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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직지(直指)와 금속활자 (II)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1. 28. 23:58

    '직지와 금속활자' 1편에서 이어짐.


    직지를 찍었던 고려의 인쇄술은 조선으로 계승돼 계미자(癸未字, 1403년), 경자자(更子字, 1421년), 갑인자(甲寅字, 1434년)라는 활자를 만들어낸다. 특히 갑인자(甲寅字)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하기에 편하게 주조되었을 뿐 아니라 활자가 20여만 개나 되는 가장 우수한 활자로 꼽힌다.


    아울러 기존의 활자를 만드는 데 쓰이던 납을 대신해 세종 18년부터는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 쓰기 시작했던 바, 재질이 보다 강해지고 자체(字體) 또한 미려해졌다. 제작량도 상당했으니 당시 하루에 만드는 활자 주조 수량은 3,500자 정도로 독일 구텐베르크가 만든 수량의 거의 10배나 되었다.


    세종 때 학자 변계량(1369-1430)이 쓴 '갑인자발'(甲寅字跋)에 "인쇄되지 않은 책이 없었고 배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라고 한 것은 분명 과장된 표현일 테지만, 조선 초기의 발전된 출판문화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또 이와 같은 기술은 중국과 일본으로도 건너가 그들의 인쇄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진명의 소설 '직지'에 나오는, 유럽에 금속활자술을 전해준 조선 여인 카레나(Carena)는 그 아비가 필시 갑인자를 만들던 사람이었을 것이다.(소설 속에서는 아버지를 도와 금속활자를 만들던 은수가 명나라를 거쳐 유럽으로 가게 되고, 독일 감방에서 만난 쿠자누스에게 활자주조법을 가르쳐주는 과정이 긴박감있게 펼쳐진다. 쿠자누스는 이 기술을 다시 친구인 구텐베르크에게 전수한다)


    조선 세종때의 갑인자(甲寅字)


    <진서산독서기을집상대학연>(眞西山讀書記乙集上大學衍)

    갑인자로 찍은 최초의 책으로 여겨진다.(고려대학교 소장)



    그런데 정말로 우리나라의 인쇄술이 유럽으로 건너갔을까? 소설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 이야기가 사실임을 증언하는 발언이 2005년 5월 '서울 디지털 포럼 2005' 행사장에서 나왔다. 그 행사는 미래의 정보기술 IT문화를 전망하는 자리였는데, 이 행사에 미국측 대표로 참가했던 엘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발언을 한 것었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해서 얻은 기술입니다. 그때 그 기술을 배워 간 사람 중에 구텐베르크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구텐베르크에게 인쇄술을 전수했던 것이지요."


     


    출처: STB 상생방송


     
    엘 고어는 이 같은 사실을 스웨덴 인쇄박물관에서 들었다고 했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솔깃한 내용인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는 이같은 내용이 없다. 그런데 지난 2016년 9월 29일,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 제작팀은 바티칸 교황청 유물 보관 창고의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아래와 같은 놀라운 문서를 발견했다. 700여년 전 로마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국왕에게 보낸 친서의 사본이었다.




    로마교황이 고려 국왕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가 고려 국왕에게 제대로 전달된 지는 알 수 없으나  전달의 임무를 맏은 니콜라스 사제가 베이징으로 간 것까지는 확인됐던 바, 고려와 유럽과의 관계가 아주 단절돼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엘 고어가 말한 위의 이야기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다 하겠다.


    또한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를 찍는데 사용한 활자주조법은 독일에서 줄곧 주장해 온 펀칭주조법이 아니라 '직지'를 찍는데 사용된 고려 활자의 주조법과 같은 주몰사주조법(모래를 주형으로 사용하는 기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바, 이 또한 유럽 인쇄술과 고려 인쇄술의 상관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것은 소설 '직지'의 주요 테마이기도 하다)


     1455년 인쇄된 최초의 금속활자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4-1468)가 발행한 '42행 라틴어 성서'(일명 마자랭 성서)를 유럽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초판 인쇄의 완벽함에 내심 놀라지만, 사실은 그보다 몇 년 앞서 찍은 '도나투스 문법서'라는 라틴어 표준 교본이 최초이다. 구텐베르크는 1450년 이와 같은 책을 당장의 돈벌이로 찍어내었고, 그 5년 뒤인 1455년, 세 질로 된 '42행 성서'를 발행했다.



     1450년 인쇄된 <도나투스 문법서>


    1454년 독일 마인츠에서 인쇄된 <도나투스 문법서>


    구텐베르크 당시의 인쇄 모습

    당시의 인쇄기는 포도주 압착기를 개량해 썼는데, 큰 불편은 없었던 듯 이후 350여 년 동안 사용되었다.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마르틴 루터의 교회개혁 선언서인 '95개조의 반박문'을 인쇄해 종교개혁에 불을 지폈던 바, 앞서 '고선지 장군과 종교개혁'에 실었던 종이 전래에 관한 글을 옮겨 보겠다.


    1319년, 독일에도 제지술이 상륙했으니 신성로마제국의 자치 도시였던 뉘른베르크에 최초로 종이 공장이 세워졌다. 그리하여 독일에서도 종이가 차츰 일반에게까지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앞서도 언급이 있었거니와 그 최고 수혜자는 마르틴 루터였다. 1517년, 당시 로마 교황청의 부정(면죄부 판매와 성직 거래 등)과 싸우던 루터는 궁리 끝에 자신의 주장 95개를 종이에 써 비텐베르그성(城) 교회의 문 앞에 내걸었다.


    그리고 이 '95개조의 반박문'은 지사(志士)들의 공분(公憤)을 모으는 데 성공했고, 때맞춰 보급된 종이와 인쇄술에 힘입어 순식간에 독일 및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게 되었던 바,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드디어 기존 종교에의 개혁이 요구되게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전단지의 위력이었다.


    여기서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루터의 개혁론에 대해서 따로 지면을 할애할 생각은 없다. 다만 단언하거니와, 교황청의 부패가 아무리 극심했다 하더라도, 또 루터의 개혁론이 백번 지당했다 하더라도 탈라스 전투로부터 비롯된 종이의 전래가 없었다면 그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며,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발생 또한 매우 더뎠거나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루터의 목소리가 크고 절절했던들, 종이가 없었다면 그의 주장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었겠으며 아울러 대중들 또한 그의 생각을 어떻게 전달받을 수 있었겠는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을 보길 원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염원은 종이와 인쇄술에 힘입어 실현될 수 있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나는 전에 ' 종교개혁의 성공에는 주창자인 마르틴 루터, 인쇄술을 발명한 구텐베르크, 그리고 3만의 군대를 이끌고 탈라스 평원에 이른 고선지라는 3명의 위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첨부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말에 공감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필시 억지라거나 해괴한 주장이라고들 여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동급으로, 혹은 종속 관계로 묶는다. 구텐베르크가 성서를 인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종교개혁을 의도하여 인쇄술을 발명하지는 않았을 터, 인쇄술의 상관관계는 '배경'이나 '보완'이다. 인쇄술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중요한 또 한 가지 '배경'과 '보완'은 단연 제지술일 터, 그와 같은 제지술의 전래가 있어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아무래도 한 사람의 위인을 더 추가해야 할 것 같다. 당연히 금속활자를 발명했던 이름 모를 고려의 장인이다. 그리고 그 공은 종교개혁에만 국한될 리는 없으니, 유럽대륙은 비로소 암흑기를 벗어나 번영의 근대사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에 작가 김진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지식혁명의 열매라면 직지는 그 씨앗이다. 독일은 직지의 씨앗을 인정하고 한국은 독일의 열매를 인정해야 한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 누구나 궁금하게 여기는 일이 있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는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언급했고 또한 공감했다. 유럽 제국의 알파벳은 26자 내외이지만 한자는 6만자 이상으로, 주형의 제작에서부터 조판, 프레스까지 도저히 게임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니 이같은 구조적 문제를 안고도 인쇄문화를 이어 온 조상님들이 도리어 탄복스럽다.



    조선 철종때의 정리자(整理字)


    (이번에는 공감할는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이유 한가지는 저들의 실용주의적 사고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나 성서를 인쇄하기 3년 전인 1422년, 구텐베르크는 교황의 명에 의해 면죄부 2,000장을 찍었다. 동로마 제국을 침공한 이슬람 군 퇴치를 위해 모집한 키프로스 용병의 급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그 면죄부는 독일 프랑크프루트에서 판매됐다) 구텐베르크는 그 인쇄술을 이용해 성서를 찍었고, 면죄부 판매를 규탄하는 '95개조의 반박문'도 찍었다.


    인쇄술은 이후로도 온갖 것에 다 이용됐고, 인쇄소 역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은 이 인쇄술을 오직 관(官)에서 쥐고 있었던 바, 모든 것이 교조적이고 제약적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점이 유럽과 조선의 운명을 갈랐다.


    참! '드라큘라 백작의 억울한 누명' 이후로 여러 번 언급됐 듯,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천년제국 동로마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면죄부까지 팔며 애쓴 교황에게는 보람이 없었지만, 활자를 만드느라 자금난에 봉착했던 구텐베르크는 그 덕분에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한 구텐베르크는 그 2년 후 '42행 성서'를 찍었고 대박을 쳤다.      -end-



    복(覆)자 활자

    현재 대한민국에 있는 유일한 고려 금속활자로 개성 고려 무덤 출토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증도가자

    그런데 2010년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을 때 상용됐다고 주장하는 활자(증도가자)가 무려 101개나 출현했으니 당황스러울밖에.


    진품임을 강력히 주장하는 경북대학교 남권희 교수


    공개된 증도가자

    공방은 아직도 진행중이다.(오른쪽 책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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