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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 위구르에선? (II) - 신장 위구르의 독립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19. 12. 23. 20:43


    신장 위구르의 분쟁과 역사를 다룬 1편에 이어 이번에는 신장 위구르 지역이 과연 독립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민감하고도 흥미로운 문제를 다뤄보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은 근세 들어 두 차례 독립국의 지위를 누린 적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알리칸 토레가 이끌던 1933년의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제 1 공화국)*이었고, 두번 째가 아흐맷잔 카시미가 이끌던 1945년의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제 2 공화국)이었다.


    * 동투르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은 1931년 하미(哈密)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족봉기에 힘입어 1933년 사우드 다몰라가 건국했으나 내분으로 3개월만에 붕괴되고, 그해 다시 쿠르자에서 일어난 봉기로써 알리칸 토레를 주석으로 하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이 건립된다. 하지만 이 두 번째 정부도 소련의 지원을 받는 한족 군벌 성스차이(盛世才)에게 점령당하며 1년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제 2 공화국은 1945년 1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일본과의 전쟁으로 정신 없는 틈을 이용해 건국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처음에는 이를 인정하는 것처럼  굴었으나 1947년부터는 탄압 모드로 돌았는데, 그러자 위구르 지도자 아흐맷잔 카시미는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눈을 돌린다. 그러던 중 아흐맷잔 카시미는 1949년 그를 비롯한 주요 관료를 태운 비행기가 의문의 추락을 하면서 죽게되고, 그 뒤를 이은 사이푸딘 아지지가 중국공산당에 의탁하며 지금의 힘든 형국의 단초를 스스로 제공하게 된다.  

     


    모택동과 사이푸딘 아지지

     

    1950년 6월의 기념사진

    좌로부터 주덕, 유소기, 사이푸딘 아지지, 모택동, 부르한 사히디,(북경주재 위구르 대표) 주은래, 등력군, 덕림.



    1949년 10월 22일, 사이푸딘 아지지는 결국 3000km가 넘는 북경까지 달려와 모택동을 만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실질적으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편입되게 된 것이었다.(12월 공식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에 편입됨) 이에 사람들은 사이푸딘 아지지의 선택을 오판이라 비난하기도 하지만,(결과적으로는 나라를 잃었으므로) 사실 그도 선택의 여지가 좁았다. 우선은 비행기 추락 사고가 일어나 위구르의 인재들이 모두 죽었고, 더욱이 그동안 위구르를 지원했던 소련이 중·소 평화 모드가 형성되며 발을 빼기 시작하자 중국의 침략을 두려워 한 사이푸딘 아지지가 제 발로 모택동을 찾아갔던 것이었다.


    ~ 이때 나온 유명한 말

    新疆赛福鼎向毛主席面交入党申请书, 毛主席: 我专门请了回民厨师啊 

    (신장 사이푸딘이 마오쩌둥 주석에게 공산당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고 마오쩌둥은 이렇게 답했다 : "내가 특별히 회족 요리사를 준비시켰네") 


    당시 모택동은 일본과의 전투, 그리고 국민당과의 긴 내전을 겪은 교활한 전력가이자 정치가로서, 엉겹결에 대권을 쥐고 당황하는 신장의 젊은 정치가를 요리하는 것쯤은 땅 짚고 헤엄치는 일보다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사이푸딘 아지지는 자신의 선택이 위구르의 영구 자치를 보장을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리니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선택은 최고의 악수(惡手)였던 셈이다. 모험이긴 하지만 차라리 그가 소련에 빌붙었다면 몽골처럼 독립국의 유지가 가능했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로서 소련 연방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될 때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때 모두가 중국으로의 의탁을 원한 것은 아니었으니 자주독립파들은 터키로 망명하게 된다. 그 까닭인지 지금도 터키 정부는 중국의 위구르 정책에 비판적이다.  



    호치민과 사이푸딘 아지지



    그러나 사이푸딘 아지지는 10년 이상이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반을 지내던 바, 개인적으로는 영달을 누렸을 터였다. 위의 사진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반으로서 베트남의 호치민 대통령(1860-1969)을 만나는 사진인데 확실히 언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두 사람의 얼굴을 미루어 60년대라 짐작된다. 따라서 그때는 신장 위구르 지역에 대한 중국의 탄압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겠으나 이때 호치민은 사이푸딘 아지지를 한심하게 생각했을는지도 모른다. '중국에게 나라를 맡기다니, 바보 같은 놈!'


    호치민은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제국주의 프랑스와 싸움을 벌일 때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자는 주위 사람들의 제안을 다음과 같이 일축시켰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해! 프랑스는 우리가 5년이면 몰아낼 수 있지만  중국이 들어오면 50년이 지나도 몰아낼 수 없어!" 



    서북의 3인



    내가 '서북의 3인'이라 이름 붙인 이 사진은 1952년 신장 우루무치에서 촬영된 것으로, 사이푸딘 아지지, 시중쉰,(習仲勛) 부르한 사히디 순이다. 앞서 설명한대로 사이푸딘 아지지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행정수반, 부르한 사히디는 북경주재 위구르 대표를 지냈다. 시중쉰은 당시 서북지구 군사정무위 대리주석으로 위구르 내정을 좌지우지하던 사람이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시진핑 총서기의 부친이다. 이 사진은 지금의 신장 위구르 사태에 대한 시진핑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읽게 해준다.

     

    신장 위구르 사태가 격화된 건 지난 2014년 쿤밍(昆明) 역에서 일어난 테러로 33명이 사망하고 140여명이 다치는 사건 이후부터였다. 이후 중국은 대규모의 인민 해방군을 배치했는데, 그 결과 앞서 설명한대로 1000만 위구르인의 10분의 1이 수용소에 갇혀 교화와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울러 민족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위구르 여성이 한족 남성과 강제 혼인되고 있고, 무슬림들이 먹지 않는 술과 고기가 그들 사회에 침투되었으나 반면 할랄 음식은 금지되고 있다. 또 학교에서는 위구르어 교육을 할 수 없으며 역사적 사원은 폐쇄되었고, 경찰력 강화와 함께 서로를 감시하고 고발하게 만드는 공안체계도 만들어졌다.



    천취안궈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 위원회 서기

    일 중독자로 알려진 그의 별명은 '시진핑의 쇠망치'다. 강제수용소는 당연히 그의 작품인데 최근에는 위구르인의 안면 인식과 DNA 수집을 마쳤다는 후문이다. 



    이상을 지휘하고 감독하는 사람이 위의 천취안궈(陳全國)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당 위원회 서기로, 티벳 자치구 당 위원회 서기를 역임한 자이다. 그는 당시의 효율적인 압제 정치로 시진핑의 신임을 얻었던 바, 2016년에 신장 행정 수반이 되었다. 말하자면 이민족 통치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지금까지의 결과로만 보면 그의 노력은 상당한 효과를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신쟝 위구르 지역은 여전히 내연(內燃)하고 있는 화약고다. 원천적으로 위구르 사람들은 중국과는 다른 언어와 외모를 가진 다른 세상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은 피보다도 강한 종교로써 결속돼 있다. 이 점이 가장 무서운 요인으로서, 이번에 문제가 된 메수트 외질의 SNS 발언도 종교에서 비롯된 것이지 투르크인의 유대의식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다.(외질은 터키 출신이지만 독일인으로, 지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 대표로 출전해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메수트 외질의 SNS 사진과 순박한 얼굴 표정.

    그의 얼굴은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늘 착해보인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은 모두가 외질처럼 위구르족에게 애정을 갖고 있을까? 언뜻 그렇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바로 옆 나라인 우즈베키스탄만 해도 위구르 난민이나 망명자들을 받아들인 전력이 없으며 그들의 시위에 동조한 적은 더더욱 없다.(그저 동정할 뿐이다) 이는 우즈베키스탄이 중국에 입고 있는 경제적 신세를 고려한 우즈벡 당국의 자발적 협조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무관심적인 측면이 높다. 다시 말해 우즈벡인은 위구르인을 동투르크스탄 이슬람 공화국의 국민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소수민족으로만 여기고 있다. 너희들 문제이니 너희들끼리 알아서 하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중국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니 예전에 위구르에 호의적인 대표적 이슬람 국가였던 인도네시아도 중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긴밀해지자(쉽게 말해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자) 침묵 모드로 돌아섰다.(다만 말레이지아는 여전히 친 위구르적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접경하고 있는 러시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이 상하이 협력기구(SOC)*의 중요 회원국이라는 것도 위구르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이다. 동투르키스탄은 힘이 없는 나라이니 외교적 해법을 모색해봐야 하는데, 러시아나 인접한 이슬람 형제국에게마저도 도움을 기대할 형편이 못 된다는 것이다.

     

    * 1996년 중국 상하이에서 결성된 아프카니스탄 인접국의 지역 안보를 위한 국가조약으로 중국과 위 5개국을 주축으로 하는 국제기구이다.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역내 평화와 안보를 위한 상호 협조와 군사 공조체제의 구축이지만 그외에도 테러리즘, 분리주의, 극단주의 배격을 정강으로 하고 있어 위구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2000년에는 우즈베키스탄까지 회원국으로 합류했다.(현재 몽고, 이란, 인도, 파키스탄이 옵저버 회원국인데 이들 중 인도를 제외한 3개 나라가 정식 화원국 자격을 신청하였으며, 미국은 옵저버 국가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안타깝지만 이런 상활 속에서의 독립은 힘들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중앙아시아의 화약고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터질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인권 상황이나 개선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것 같은즉, 생각 외로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위구르 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중국의 지원을 받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물론이요, 러시아, 쿠바,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 그외에도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오만, 바레인, 시리아, 카타르, 아랍 에미레트 같은 이슬람 국가들마저 중국의 편에 섰다.


     


    강제수용소로 여겨지는 투르판의 시설. 또 무언가 지어지고 있다.


    하긴 이 하나가 떨어져나가도 중국에는 어마어마한 타격이 된다. 게다가 이 지역은 중국 석유의 30%가 묻혀 있고 희토류의 보고이다.


    만일 도미노 현상으로 중요 자치구가 독립하면 중국은 X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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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