 초록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발췌한 내용을 백운화상의 제자였던 석찬과 달잠이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책의 마지막 장에 써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책을 프랑스로 가져간 꼴랭 드 쁠랑시(Collin de Plancy)는 정말로 매의 눈을 가진 자였는지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보고 단박에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책의 표지에도 명기했던 바, 표지 ‘직지’라는 글자 옆에 써 있는 꼬부랑 글씨는 바로 그런 내용으로, ‘1377년에 한국에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이었다.(그와 궁중 무희-정확히는 官妓- 이심과의 연애담은 지극히 사생활적인 부분이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쁠랑시가 쓴 꼬부랑 글씨



    그의 이 같은 혜안은 젊은 날 자신의 전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특이하게도 프랑스 동양어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하였던 바, 그로 인해 중국통의 직업외교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프랑스가 조선과 수교를 하자 초대 프랑스 공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었다.(1888년) 그런데 그는 외교관이면서도 동양학에 관한 학자적 관심을 기울여, 중국에 있을 때는 ‘북경과 그 주변의 고고학적 연구’라는 책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고, 조선에 와서는 ‘조선서지(朝鮮書誌)’라는 인문서적을 출간하여 유럽에 선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한국을 다룬 책으로는 '하멜 표류기' 이후로 처음 소개된 책이 아닐까 싶다.


    이 같은 학자적 관심도 관심이려니와 그의 20년 중국외교관 생활은 한문과 중국역사에 정통해지고도 남음이 있었을 터, 자신이 발견한 ‘직지’라는 책 뒤에 써 있는 선광(宣光)이라는 중국연호로부터 서기(西紀) 연대를 추산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하지만 잠깐의 착각이 있었던듯 연대를 고쳐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쁠랑시(1853-1922)의 사진과 그의 한문 서명. 

    그는 자신의 이름 '꼴랭 드'를 음차한 갈림덕(葛林德)이라는 한문 이름을 만들어 썼다. 



    쁠랑시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상실됨에 따라 두 번이나 자원 근무했던 정든 조선을 떠나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의 나라 프랑스로 돌아가면서 그동안 조선 땅에서 수집했던 분야를 망라한 1500여 권의 책을 가지고 갔다. 그때 ‘직지’도 가져갔음은 물론이었다.


    그런데 그는 가져간 모든 책들을 자신의 모교인 동양어대학에 연구교재로서 기증하면서도 ‘직지’만큼은 죽을 때까지 끝내 꺼내놓지 않았는데, 임종에 앞서 자신의 외교관 생활 때의 부관이자 연구 조수였던 모리스 꾸랑에게 내주었다. ‘너는 이 책의 가치를 알 것인즉 때가 되면 요긴하게 써 먹어라’는 뜻이었을 터이다.(※ 이상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상이한데, 적어도 본인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


    혹자는 쁠랑시를 마치 문화재 약탈자처럼, 그리고 직지를 약탈유물로 간주하려고도 들지만,(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훔쳐간 ‘의궤’마냥) 기실 직지가 약탈유물이라는 근거는 전혀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 쁠랑시로 인해 직지가 보존되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금속활자라는 본연의 역할이 증거가 되는 바, 본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이유인즉 책을 많이 발행하기 위해서이다.(목활자본은 인쇄의 거듭됨에 비례해 뭉개져버리므로)


    그렇다면 직지도 만만치 않은 부수가 발행되었을 터,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책은 그가 가져간 직지 하권(직지는 상·하권으로 발행됐다) 뿐이다. 정권의 주체와 국시가 바뀐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서적인 직지를 소홀히 여겼을 것임은 분명할 터이고, 그 책이 아직 몇 권 돌아다녔을 법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조선에는 아무도 책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만일 쁠랑시가 책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주자인시(鑄字印施: 금속활자로 인쇄된)된 그 책의 존재조차 몰랐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직지에 대한 푸대접은 사실 조선 땅에서만의 일은 아니었다. 쁠랑시가 애지중지했던 ‘1377년에 한국에서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는 이후 살림이 궁했던 모리스 꾸랑이 1911년 경매 시장에 내놓았다. 하지만 별로 사려는 사람은 없었고, 그것은 뭐하나 건질 게 없나 해서 경매 시장에 나왔던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héque nationale de France)측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데는 귀가 솔깃했지만 책이 인쇄된 곳이 꼬레(Coree)라는 말에 바로 눈을 다른 데로 돌렸다.


    별볼일 없는 나라 꼬레에서 주자인시됐다는 그 말은 별로 믿을 바가 못 될 터,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돈 많은 호사가 몇 명이 그 말에 귀를 기울여 입찰에 응했다. 그리고 직지는 앙리 브베르라는 골동품 수집 취미를 가진 보석상에게 낙찰되었다. 180프랑이라고 하는 높지 않은, 그렇다고 아주 낮지도 않은 그런 가격이었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내관과 외관



    그런데 이 책은 우연찮게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들어갔다. 1942년 앙리 브베르의 사망 후 상속인에게 관리돼 온 유품 중의 도서 일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는데, 그때 직지도 함께 딸려간 한 것이었다.(1950년) 그리고 책은 이후 내내 도서관 어느 한 구석에 잠들어 있었다. 책의 존재는 이미 '조선서지'라는 쁠랑시의 책에 소개돼 알려진 상태였지만, 직지를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책의 행방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이후 직지를 다시 찾아낸 사람은 한국인 여성 박병선 박사였다. 1955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국비 유학생이 된 그녀는 파리 소르본느 대학 등에서 학위를 받고 한국에 나왔다가 다시 프랑스로 들어가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는데,(정말로 운명적으로) 그러다 '조선서지'라는 책에서 직지의 존재를 확인하게 됐고, 동료 학예사로부터 오래된 동양의 책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래된 동양의 책이 어디 한 두권이랴?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곳곳을 훑던 그녀는 1972년 봄, 도서관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정말로 오래된 동양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직지였다.(그때까지 그녀가 뒤진 책이 3만 권 정도였다 한다) 그녀는 그것을 곧장 도서관 측에 알렸고, 도서관 측에서는 마침 그해 열린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 기념 행사에 이 책을 출품하였던 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에 78년 앞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의 등재는 당연한 노릇이었다.(2001년) 뿐만 아니라 그녀는 1975년, 국립도서관 별관 창고에 잠들어 있던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훔쳐간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내 그것이 한국의 것임을 세상에 알렸다.



    외규장각 조선 의궤와 젊은 날의 박병선 박사.



                      

                      박병선 박사(1928-2011)의 영정. 그 분의 유해는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도서관 연구직에서 해임되었다. 도서관의 비밀을 외부에 발설했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으니, 이후 10년 간 일반인 자격으로서 도서관을 출입하며 자료의 제출을 요구, 외규장각 도서에 대한 정리를 마쳤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의궤를 비롯한 외규장각 도서 반환운동을 벌였고, 2011년 마침내 그 책들은 영구대여라는 형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무려 145년만의 귀향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직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동양문헌실에 보관돼 있다. 외규장각 도서와 달리 약탈문화재란 근거가 없는 까닭에 반환을 요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한때 의궤처럼 영구대여하겠다는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쑥 들어갔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한동안 직지 찾기 국민운동이 벌어졌었으니, 직지의 상권이나 아니면 또 다른 직지를 찾아보자는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결과는 없다. 그래서 하는 말이거니와 다른 책으로 시각을 옮겨보는 것도 옳을 듯싶다. 이를테면 앞에서 말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같은 책인데, 그 책의 금속활자본이 있다는 것은 뒷부분의 내용에 주자본(鑄字本)을 번각 인출하였다는, 즉 금속활자로 찍은 책을 나무 판에 뒤짚어 붙여 목판본을 새겼다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금속활자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그렇지만 주자본과 목판본의 책을 구별해내는 일 자체가 그리 녹록치 않다)


    * 2편으로 이어짐.



    외규장각 건물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인쇄된 고려궁지이자 프랑스 군에 의해 의궤가 약탈됐던 조선 외규장각이다.


    문수산성 희우루(喜雨樓)

    갑곶진을 바라보는 요새로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과 격전을 치렀으나 함락됐다.


    이규보 묘소

    위에서 말한 '동국이상국집'의 저자로서 강화군 길상면에 위치한다.(사진제공: 강화군청)


    금속활자가 발견된 개성 만월대 터

    고려 황성의 정궁(正宮)이 있던 곳으로 4대 광종 때 황제국 제도에 입각해 조영됐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자 북한국보유적 122호이다.(사진제공: 문화재청)

     

    1. 고려전기 인종 연간에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예법에 관한 서적이다. [본문으로]
    2. 집에서 간직돼 온 책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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