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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
    작가의 고향 2022. 3. 29. 23:58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줄 시를 적어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가 다닌 동지사대학 교정에 세워진 시비 / 그의 '서시(序詩)'가 한국어와 일본어로 새겨져 있다.
    일본 교토 동지사(洞志社)대학 채플건물 앞 안내문 / 윤동주 70주기 시비 건립 20주년 행사 안내문이다.
    윤동주의 시비 앞에는 헌화와 그를 기리는 시작(詩作) 노트가 끊이지 않고 놓인다.

     

    윤동주는 2020년 현대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시는 시인 1위로 꼽혔다. 그래서 윤동주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그에 대해서는 누구나 대부분 알고 있으며, 그의 시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공감을 하든 대부분 공감한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받는 듯한데, 그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일화도 있다. 

     

    오래전 어떤 사건에 연루된 지인 중의 한 명이 주거가 불안하여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구속된 일이 있다. 단지 이혼을 하고 누나 집에 살고 있다는 것이 죄라면 죄였다. 게다가 구치소의 이른바 방짱은 조폭 행동대장급의 터프한(?) 자로 행동이 거칠기 짝이 없었다. 눈치를 보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던 지인은 어느날 무료한 김에 위의 윤동주 시 '쉽게 쓰여진 시'를 끄적였다. 시를 다 외우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조금은 엉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을 본 조폭 방짱이 그 시를 잠시 읽더니, 당신이 쓴 거냐고 묻더란다. 

     

    "뭐 그건 아니고....." 지인은 이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가 윤동주 작이라고 확실히 밝히지 못한 것은 완벽히 옮기지 못한 데 대한 죄스러움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그 조폭은 그때부터는 대접이 달라졌으며, 주위 사람들에게도 시인이니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고성의 멘트를 날리고, 구치소 생활의 요령과 재판에 임하는 요령 등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지인은, 아무튼 윤동주 시인 덕에 편히 구치소 생활을 하고, 편히 재판을 받고 나올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윤동주의 시가 그 조폭에게도 울림을 주었다는 얘기다. 더욱이 그 시는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교토 다카다노바바(高田馬場)역 근처 하숙집 육첩방(다다미 6장을 붙인 방)에서 어느 날의 소회를 읊은 시로 조폭의 생활과는 전혀 거리가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 시로부터 큰 감동을 느낀 것이다. 윤동주가 '쉽게 쓰여진 시'를 쓴 때는 1942년 6월로 도쿄 릿교(立敎)대학 영문과에서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편입을 한 후로 그때까지는 나름 학업에 열중이던 시절이었다. 

     

    * 릿교대학을 다니던 그가 먼 교토까지 와 도시샤대학으로 전학을 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그때 오랜 친구이자 사촌지간이며 같이 유학을 온 송몽규가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던 바, 그것이 교토로의 유인 요인이 된 것은 맞다. 송몽규는 중학교 졸업 후 중국 남경으로 가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서 수학한 적이 있는데, 한인반은 윤봉길 의사가 상해 의거를 일으킨 후 이에 감격한 장개석이 임시정부 김구를 후원하여 조직된 광복군 양성단체였다. 그리고 송몽규의 숙부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에 속한 독립군으로서 일본군과 싸우다 1920년 전사하였던 바, 그러한 내력을 지닌 활동력이 강한 송몽규가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도쿄의 윤동주를 불러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윤동주와 송몽규 / 아래 가운데가 송몽규이다.

     

    그러던 그가 1943년 7월 14일, 귀국을 앞두고 일본 경찰에 전격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죄목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주변의 불령선인(질이 나쁜 조선인)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윤동주는 교토 지방재판소에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재판관의 판결문도 구속 사유와 비슷했으니, '남다른 민족의식으로 내선(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불만을 지녔으며 그로 인해 조선 독립의 실현시키려는 망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같은 형을 받은 송몽규와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감 1년 후인 1945년 2월 16일, 만 27살의 나이로 숨졌다. 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때였다. 운동을 즐기던 건강체의 젊은이가 갑자기 죽은 데 대해서는 일본군에 의한 생체실험설이 끊이지 않는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갔던 당숙 윤영춘이 거의 빈사 상태의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자신이 주사를 맞고 이 모양이 되었으며 윤동주도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송몽규 역시 한 달 후에 죽었다. 

     

    그의 사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간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할 때 출간하려 했으나 이양하 교수가 '슬픈 족속' '십자가' 등의 시가 검열에 통과될 리 없을 터이니 유보하자고 해 출간하지 못했던 시집이었다. 말하자면 윤동주는 살아생전 자신의 시집 발간을 보지 못한 것인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그야말로 주옥과 같은 19편의 시는 대신 세상에 울림을 주었다. 1948년 출간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쉽게 쓰여진 시'를 비롯해 그가 교토 유학 시절 연희전문에 다닐 때의 단짝 친구인 강처중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있던 5편의 시가 포함되었다.  

     

     

    종로구 누상동 윤동주 하숙집 터
    안내문 내용 : 서울시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이곳에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1941년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이 살던 이 집에서 하숙 생활을 하였습니다.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또 다른 고향> 등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그의 대표작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집의 원형은 남아 있지 않지만 청운동 윤동주 문학관에서 시인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주변 풍경 / 멀리 인왕산이 보인다.
    헐리기 전 70년대 윤동주 하숙집 / 오른쪽으로 철거 전의 옥인시범아파트가 보인다.
    바로 위쪽에 동네 분위기를 살려주는 고서점이 있다. (물론 윤동주가 살던 때는 없었겠지만)
    1948년 1월 30일 간행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연길 용정시의 윤동주 무덤
    용정시 윤동주 생가 /오마이뉴스 사진

     

    윤동주의 주검은 고향인 북간도로 반송돼 현 용정(龍井)시에 묻혔으며 '시인 윤동주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송몽규도 지척에 묻혔으며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두 사람은 1917년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다. 송몽규가 9월생, 윤동주는 12월 30일 생이다. 윤동주의 작은고모가 송몽규의 어머니로, 그들 한인(韓人)이 모여 살던 명동촌은 오늘날의 연변조선족자치구에 속해 있다.

     

    까닭에 그곳 교과서에도 윤동주의 시가 실려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는 한·중·일 교과서에 모두 등장하는 유일한 시인인 셈이다. 하지만 확인하기는 힘들고, 윤동주의 고향을 찾아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다만 예전에 중국이 좀 만만하던 시절 그곳에서 옮겨온 명동촌 우물이 청운동 윤동주문학관 내에 전시돼 있어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다'는 그의 시 '자화상'에의 연상이 가능하다. 그의 시 '별 헤는 밤'에 나오는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도 이곳에 모였을 것이다.

     

     

    윤동주문학관 내의 우물

     

    그리고 청운동의 폐기된 상수도 펌프장을 리모델링하여 멋진 기념관을 꾸민 윤동주문학관 뒤편 언덕, 이른바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위에 있는 외딴 소나무도 가곡 '선구자' 속의 일송정을 떠올리게 하는데, 애써 요란스럽기 않게 꾸민 이 고즈넉한 장소에서 문득, 요즘은 힘이 생긴 중국측에서 주장하는 '윤동주도 중국인'이라는 헛소리가 떠올라 기분이 언짢아진다.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 내부 / A+PLATFORM 사진
    윤동주문학관 내부 / PACESTUDIO 사진
    윤동주 시인의 언덕
    서시가 새겨진 바위
    시인의 언덕에서 본 백악산
    시인의 언덕에서 본 북한산
    시인의 언덕에서 본 자하문
    시인의 언덕에서 본 인왕산 치마바위
    그 언저리에서 본 서울
    그 언저리에서 본 서울의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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