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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형도의 '빈 집'
    작가의 고향 2022. 5. 2. 05:33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 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가 살던 광명시 소하리 옛집 / 아쉽게도 지금은 보존돼 있지 않다. 앞쪽 창문 있는 곳이 기형도의 방이었다고 한다.

     

    기형도 시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 1989년 3월 7일이니 벌써 33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머물러, 질투는 나의 힘 / 안개 / 노을 / 엄마 걱정 / 고독의 깊이 등은 유튜브 시낭송으로서 엄청난 조회수를 보인다. 장미빛 인생 / 봄날은 간다 / 빈집 / 질투는 나의 힘 등은 영화로 다시 태어났으며, 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입>은 지금도 잘 팔린다. 지금껏 대한민국에 이런 시인은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시집은 2007년도 판인데 1989년 초판이 발행된 이후 무려 39쇄가 인쇄됐다. 모르긴 해도 지금의 발행부수는 그 배수는 될 것이고 50만부 쯤은 팔렸을 것 같다. 이런 예는 전에도 없고 필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전무후무한 일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그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하지만, 사실 이유를 분석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의 시를 읽으면 된다. 유튜브 시낭송 중에서는 그의 시에 대한 해설을 담은 것도 있고 나름대로 분석한 것도 있지만, 시험 문제가 아닌 이상 불필요한 수고이다. 누구의 말처럼 그저 감상하고 잠시 미치면 되는 것이다.  

     

     

    광명시 소하동 기형도문화공원 내의 '빈집' 시비
    '위험한 가계 ;1969'의 일부를 새긴 시비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의 일부를 새긴 시비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전문(全文)

     

     

    '질투는 나의 힘'의 일부를 새긴 시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전문(全文)

     

      

    기형도가 숨진 옛 파고다극장 건물

     

    지금은 복합상영관에 밀려 사라졌거나 멀티플렉스로 탈바꿈했지만, 과거 종로통에는 피카디리와 단성사극장이 마주 보고 있었고 낙원상가 위에는 허리우드, 청계천에는 서울극장, 을지로에는 국도극장, 충무로에는 스카라극장, 퇴계로에는 대한극장, 명동 입구에는 중앙극장이 포진해 있었다.

     

    이상은 이른바 개봉관으로 문자 그대로 처음으로 개봉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곳이었다. 기형도가 그런 곳에서 죽었다면 별 말이 없었을 것을, 그는 그와 같은 개봉관이 아니고 을지로 입구의 계림극장 같은 재개봉관도 아닌, 거의 삼봉관 수준의, 그래서 간판 그림 솜씨도 형편없던 낙원상가 옆 파고다극장에서 숨졌다. 

     

     

    1958년 개관한 퇴계로 대한극장 / 영화관의 설계는 '20세기 폭스'사가 하였다니 놀랍다. (한국영화 DB 사진)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 파고다 극장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많이 모이던 곳이었다. 지금은 게이라 부르고, 점잖게 성소수자로도 부르지만 당시는 호모라고 불려지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반드시 그러한 사람만 모이는 것은 아니었으니 나처럼 멋모르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술꾼들이 술기운이 덜 채웠졌다 싶으면 귀가 길에 동네 포장마차에 들러 한 잔을 더 걸치듯이, 모처럼 마음 먹고 간 개봉관 상영 영화가 흡족지 않았을 경우, 재개봉관이나 동네 삼봉관에 들러 갈증을 달래고 가는 경우가 영화광들의 기억에 잔존하리라 믿는다.

     

    그때 어둠 속에서 누군가 예의 바른 목소리로 불 좀 빌려달라고 했다. 개봉관에서는 어쨌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 삼류 영화관에서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했다. 기형도 시인의 주검 곁에서도 술병이 발견되었다 하니 그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담배불을 빌리던 나보다 훨씬 연상으로 보여지던 사람이 곧 본론을 꺼냈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남자의 손을 황급히 쳐내고 일어섰는데 그때 심장마비 걸리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남자는 끝까지 예의가 발랐으니 화를 내지도 않고 작은 목소리로 "미안합니다"라고 말했다. 기형도는 어느 쪽이었을까....?  

      

     

    광명시 소하동 기형도문학관
    기형도문학관 입구의 기형도(1960-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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