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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검으로 전한 여류시인 이옥봉의 러브레터
    작가의 고향 2022. 7. 23. 23:58

     

     

     

    최근 TV에서 방영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다시 보았다. 원래 볼 의도가 아니었고, 또 중간쯤부터 시청한 까닭에 끝까지 볼 것 같지 않았는데, 이야기의 힘에 끌려 나카야마 미호가 보내는 러브레터를 끝까지 읽게 됐다. 역시 이 러브 스토리의 압권은 라스트 신이다. 

     

     

     

     

    조선시대에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 못지않은 연서(戀書)가 있었다. 사모의 심정과 애절한 구애(求愛)를 담은 미사여구 늘어지는, 그래서 자칫 구질구질한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연서가 아니라 애뜻하면서도 임팩트 강한 칠언절구의 한시이다. '몽혼'(夢魂, 꿈속의 넋)이란 제목을 가진 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요즘의 안부를 묻습니다. 어떻게 지내시나요?

    달빛 내려앉은 창가에 그리움만 가득 합니다

    만일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될 것 같습니다


    近來安否問如何

    月到紗窓*妾恨多

    若使夢魂行有跡

    門前石路半成沙

     

    * 사창(紗窓) 은 창호지가 아닌, 얇고 성기게 짠 비단으로 바른 창문을 말한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옥봉(玉峰)이란 호와 이 씨 성을 가졌던 조선중기의 여인으로, 흔히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사람이다. 남존여비 조선사회에서의 여류시인이라니, 그 삶이 결코 녹녹지 않았을 것임이 쉬 짐작되는데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실린 일생의 단편은 허난설헌, 황진이보다 훨씬 더 기구하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趙希逸)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趙瑗)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대인께서는 어찌 그분을 아십니까? 제 부친입니다" 그 말에 원로대신은 대답 대신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더욱 놀라마지 않았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이었는데 어느 날 행방불명이 되었고 이후 생사를 모른 지가 4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부패한 흉측한 몰골이기에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관가에서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몸 여기저기를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쓰여 있었다. 읽어보니 하나같이 주옥같은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다. 또 이옥봉이란 여인도 허구의 인물이 아니니, 당대에도 칭송이 자자했던 시인이었다. 인조 때 명신이자 '한학(漢學) 4대가'로 일컬어지던 신흠(申欽)은 <청창연담>에서, "근래 규수의 작품으로는 옥봉 이 씨의 것이 제일이다.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이는 아직 없었다"며 상찬했고, <홍길동전>의 저자이며 허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은 "맑고 장엄하여 아녀자의 연약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집은 조선에서는 발간되지 않았고, 대신 중국에서는 꽤 알려져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의 중국 시집에 그녀의 시가 상당수 수록되어 전해지는데, 남편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에 전해지는 옥봉의 시 32수는 중국의 것을 옮겨 실은 듯하다.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교정의 운강대 각자돌 / 조원의 집 터에 세운 표석으로, 운강(雲江)은 조원의 호이다.

     

    그녀가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알려진 게 없다. 하지만 혼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얘기가 전하니, 옥천군수 이봉(李逢)의 서녀였던 옥봉은 당대의 촉망받는 사대부 조원을 너무도 사랑했고, 이에 그녀의 부친인 이봉이 직접 다리를 놓아 조원으로 하여금 소실로 거두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옥봉이 시인으로의 문명(文名)이 알려져 있던 시절이었던 바, 이것이 부담스러웠던 조원이 절필(絶筆)을 조건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혼인을 했다? 스토리가 좀 이상하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옥봉은 자신이 짝사랑하던 조원과 살게 되었는데, (첩이니 혼인이라 할 수도 없다) 어느 날 소도둑으로 몰린 산지기의 아내를 위해 '억울한 사람을 위해 읊은' 이른바 '위인송원'(爲人訟寃)의 시를 써 주게 된다. 

    세수하며 대야를 거울로 삼고

    머리 빗으며 물을 머릿기름으로 씁니다

    제가 직녀가 아닌데

    남편이 어찌 견우이겠습니까?

     

    洗面盆爲鏡 

    梳頭水作油  

    妾身非織女  

    郎豈是牽牛  

     

    "비록 가난하지만 깨끗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렇게 사는 부부이거늘 남편이 어찌 소도둑일 수 있겠는가" 하는 억울한 심경을 베 짜는 직녀와 소 모는 견우에 비유해 호소한 것이었다. 이 시를 본 목사는 산지기 남편을 풀어주고 조원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산지기의 아내가 이 같은 시를 썼을 리 없을 터, 대번에 이옥봉의 솜씨라 여긴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조원은 대로(大怒)했다. 그리하여 아녀자로서 국사에 관여한 일과, 혼전의 약속의 어긴 죄를 물어 소박을 놓는 바, 이상이 성혼(成婚)과 파경에 대한 스토리이다. 

     

    굳이 이해하려 들자면, 이에 상심한 옥봉이 자신의 시와 함께 바닷물에 뛰어들었고, 그 시신이 해류를 타고 중국 해안까지 흘러갔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녀가 이 일로 인해 자살했을 것 같지는 않고, 그에 앞서 그와 같이 답답한 자를 사랑했을 것 같지도 않다. 따라서 그녀의 죽음에는 당대의 사회상 속에 숨은 말 못할 애사(哀史)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이 뭔지는 알 수가 없다.

     

     

    경복고등학교 교정의 효자유지(孝子遺址) 비석
    효자유지와 운강대에 관한 안내문

     

    서울 종로구에 있는 경복고등학교 교정 내에는 조원의 집 터임을 알리는 운강대 표석과 그의 아들에 관한 일화를 새긴 비석이 있다. 옆에 세워진 안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터는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조원의 집 터이다. 조원에게는 네 아들 희정, 희철, 희일, 희진이 있었다. 희정과 희철은 임진왜란 때 왜군이 어머니를 해치려 하자 이를 막으려고 몸으로 대항하다가 왜군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후일, 이 둘은 목숨을 바쳐 효를 실천한 의로운 사람으로 여겨져 조원의 집 앞에 두 효자를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다. <동국여지비고>에 따르면 이 두 사람으로 인해 이곳을 쌍효자거리라 부른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오늘날의 종로구 효자동이 유래됐다고 한다. 

     

     

    정려문인 쌍홍문이 세워졌던 효자로 입구의 표석
    박 미용실 맞은편 성주빌라 앞에 쌍홍문 터 표석이 있다.

     

    말하자면 운강대 표석과 효자비는 효자동의 유래를 알리는 비석인 셈인데, 효자로 9길 입구에는 선조가 내렸다는 한 쌍의 정려문인 쌍홍문(雙紅門) 터에 관한 표석도 서 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이옥봉에 관해서는 일언반구가 없다. 그래서 이래저래 서러운 이옥봉으로 여겨지는 가운데 최근에는 '이옥봉의 전래 시 40수 중에서 그녀가 진짜로 지은 것은 17수에 불과하다'는 주제의 논문도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논문은 이옥봉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죽서루'(竹西樓)와 위의 '몽혼'까지도 그녀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옥봉에게도 허난설헌에게 일어났던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 (☞ '허난설헌 시 표절 문제 I, II' 따라서 좀 더 규명돼야 할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현대인이 사랑하는 최고의 한시로 꼽히는 (아마도 일부 한문교과서에 실린 까닭에) 이 명시(名詩)가 이도 저도 아닌 시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한편으로 걱정도 된다.

     

    이옥봉은 그녀의 아비가 옥천군수를 지낼 때 태어났으니 고향이 옥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옥천은 정지용과 이옥봉이라는 두 문호를 탄생시킨 고장이 되지만 이옥봉의 시비는 없는 듯하다. 오히려 강원도 영월군에서 그녀가 장릉(莊陵, 단종의 무덤)을 지나며 쓴 '영월도중(寧越道中)'이라는 시를 들어 시비 건립을 추진 중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쯤 비가 섰는지도 모르겠다. 자체에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오월의 긴 고개를 사흘에 걸려 넘는데

    애통한 노랫소리 노산군(단종 임금) 무덤가 구름에 걸려 끊겼네

    비천한 이 몸인즉 실은 이 왕조의 왕손인 여자

    이곳 소쩍새 울음소리 차마 견디기 힘들구나 *

     

    五月長干三日越 

    哀歌唱斷魯陵雲 
    妾身亦是王孫女 
    此地鵑聲不忍聞 

     

    나는 오히려 이 시가 그녀의 죽음을 부르지 않았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영월도중'은 노산군이 지은 '자규시'(子規詩, 소쩍새 시)의 화답과도 같은 시였기 때문이다.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외로운 몸, 짝 없는 그림자가 푸른 산속을 헤맨다

    밤마다 밤이 깊어가도 잠을 청할 수 없고

    해마다 한을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구나

    새소리 끊어진 새벽 고개에는 아스라한 흰 달빛이 비치고 

    피눈물 흘린 봄 골짜기에는 선홍빛 꽃잎 떨어진다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 수심 많은 이 사람의 귀만 홀로 밝은가


    一自怨禽出帝宮 
    孤身雙影碧山中  
    暇眠夜夜眠無假  
    窮限年年恨不窮  
    聲斷曉岑殘月白 
    血淚春谷落花紅  
    天聾尙未聞哀訴  
    何柰愁人耳獨聰  

     

     

    단종이 시를 읊었다는 영월관아 내의 자규루 / 단종은 영월로 유배와 이곳 관아에 잠시 머문 후
    이 숲길을 걸어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이곳 청령포에 유폐돼 죽는다.
    단종의 장릉 / 영월군청 제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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