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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훈의 석문(石門)
    작가의 고향 2022. 4. 11. 23:59

     

    당신의 손끝만 스쳐도 소리 없이 열릴 돌문이 있습니다. 뭇사람이 조바심치나 굳이 닫힌 이 돌문 안에는, 석벽 난간 열두 층계 위에 이제 검푸른 이끼가 앉았습니다.

    당신이 오시는 날까지는, 길이 꺼지지 않을 촛불 한 자루도 간직하였습니다. 이는 당신의 그리운 얼굴이 이 희미한 불 앞에 어려울 때까지는, 천 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저의 슬픈 영혼의 모습입니다.

    길숨한 속눈썹에 항시 어리운 이 두어 방울 이슬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남긴 푸른 도포 자락으로 이 눈썹을 씻으랍니까? 두 볼은 옛날 그대로 복사꽃이지만, 한숨에 절로 입술이 푸르러 감을 어찌합니까?

    몇 만리 굽이치는 강물을 건너와 당신의 따슨 손길이 저의 목덜미를 어루만질 때, 그 때야 저는 자취도 없이 한 줌 티끌로 사라지겠습니다. 어두운 밤 하늘 허공 중천에 바람처럼 사라지는 저의 옷자락은, 눈물 어린 눈이 아니고는 보이지 못하오리다.

    여기 돌문이 있습니다. 원한도 사무칠 양이면 지극한 정성에 열리지 않는 돌문이 있습니다. 당신이 오셔서 다시 천년토록 앉아 기다리라고, 슬픈 비바람에 낡아 가는 돌문이 있습니다.

     

     

    인왕산 천향암 제1석문
    뒤에 본 석문
    인왕산 천향암 제2석문 / 하지만 더는 갈 수 없다.
    천향암에서 본 서울 서촌
    성북동 조지훈 집터 표석 / 살던 집은 헐리고 5층 건물이 섰다.

     

    올해 눈이 처음 내린 날 성북동 길상사에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조지훈의 집터 표석을 발견했다. 그가 30여 년간 살며 가장 많은 시작(詩作) 활동을 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고향은 서울이 아닌 경북 영양으로 이문열의 소설에서 자주 배경으로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다. 영양 일월면 주실마을에는 그의 생가가 있고 석보면 두들마을에는 이문열의 생가가 있다. 복원된 것이긴 하지만 주실마을 조지훈 생가는 생각보다 크다. 그리고 문학관도 크고, 조지훈 시공원에는 동상까지 서 있다.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경북 영양은 내륙 오지로 전국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곳이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이 꽤 많이 눈에 띄는데 알고 보니 모두 길손이다. 아마도 문도(文徒)로 여겨진다. 조지훈, 이문열 외 시인 오일도(吳一島)를 배출한 고장인 까닭에. 영양 조지훈 생가 앞 안내판에는 '방우산장(放牛山莊)'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어 무슨 뜻인가 내내 궁금했는데 '소를 키우는 집'이라는 의미라 한다. 이것을 성북동 조지훈 집터 근처에 조성된 작고 예쁜 기념물(모뉴먼트보다는 크고 공원보다는 작은) 안내판으로부터 알게 되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

     

    시인 조지훈은 자신이 기거한 모든 집을 「방우산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방우 산장이란 '마음속에 소를 한 마리 키우면 직접 키우지 않아도 키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방우즉목우(放牛即牧牛)'의 사상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지훈의 사상을 담아 만들어진 「시인의 방 - 방우산장」은 조지훈을 기념하는 공간이 아닌 , 그가 바라보았던 삶의 공간이자 이것을 찾는 시민들의 창조성이 만나는 열린 공간입니다.  

     

     

    경북 영양군 '방우산장'
    서울 성북동 '시인의 집 방우산장'

     

    내가 아는 한 조지훈은 시인이자 문필가이자 지사(志士)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항상 민중 편에 서서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애쓴 진정한 지성인'이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현대판 지조 있는 선비'로도 평하는데, 일제 치하에서도, 이승만 독재정권 하에서도, 그리고 이어진 군사정권 아래서도 꿋꿋이 지사의 길을 걸었다. 젊은 시절 그는 아버지 조헌영에 이어 조선어학회에 가입했고 우리 말 <큰 사전>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그래서 이른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고초도 치렀다. 

     

    그리고 그는 독립투사의 딸과 결혼했다. (그의 장인은 영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규이다) 이렇듯 뼈속까지 애국자일 법한 조지훈이 친일파 미당 서정주를 친구로 두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서정주는 자신의 문재(文材)를 오직 일신 영달에만 쏟아부은 자로, 젊어서는 일본 군국주의를 찬양하며 징용을 권하는 시를 썼으며, 해방 후에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빌붙었고, 말년에는 전두환 칭송시까지 쓴 자 아닌가? 그런 자를 친구로 두었다니 믿어지지 않는 반면, 인품에 또한 놀란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조지훈의 '승무'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가 모두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었는데, 지금도 그 국화가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 시가 새겨졌던 부천시 상동의 서정주 시비는 2019년 철거됐고, 서울 금천구 시흥동에 있던 '금천예찬'이란 시가 새겨졌던 시비 역시 작년 여름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철거됐다. 반면 그의 고향 고창의 문학관과 시비 등은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살아남아 있는데, 그 밖에도 살아남은 곳은 꽤 있다. 모르긴 해도 우리나라 시비 중 그자의 것이 물량으로는 갑(甲) 아닐까 한다.  

     

    앞서 '명시(名詩) 감상 - 괴물'에서 노벨 문학상 후보에 까진 오른 괴물을 쓰러뜨린 최영미 시인의 '괴물'이란 시를 적으며, 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소개한 적이 있다. 문득 그 시가 선운사 입구에 세워진 미당의 시비를 보고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영미의 '선운사에서'

     

    위의 조지훈의 시 '석문'은 그의 고향인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쓴 시로, 그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 일월산 아랫마을에 황씨라는 처녀가 살고 있었다. 동네 총각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그중의 한 사내와 결혼했다. 그날 사내는 초야(初夜)를 치르기 전 뒷간에 다녀오다 문득 방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대나무 그림자였음에도 사내는 동네 연적 중의 한 명이 자신을 죽이려 숨어 있는 줄 착각하고 그대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니, 기실 사내는 그 신부를 얻을 자격도 없는 놈이었다. 

     

    하지만 신부는 마냥 기다렸다. 심지어 원삼 족두리도 벗지 않은 채..... 그리고 그대로 죽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녀를 기려 사당을 지은 것인데, 예전 이 전설을 다룬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TV 극화에서는 조금 달랐다. 거기서는 신랑이 몇십 년 후 늙어서 그 집을 찾는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문을 여는데 놀랍게도 신부는 원삼 족두리 모습 그대로 앉아 있었다. 놀라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한 남자가 뭐라고 말을 걸며 신부에게 다가가 족두리를 벗기려는 순간..... 어찌 되었을까? 귀신으로 변해 남자를 확 물었을까?

     

    그랬으면 차라리 좋았으련만, 신부는 바로 그 순간 그대로 재가 되어 버렸다. 슬프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미안할 따름이다.  

     

     

    영양 황씨 사당
    이미지 사진

    조지훈 시비 / 2006년, 그가 재직했던 고려대 교정에 대표작 '승무'를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 <위키피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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