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누하동의 노천명과 건축학개론
    작가의 고향 2022. 5. 5. 23:53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쳐다본다

     

    위의 시 노천명의 '사슴'은 과거 교과서에 실렸던 까닭에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잘 쓴 시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으나 노천명이라는 신여성의 이름값 때문인지 국어교과서에 오랫동안 올라 있었는데, 아마도 지금은 없어졌을 것이다. 앞서 부천 상동 시가(詩街)에 있던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시비가 2019년 철거되었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 '조지훈의 석문') 그곳에 있던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가 새겨진 시비도 그즈음 사라졌다. 그녀의 이름을 내건 노천명 문학상도 지금은 없어졌을 것 같다. 

     

     

    노천명(盧天命, 1912-1957)
    1940년대 초 일본 나라 여행 때의 노천명

     

    노천명은 평생 홀로 살다 1957년 재생 불능성 뇌빈혈이라는 여성성(?) 있는 병으로 사망해서 그런지 동정적인 여론이 있다. 사슴에 관한 여러 편의 시를 써서인지 '사슴의 시인'이라는 미명(美名)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1945 2월 발간한 시집 <창변(窓邊)>에 실린 9편의 친일 시를 보면 그 제목만으로도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나열하자면, 흰 비둘기를 날려라 / 진혼가 / 출정하는 동생에게 / 승전의 날 / 병정 / 창공에 빛나는 / 학병 / 천인침* / 아들의 편지 / 등이다.

     

    * 천인침(千人針, 센닌바리)은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군인의 무운장구를 위해 여러 사람이 정성을 모아 함께 기원하는 행위이다.  

     

     

    노천명의 두 번째 시집 <창변> / 이 표지 예쁜 시집에 위의 친일 시들이 실렸다.

     

    그밖에도,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 신익(神翼) - 마쓰이오장(松井伍長) 영전에 / 노래하자 이 날을 / 싱가폴 함락 / 부인 근로대 / 등의 친일 시가 있는데, '신익 - 마쓰이오장 영전에'는 조선인으로서 카미가제 특공대에 차출되었다가 최초로 죽은 마쓰이(한국이름 인재웅) 오장을 기리는 노래로 '마쓰이 오장(松井伍長) 송가(頌歌)'를 썼던 서정주보다 더 앞서 발표된 시이다. 그녀는 또 마쓰이 오장을 군신에 비교한 '군신송(軍神頌)'을 쓰기도 했다

     

    노천명의 시비가 철폐된 것은 서정주와 마찬가지로 친일을 했기 때문이며 그 정도가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静雄, 서정주의 창씨명)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위 시로써 예를 들자면 이렇다.  

     

      

    靑磁(청자)빛 하늘가에 
    보이지 않는 神翼(신익) 소리를 들으며
    이천만 동포의 피가 沸騰(비등)한다

    우리 지금 물끓 듯 감격함은
    松井伍長(마쓰이오장)의 壯(장)하고 嚴(엄)한 죽음이어라
    11월 29일!
    우리 松井伍長(마쓰이오장)이
    거룩한 죽음을 맞이 한 이날
    해와 달이 무심했으랴

    .....

    그 용감한 투혼에 보답하여

    조선의 청소년들아 뒤를 잇자

    .....

     

    1944년 12월, <매일신보>에 실린 노천명의 시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伍長(오장)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印氏(인씨)의 둘째 아들 스물 한 살 먹은 사내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神風特別攻擊隊員(카미가제 특별공격대원)
    靖國隊員(야스쿠니 대원)

    靖國隊員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에게로 왔느니
    우리 숨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英美(영국과 미국)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른 우리의 하늘이여

    .....
     

    1944년 12월 9일, <매일신보>에 실린 서정주의 시

     

     

    노천명은 또 친일작가 모윤숙에 비교되기도 한다.(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이화여전을 졸업했다) 모윤숙은 1941년 1월 <삼천리>에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지원병에게'를 발표한 것을 필두로, 1942년 <매일신보>에 '호산나 소남도'라는 전쟁 찬양시를 발표하고, 이후 어린 날개 - 히로오카(廣岡) 소년 학도병에게 / 아가야 너는 - 해군 기념일을 맞아 / 내 어머니 한 말씀에 / 등의 일본군국주의 찬양시를 발표하며 친일에 앞장섰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재빨리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및 박정희 군사정부에 빌붙어 영화를 누렸다. 1950년 발표한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는 그녀의 발빠른 행보를 보여주는 명시(名詩) 중의 하나이다.

     

    반면 이런 점에 있어 노천명은 좀 미련하였으니 모윤숙과 서정주처럼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붙지 못했고, 오히려 6.25전쟁 발발 후 미처 피난 가지 못했다가 좌파 문학인 모임인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부역하게 된다. 그로 인해 서울 수복 후 곧바로 체포되어 1950년 10월 20일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수감되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행히 다른 문인들의 구명활동으로 풀려났다.  

     

    굳이 변명을 달자면 노천명은 <매일신보> 기자를 지냈기에 의무적으로 친일 시를 써야 했던 어쩔 수 없던 면이 있다. 하지만 모윤숙의 친일은 다분히 자발적이었다. 성격면에서도 달랐다. 노천명은 천성인 내성적 성격이 유지되어 사교적이지 못했으니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밝힌 대로 '조그만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 버리는 서글픈 버릇'을 지니고 있었다.   

     

     

    서예지를 연상시키는 노천명의 사진

    '양자물리학' 제작발표회에서의 서예지/ 가스라이팅으로 화제가 됐던 그 친구이다.

     

    이 같은 성격은 해방 후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던 바, 서울 종로구 누하동 이모집에 방을 얻어 살며 '침실과 응접실 그리고 서재 중, 한 곳만이라도 분리됐으면 좋겠다'고 소원할 정도로 비좁은 한옥에서 답답하게 지냈다. 그녀의 꿈은 전망 좋은 창(窓)이 있는 양옥으로 이사하는 것이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좁은 방에서 빈혈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이 마흔여섯이었다.

     

    그녀가 살던 누하동 225-1 번지는 최근 한옥 게스트하우스가 새로 지어지며 옛 모습은 모두 실종되었다. 그래서 옛 자취는 바로 옆 226번지 한옥에 기대 유추할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라면 다행이랄까, 근방의 누하동 한옥(홍종문 가옥)에서 2012년, 영화 '건축학개론'이 촬영되어 옛 서촌(西村)의 풍경을 더듬을 수 있게 한다.

     

    누하동은 옆 동네 체부동과 더불어 조선시대 말기 중인계급이 살던 서촌의 고만고만한 한옥이 운집된 곳으로, '건축학개론'의 내용처럼 재개발로 인해 옛 집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누하동·체부동의 골목 139m가 서울시 한옥보존지구 지정으로 보존될 수 있었다.

     

    노천명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군이지만 7살 때 이곳 서촌으로 왔고, (이후 창신동으로 이사 가기도 했으나) 해방 후 이곳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미혼이므로 자식이 없었던 바, 그녀의 흔적을 따로 보전할 사람이 없었으니  누하동 225-1 번지가 사라지며 노천명 역시 사라졌다. 노천명은 이제 자신의 소원대로 이름 없는 여인이 된 듯하다.   

     

     

    노천명이 살던 집은 이화한옥이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됐다. / 벽돌 담 옆 나무 창살 한옥이 노천명이 살던 누하동 225-1 번지 집이다.
    헐리기 전의 누하동 225-1 번지 집
    노천명이 살던 집의 바로 옆집
    정면에서 찍은 사진
    ' 건축학개론'에서 같은 대학에 다니던 같은 동네의 스무살의 청춘들은 '동네 여행'이라는 리포트 숙제를 받는다. 그리고 우연히 발견한 빈 집.....
    이 집은 두 사람의 첫사랑의 요람이 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첫사랑답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후 국민 첫사랑으로 등극한 수지 (이상 여기저기서 가져온 사진 / 저작권 문제가 있으면 내리겠음)
    그 길의 옛 모습도 이제는 사라져간다.

     

    노천명의 또 다른 대표작 「부인근로대」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데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