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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용의 시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작가의 고향 2022. 7. 13. 22:30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위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는 시인 김상용의 1939년 작으로 과거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그래서 전원(田園) 속의 안분지족(安分知足)을 지향하는 삶, 너그럽게 자연을 즐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살고픈 마음(<위키백과> 해설) 등을 주제로 공부해야 했고, 특히 마지막 문장 ‘왜 사냐건/ 웃지요'에서는 격이 높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의 경지(시인 나태주의 해설)를 공감해야만 했다.
나태주는 더 나아가, 위 시를 우리나라 전원서정을 올곧게 다듬은 시로 평가하며 김소월의 서정 시와, 이육사의 「청포도」, 청록파의 세 시인 및 신석정, 장만영, 김동명, 박용래 같은 시인들과 격을 같이 했다.(이들은 모두 국어교과서에 시가 실렸던 시인이다) 그는 이 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남쪽은 해밝은 쪽이고 비가 오는 쪽이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방위이다. 이런 데서부터 작자는 순한 삶, 자연스런 삶, 전통적인 인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다음은 '밭'이다. 별로 넓은 밭이 아닌 모양이다. '한참 갈이'라 했으니 한나절쯤 갈면 되는 모양이다. '괭이로 파고' '호미'로는 '풀'을 매겠다 했다. 결코 왁자지껄한 생활이 아니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의 삶이다. 핵심은 그다음에 나온다. '구름이 꼬인다' 해도 결코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의 배포다. 더불어 '새'의 노래는 공짜로 듣겠다고 했다. 더욱 여유로움이다.
그런 다음, 작자는 슬그머니 청유형으로 말하고 있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이 얼마나 정답고 은근한 말투인가? 삶이란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고달프다. 고달픈 삶 가운데 이런 이웃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소중한 위로이겠는가.
'왜 사냐건/ 웃지요.' 아, 이건 시에서 가장 격이 높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인생에 대한 대답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더 있을까? 굳이 이 시를 두고 예이츠의 시나 이백의 「산중문답」같은 시(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그러나 생각을 달리하면 이 문장은 표절일 수 있다. 요즘도 방송이나 인터넷 기사로 심심찮게 다뤄지는 표절 논쟁을 보면 '악의의 표절'이냐, '존경을 담은 오마쥬'냐 하는 것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이 문장이 이백에 대한 오마쥬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표절 일수밖에..... 이백의 시구를 를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그대 왜 산속에 사느냐고 묻지만, 나 웃을 뿐 대답 않으나 내 마음 한가로워.
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
작가에 있어 가장 지탄받아야 할 일이 표절임은 두 말할 것도 없다.
김상용이 지탄받아야 할 점은 또 있으니, 그중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그의 친일행각이다. 1902년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난 그는 1921년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일본 릿교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윤동주 시인이 다닌 그 학교다) 릿교대학을 졸업한 그는 1928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 교수를 지냈는데, 재직 시절 그 유명한 에드거 앨런 포의 「애너벨 리」를 비롯해 예이츠, 찰스 램, 키이츠의 주옥같은 시편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했다.
아울러 꾸준한 문단활동도 이어갔으니, 1939년에 지은 위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1943년 2월 <문장(文章)> 2호에 득의의 작품으로 실었으며, 그해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시를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조선 청년들의 태평양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쓴 이 시는 제자인 노천명에게도 영향을 주었는지 그녀 역시 다음 해 같은 제목의 시를 <매일신보>에 발표한다. (☞ '누하동의 노천명과 건축학개론')
그리고 꼭 비난받아 마땅한 것은 아니나 그의 일생을 보면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담은 주제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화여전 문창숙 자살 사건이다. 당시 영문과 2학년이던 문창숙은 아르바이트로 기숙사 관리 일을 맡고 있었는데, 같은 기숙사생인 주덕순이 문창숙에게 맡긴 40원 중 20원이 사라지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20원이 지금의 얼마인지 정확히 모르겠으나 당시 한 달 기숙사비가 18원이었다고 한다)
이에 문창숙은 주덕순을 비롯한 동급생들로부터 범인으로 몰리게 되었지만 문 양은 한사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으니 기숙사 사감이던 박은혜 교수는 문 양을 범인으로 단정해 추궁했고, 마지막으로 그녀를 면담했던 문과학장 김상용은 도둑의 누명을 풀어주기를 포기한 채, "네가 했다고 시인해라. 돈은 내가 채워주겠다"는 말로 대못을 박았다. 때는 1937년 1월 19일, 대한(大寒) 추위와 눈보라가 사나운 날이었다
그날 결국 문 양은 다섯 통의 유서를 쓰고 학교 뒷산 소나무에 목을 매달았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밝힌 것이었는데, 이에 장안은 그와 같은 상황을 제공한 학교 당국과 김상용 교수의 처사를 질타하였고, 춘원 이광수를 비롯한 여러 문인들 역시 김상용의 비인도적인 처신을 개탄했다. (이광수는 신문에 "김상용은 교육자로서 글러먹은 인간이다.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해야 할 것이다"는 글로써 그를 대놓고 비난했다)
사실 이쯤 되면 김상용은 사표를 쓰고 교직에서 물러나는 게 맞다. 그리고 그의 시를 보자면, 이후로는 낙향하여 남으로 창을 낸 집을 짓고, 과거의 일에 대해서 묻는 자가 있다면 그저 씁쓸히 웃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끝까지 자리를 고수하였고,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모든 학교에서 영문학 강의를 금하게 되는 1943년까지 교직을 수행하였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와는 달리 그는 오히려 현실 참여적인 인물인 듯했으니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 참여하여 1946년 강원도 도지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자리가 실권이 전혀 없는 미군 장교의 통역관에 불과한 자리라는 것을 알고 사임한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 가 보스톤대학에서 영문학석사를 따 귀국하지만 곧 6.25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1951년 부산 피난시절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이와 같은 김상용의 일생을 보면 「남으로 창을 내겠소」에 담긴 주제와는 이율배반적이다. 이런 사람을 흔히 이중인격자라 부르는데, 이중인격의 친일파가 쓴 시가 교과서에 오래 머물며 허명을 떨친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를 허무주의로 평하는 글도 보았는데, 그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허무주의를 노래한 작품이라면 차라리 이해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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