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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작가의 고향 2022. 3. 27. 23:08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 메어 우는데

     

     

    망우리역사문화공원 박인환 묘지 입구 표석에는 그의 시 '목마와 숙녀'의 일부가 쓰여 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 합강정 휴게소 앞 시비에는 '세월이 가면'이 새겨져 있다. 박인환에 대해서는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두 편의 시는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아마도 50대 이상이면) 또한 이 두 편의 시만큼 애송된 시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살아생전 70여 편의 시를 썼지만 죽어서는 이 두 편으로 족했는데, 박인희의 시 낭송과 노랫말이 한몫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50대 이상은 누구나 그녀의 낭송과 노래에 젖어 살았다. 그 낭송과 노래를 들으면 괜히 센티멘탈해지면서도 기분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평론가는 "'목마와 숙녀'는 대체 뭔 말을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고 내용도 없고 그저 공허한 시"라고 혹평했는데, 아무려면 어떠랴. 그 시를 읽거나 혹은 들으면, 목마의 방울 소리가 들리고 버지니어 울프의 구슬픈 울음이 들렸으니 그것으로 성공한 시(詩)가 아닌가? 물론 그때의 버지니어 울프는 늑대였지만. 나중에 (늑대로 착각한) 민망함 속에 읽어본 그의 작품 '등대로'(To the Lighthouse)도 퍽 공허했다. 

     

     

    박인환(朴仁煥 1926-1956)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14) / 영국의 모더니즘 작가로 문필가와 여성운동가로서의 이름을 함께 떨쳤으나 우울증이 심화돼 우즈 강에 투신했다.
    박인환 무덤 입구 표석
    박인환의 유택 / 3월 20일 있었던 작고 66주기 추모식 현수막이 걸려 있다.

     

    박인환은 1926년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에서 출생했다. 서울 최고 명문학교인 경성제일고보를 다녔으나 짤리고,(극장 출입) 한성중학교 · 명신중학교를 거쳐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중퇴했다.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마리서사'*라는 책방을 열기도 하고 경향신문 기자를 지내기도 했는데, 시인으로서는 1946년 '거리'를 발표해 등단한 것이 시작이다. 1949년 앞서 말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김수영 등과 함께 발간하며 모더니즘의 기수로서의 존재를 알렸다. 1955년 <박인환 선시집>을 간행했다. 

     

    * '마리서사'의 상호는 기욤의 애인이었던 화가 마리 로랑생의 이름에서 발려왔다고 한다. 박인환이 영화광이자 화가 지망생이었음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그는 57편의 영화평론을 썼다. 그리고 기욤의 '미라보 다리'만큼 한국인에게 회자된 서양 시도 드물 터, 마리서사의 유래는 그것이 맞을 듯하다. ( ☞ 기욤의 '미라보 다리') 마리서사에는 서양의 문학서적 (대부분 일본어 번역판이긴 했겠지만)을 비롯한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책들이 구비돼 있어 자연히 지식인의 아지트가 되었다고 한다.   

     

     

    인제 박인환문학관에 재현된 '마리서사'
    마리서사 앞에선 박인환(오른쪽) / 박인환은 오장환 시인이 운영하던 낙원동 남만서방이라는 서점을 인수받아 마리서사로 이름을 바꾼다.
    마리서사는 종로2가 송해길 입구의 대한보청기 자리에 있었거나
    그 옆 금은방 자리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1911년 저 유명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파리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는데, 그때 애인인 화가 마리 로랑생이 찾아와 결별을 선언한다. 다행히도 기욤은 무혐의로 풀려나지만 실연의 아픔은 풀어지지 않았으니, 친구 마르크 샤갈의 아뜰리에를 찾아 밤새 통음한다. 아래의 '미라보 다리'는 그가 해뜰 무렵 미라보 다리를 건너오며 지은 시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사랑은 지나가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가버리네

    이처럼 인생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흘러간 시간도

    옛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 기욤 아폴리네르, 「미라보 다리」 전문 ―


     

    박인환과 < 박인환 선시집>

     

    그도 김수영만큼이나 술을 좋아했다. 또 피차 궁핍했음에도 김수영처럼 쩨쩨하지 않아 인기가 좋았는데, 별명도 걸맞게 '명동백작'이었다. 하지만 이상(李箱)처럼 지나친 면이 있었으니 1956년 이상의 기일(忌日) 때 4일 동안 폭음한 것이 급성 알콜성 심장마비로 이어져 3월 20일 자택에서 사망했다. 서른을 채 못 채운 시점이었다. 박인환이 죽었을 때 김수영은 문상을 가지 않았다. 김수영 본인의 말대로 애증이 교차하는 사이였는데 그때는 증오가 많았을 때 같다. 썩 잘생긴 촌놈에 대한 서울놈의 콤플렉스였을까? 

     

     

    인제 박인환문학관에 재현된 단골 술집 '유명옥' / 김수영의 모친이 운영하던 충무로 4가의 빈대떡집으로 골목 끝에 훤칠한 키의 박인환이 서 있다. (이데일리 사진)
    광화문 교보빌딩 뒤 박인환 집터 표석 / 그는 이곳에 있던 ㄷ자 한옥에서 죽었다.
    그의 집앞으로는 삼청동계곡에서 발원한 중학천 맑은 냇물이 흘렀다 / 사진은 복원된 중학천
    근방의 한옥집 / 박인환이 죽은 광화문 처가는 (처가살이를 했으므로) 이와 비슷한 형태였으리라.

     

    박인환의 고향은 그야말로 산자수명하다. 고향에 그의 시비가 세워짐은 당연한 노릇이었는데, 처음에는(1988. 10. 29) 인제읍 남북리 아미산공원의 그야말로 눈물이라도 쏟아질 듯한 풍경 속에 그의 육필 원고를 새긴 시비가 섰으나 국도터널 공사로 인해 지금의 합강정(合江亭)휴게소 앞으로 옮겨졌다.(1988. 10. 29)

     

    합강정은 오대산에서 발원한 내린천과 설악산에 흘러 내려온 인북천 두 강줄기가 이 만나는 곳에 세워진 정자로, 멀리 바라다보니 군부대가 도강(渡江) 훈련 중이었다. 그리고 강가에는 갈대가 바람에 세게 흔들리고 있었던 바, 박인환의 '고향에 가서'라는 시가 절로 떠올려진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繪畵)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 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열과 함께
    세상엔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에 싸늘한 바람이 설레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의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의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 준다

     

     

    인제군 박인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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