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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강 정철의 장진주사
    작가의 고향 2022. 6. 12. 14:47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나무 가지 꺾어 잔 수 세어가며

    끊임없이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고 가든

    아름답게 꾸민 상여 뒤를

    많은 사람들이 울며 뒤따르든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숲 무덤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굵은 눈, 소슬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까?

    하물며 원숭이가 무덤 위에서 휘파람 불 때

    뉘우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고양시 신원동의 송강 정철 시비 / 위 사설시조 <장진주사>를 지은 곳이 신원동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은 국어교과서에 유명한 가사 '관동별곡'이 실린 관계로, 그리고 이 가사문학은 어느 시험이건 빈출도가 높았던 관계로 모르는 이가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 외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도 적어도 제목만큼은 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작품이다. 그는 이 같은 가사뿐 아니라 여러 장르의 많은 문학 작품을 남겼으니 한시(漢詩)는 758수, 시조는 107수를 지었다. 이렇게 보자면 그는 시인이라 불러 어색함이 없다. 아니 마땅히 그렇게 불려야 될 듯하지만, 기실 문학보다 깊은 족적을 남긴 것은 정치판이었다.

     

    즉 그는 관료이자 정치가였으니 서인의 영수(領首)로서 서인을 대표하며 오랫동안 동인과 싸웠다. 앞서 '구암 허준과 송강 정철에 관한 일화'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당시 동인의 거두는 허엽(許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아버지)이었다. 그때의 동인과 서인은 요즘의 국힘과 민주당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정말로 박터지게 싸웠으니 그 당쟁 앞에서는 국가의 안위마저 무시되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에 앞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동인의 김성일과 서인의 황윤길이 임금에게 서로 상반된 보고서를 올림으로써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7년전란에 시달리게 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송강 정철에 관한 또 한 가지 오해는 그의 고향이 전남 담양 창평(昌平)쯤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가 그곳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했고, 그곳에서 '관동별곡'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의 가사를 썼으며,(그래서 담양에  송강가사문학관이 있다)  또 송강정(松江亭)과 식영정(息影亭) 같은 정철의 자취가 남은 아취 있는 정자들을 볼 수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곳은 의외로 서울의 양반가 서촌(西村)으로, 요즘으로 치자면 강남 1번지에서 태어난 금수저급의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양반가였고, 큰 누나가 인종(仁宗)의 후궁인 귀인(貴人)이었으며, 둘째 누나가 왕족인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손자)의 부인이 되었기에 어릴 때부터 궁궐에 자주 드나들면서 왕세자인 경원대군(훗날의 명종)과 벗하며 지냈다. 하지만 1545년(인종 1) 을사사화로 맏형이 죽고 아버지는 유배를 갔으며, 매부 계림군이 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비운 속에 아버지의 은거지인 담양 창평에 이거하여 살게 된다. (그는 이후 2차례에 걸쳐 그곳으로 유배 감으로써 담양과의 인연을 잇는다)   

     

    그렇지만 정철은 향후 화려하게 한양으로 복귀하게 되니 1561년(명종 16) 진사과에 1등 5위로 급제하고, 이듬해 27살 때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며 당당히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세상이 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니 국왕 명종은 어릴 적 동무인 정철의 급제 소식을 듣고 축하연까지 베풀어주었다. 당시 입격자 명단을 보던 명종이 정철의 이름을 발견하고 동명이인 여부를 확인한 뒤, 내 어릴 적 동무가 드디어 출사하게 되었구나 하며 기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서울 청운동 송강 정철 탄생지 표석
    표석 위치에서 본 백악산

     

    그는 명종~선조 때를 거치며 각도 관찰사를 비롯해 성균관 수찬, 사헌부 교리, 이조정랑, 좌의정, 우의정 등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입지를 다졌는데, 자신이 당한 바 있어서인지 정치가로서는 매우 매몰찼으며 잔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대표적으로, 정철이 위관(委官, 재판관)이 되었던 이른바 정여립  역모사건  때는 1천여 명의 동인 사람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는데, 그전의 사화, 즉 무오 갑자·기묘·을사사화에서 죽은 사람이 500여 명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저승사자가 따로 없던 셈이다.

     

    하지만 자신 또한 부침을 거듭했으니 담양 명천 진주 강계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고, 서울 인근인 고향시 신원동에는 탄핵을 받아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그가 10년간 은거했던 장소도 숨어 있다. (숨어 있다는 표현인즉 찾기 힘들다는 의미이다. 어떠한 표지판도 없어서 서울 원당 간 도로에서 찾으면 근방을 헤매게 되니 아래 훈민가 시비에서 보이는 사잇길을 주목하시길)

     

    이름하여 송강마을로 그는 이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다. 송강마을이라 하지만 이곳에 그의 흔적이 따로 남은 것은 없고 마을 또한 형성돼 있지 않다. 다만 이곳 저수지(송강보) 인근에는 그의 부모 묘소가 있으며, 또 그의 연인이었던 기생 강아의 묘를 찾을 수 있다. 정철은 술에 취해 국사를 돌본다는 동인의 탄핵을 받아 57세의 나이에 강화로 유배 갔다가 그곳에서 숨졌다. 이후 그 또한 이곳 고양 신원리에 묻혔으나 사후 72년이 지난 1665년(현종 6) 당대 서인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이 충청도 진천에 어은골이라는 명당을 발견했다며 이장시켰다. (진천과 정철은 아무 연고도 없었음에도)

     

     

    송강마을 부근의 훈민가(訓民歌) 시비

     

    송시열의 뜬금없는 행동으로 인해 (정철의 후손인 정포와 상의해 이장했다고는 하나 정포가 송시열의 말을 거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송강마을 뒷산에는 그의 무덤 자리만 남아 있다. 송강마을은 공릉천4교와 신원교 사이에 위치한 폐천부지를 활용하여 조성한 휴식공간으로, 술을 좋아했던 정철이 시절을 탓하며 통음을 즐겼을 법한 장소이다.(그는 이곳 신원리에서 서두에 실은 술 권하는 노래 '장진주사'를 지었다) 우연찮게도 그의 매부 계림군 이유의 무덤도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고양시 신원동의 계림군 이유 묘(가운데) / 왕족 이유는 을사사화 때 외숙부 윤임의 역모에 연루돼 처형되었다.
    고양시 신원동에 조성된 송강정
    송강마을 정철 시조비

     

    송강마을에는 그의 시조가 새겨진 돌이 고어(古語) 그대로써 여러 개 세워져 있다. 그중 '어버이 살아계실 때 섬기기를 다 하여라....'는 잘 알려진 시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이해하기 힘들다. 이해도 안 되는 그런 시조비를 왜 세워놓았는지 모르겠는데, 그중에는 고어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근방 지형을 잘 알지 못하면 전혀 이해하기 힘든 시조가 새겨진 돌도 있다.(위 사진) 내용을 풀어쓰면 아래와 같다. 

     

    새원 원주 되어 도롱 삿갓 메고 이고

    가느다란 비, 비껴부는 바람 속에 일간 죽 빗기 들어

    홍료화 백반주저에 오명가명 하노라.

     

    여기서 새원은 임진왜란 후 새로 지어진 역원(驛院)인 고양시 벽제관을 말하는 것이고, 원주(院主)는 그곳의 우두머리를 말하는데, 정철이 벽제관의 원주 같은 미관말직을 지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신원동에 칩거할 무렵에도 우두머리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듯 당시의 여러 시조에서 '새원 원주'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런 걸 보면 그는 천상 뼈속까지 벼슬아치인 듯했는데, 위 시조는 실비 오는 날 삿갓에 도롱이를 걸친 새원의 원주가 비스듬히 낚시대를 걸쳐메고 붉은 여귀꽃 우거진 공릉천 모래천변을 왔다 갔다 하는 근황을 그렸다. 

     

     

    송강마을 공릉천
    고양시 고양동의 벽제관 터 / 중국사신 접대가 주업무였던 조선시대 역원이다.
    입체 그림으로써 복원된 벽제관 / 한국전쟁 이전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이후 퇴락하여 사라졌다.
    신원동 벽제관 옛 터 표석 / 본래의 벽제관은 고양시 고읍치(古邑治) 자리에 있었다.
    부근에 추억의 서울 교외선 선로도 위치한다. 당연히 기차는 다니지 않는다.
    국립청주박물관의 선조 하사 은잔
    임금 선조는 술 때문에 공격받는 정철을 딱하게 여겨 소주잔과 같은 작은 은잔을 주면서 "앞으로는 하루에 이 잔으로 딱 석 잔만 마시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양이 차지 않았던 정철이 은잔을 사발처럼 널찍하게 두드려 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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