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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춘원 이광수의 마지막 삶
    작가의 고향 2021. 5. 23. 01:09

     

    내가 춘원(春園)의 문학을 처음 접한 건 책이 아니라 영화로였다.  그 1976년 영화 <유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특히 주인공 최석(남궁원 분)이 눈 덮인 시베리아 평원(사실은 일본 홋카이도였지만)을 헤매다 얼어 죽는 장면이 또렸한데, 고등학교 때 본 그 영화를 여태껏 기억하는 것은 아마도 정임(한유정 분) 역을 했던 배우가 나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다 그 첫사랑의 열병은 1978년 영화 <흙>의 여주인공 배우 이화시에게로 슬그머니 옮겨간다. 

     
     

    이광수 원작의 영화 '유정'

     

    춘원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흙>은 김기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1978년도 영화인데, 얼마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 선생이 헌사를 아끼지 않았던 바로 그 감독이다. 연출력까지는 인지되지 않았겠지만 아닌 게 아니라 뛰어난 영상미는 기억에 담겨 있으니 까치밥 매달린 감나무가 보이는 마을 풍경과, 마을 언덕 위 무너진 성채의 돌들과, 그 언덕길에서 허공을 향해 트럼펫을 불던 여주인공 이화시의 라스트 신은 지금도 강렬히 뇌리에 남아 있다. 세상천지 가장 가장 처연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으로써..... 
     
    <흙>은 <유정>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어 시간에 워낙에 회자된 작품이고 거장(巨匠)의 작품을 배워야 된다는 할리우드 키드의 학습열에 공부하듯 관람했는데 엉뚱하게도 여주인공 이화시만 각인되었다. 그렇지만 이 두 번째 사랑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으니 그녀가 <흙>을 마지막으로 은막에서 사라졌던 까닭이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작품을 마지막으로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는 것이 후문이었다.   

     
     

    이광수 원작의 영화 '흙'
    현대적 도회미의 마스크를 지녔던 이화시
    1976년 영화 '이어도'에서의 이화시

     

    춘원의 첫 장편이자 근대 문학 최초의 장편소설이라고 알려진 <무정>은 대학교 국어교재에 그 첫머리가 실려 읽게 되었고, 내친김에 책을 구입해 단숨에 통독했는데, 그러면서 주인공 이형식이 김 장로의 딸 선형이를 만나기 앞서 혹시 제 입에서 입냄새가 날까, 손바닥을 모아 입김을 불고 냄새를 맡던 행동을 따라 했던 기억이 있다. <무정>은 앞서 말한 대로 한국 근대 최초의 장편이기도 하지만 자유연애 사상을 최초로 대중에게 인지시킨 책이기도 한 바, 아마도 그 무렵 나도 진짜 연애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1925년 회동서관 발행 '무정'
    1938년 박문서관 발행 '무정'
    1954년 경진사 발행 '무정'

     
    <무정>은 1917년 <매일신보>에 126회에 걸쳐 절찬리에 연재되었는데 이때 춘원은 약관의 와세다대학 학부 학생이었다. 이걸 보더라도 그는 확실히 선각자였고 천재라 불릴만했다. <무정>은 다음 해 단행본이 발간되어 1924년까지 1만 부 이상 판매되며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바, 당시 인구의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베스트셀러라는 수식어 정도로는 부족하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본 책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것 같다.   
     
    그 <무정>을 시작으로 춘원의 작품은 웬만큼 읽은 것 같다. 그래서 웬만큼 수준이 됐는지 1990년 춘원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배창호 감독의 <꿈>을 보고 난 뒤에는 "이것도 영화라고 만들었냐"는 혹평을 할 수 있게도 되었는데, 그만큼 춘원의 작품은 모두가 수작(秀作)이라 해도 무방했다. 가끔 평론가들이 춘원 이광수에게 붙이는 '천재 소설가'라는 수식이 절대 레토릭이 아닌 이유이기도 했다. 
     
     

    춘원은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를 '꿈'으로 승화시켰으나
    배창호 감독은 리즈 시절 황신혜의 미모조차 살리지 못했다. / 사진은 꿈의 스틸컷
    '꿈'을 쓸 무렵의 춘원(1892-1950) / 안의 사진은 '꿈'의 초간본.

     
    그러나 춘원의 빛나는 문학은 지금은 상허(常虛) 이태준보다도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내가 굳이 상허를 집어 비교하는 건 알다시피 그가  자진해 월북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성북동 찻집 '수연산방(壽硯山房)'과 더불어 심심찮게 주목받고 있으며, 나아가 학교 정규수업에서도 '돌다리', '달밤'과 같은 작품들이 다뤄지고 있다.(지금은 근사한 찻집으로 성업 중인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1946년 월북 전까지 살던 집이다) 여기서 또 굳이 말하자면 상허는 자진 월북이고 춘원은 6.25 전쟁 중 강제 납북된 케이스이다.

     
     

    수연산방 입구
    성업 중인 수연산방
    그 문 앞에 선 이태준
    성북동 살던 때의 이태준과 가족 / 이렇듯 좋은 집에서 다복하던 이태준은 왜 자진 월북했을까?


    그럼에도 (예전에는 이름조차 몰랐던) 상허 이태준의 문학세계는 조명을 받고 있고, 춘원은 여전히 묻혀 있다. 이유는 월북의 문제보다 훨씬 위중한 친일의 문제 때문이다. 춘원은 1919년 조선인 유학생의 2.8 독립선언을 이끌었고, 신한청년단과 상하이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지만 춘원이 신문에 <무정>을 연재한 것도 신한청년단의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치른 반년 간의 옥고(獄苦) 후에는 변절하여 이광수가 아닌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서 글을 쓰며 일본과 일본군을 예찬하였던 바, 그 죄가 100년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그는 수양동우회 사건을 계기로 일제에 대한 저항에  한계를 느낀 듯하다)
     

     

    수양동우회 사건

    산도산 선생이 중국 고생의 여독으로 별세한 후에 일본 총독부는 경향에 경고하여 그 초종과 장사에 친우들이 호상호장(護喪護葬)도 못하게 하고 다만 친족 몇 사람이 참담한 장의를 경기

    100.daum.net

     

    옥고를 치를 당시의 춘원. 광복 후 그는 "친일행위는 애국의 변형이었다"는 나름대로의 호소문을 썼다.

     

    그는 경기도 남양주 사능리에서 살다 해방을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춘원은 동향(同鄕, 평안북도 정주)이자 6촌 친척인 봉선사 운허(耘虛, 속명 이학수, 1892 ~1980) 스님의 배려로써 1944년 3월부터 사능리에 농가를 짓고 살았다. 되도록 은둔하고자 한 것이었다. 스스로의 기록에 따르자면, 1945년 8월 16일 사능천변을 거닐던 그는 늘 마주치던 근로보국대(노동꾼 조선인) 감시 역의 일본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는데, 바로 그때 운허스님으로부터 광복의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그리고 더 이상의 설명이 없었다. 필력이 뛰어난 그도 이때의 감정을 표현하긴 힘들었을 듯) 

     
     

    춘원 집 옆의 사능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대덕이었던 봉선사 운허스님의 승탑과 탑비
    한글 현판이 걸린 봉선사 일주문
    운허스님의 법력이 느껴지는 한글 현판과 주련

     
    해방이 되자 그는 더욱 신변을 단속했다. 혹 가족들에게 해가 갈까, 1921년 재혼한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과도 이혼하고 마을에서도 벗어나 운허가 마련해준 봉선사 절 내의 허름한 당우에 은거했다. 춘원은 그 당우를 이름만은 호화롭게 '다경향실(茶經香室)'로 칭했다. '차와 (불교) 경전의 향기가 풍기는 집'이라는 뜻이었다. 춘원은 그곳에 거주하며 운허가 1946년 인근 마을에 세운 광동(光東) 중학교 임시 교원으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공산주의자 김 아무개 선생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의 백지동맹(시험 거부) 등으로 마음고생을 했다고 한다.
     
    춘원은 사능리에 사는 동안(1944년 3월~1948년 8월) <도산 안창호 전기>, 자서전격인 <나의 고백>, 수필 <돌베개> 등을 쓰며 집필활동을 이어갔으나 학교와 동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1948년 9월 서울 효자동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나 고혈압과 폐결핵이 심화되어 풀려났다. 이어 다시 이듬해 6.25전쟁이 터지자 북한에서 내려온 혁명시인 리찬('김일성 장군의 노래' 작사가)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북송됐고, 북한군이 유엔군에 쫓기는 과정에서 임시수도인 강계까지 가게 되었으나 쇠약해진 몸과 맹추위에 결국 인민군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종로구 효자동 751-1번지 춘원의 옛 집자리 / 춘원의 옛집은 진즉에 헐렸고 현재는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서있다.

     
    그가 살던 남양주시 사능리의 슬레이트 지붕의 농가는 적어도 내가 갔던 1997년 봄까지는 허름하나마 존재했고, 집 앞에 '춘원 사업회' 등에서 세운 비석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토요일(2021년 5월 22일) 찾아갔을 때 집은 온데간데 없고 비석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가 은거했던 다경향실도 6.25 전쟁 중 봉선사 16동 150칸 전각이 전소될 때 함께 사라졌고, 이후 그곳엔 '다경향실 터'라는 다듬지 않은 석비만 남았었는데 어제 가보니 '다경실'이라는 비슷한 이름의 선방(禪房)이 자리하고 있었다.
     
     

    춘원의 집 터에 남은 비석
    춘원기념사업회와 한국문인협회 등에서 세운 비석
    다경향실 자리에 지어진 선방(禪房)
    전쟁 전의 봉선사 전경
    지금의 봉선사는 그때보다 작다.

     
    지난 일이지만, 한때 사능리 춘원 집을 리모델링해 '찻집'을 해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지금의 '수연산방'처럼) 그래서 조금 알아보니 가옥 명의가 미국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한다는 차녀 이정화 씨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그 분이 이 집을 애지중지한다는 소문에 지레 포기하고 돌아섰다. 따님이 '이광수 문학관' 같은 것을 세울 모양이구나 생각했던 것인데, 어제 그 자리가 허허한 것을 보고 문득 가슴이 허전했다. 남한에서 춘원의 흔적은 이제 아예 사라진 셈이니..... (※ 서울 홍지동에 이광수 별장으로 불리는 가옥이 있으나 개인 집이라 공개가 안 됨) 
     
    춘원은 묘소는 그가 죽은 강계에 있다, 혹은 평양에 있으나 비석조차 없다, 하는 말들이 돌았으나 그의 유해는 2003년 조성된 재북인사릉에 안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말년은 언뜻 불행한 듯 보이지만 어찌 보면 행복한 죽음이니, '향수'의 시인 정지용은 북한군에 끌려다가 폭사했고, 위에서 말한 이태준은 자본주의적이고 친일적인 작품을 썼다는 죄목으로 숙청되어 <함흥로동신문> 교정원으로,이후 다시 탄광 노동자로 쫓겨나 생사조차 불명확히 사라졌다.
     
     

    평양 재북인사릉의 이광수 묘 / 춘원을 포함한 65명의 월북자 무덤이 있다.

     
    언제 기회가 있으면 상술하겠거니와, 이태준은 '조선의 모파상', '한국 근대소설의 완성자', '시는 정지용, 문장은 이태준'으로 불렸던 대문호로, 그의 글쓰기 독본인 <문장강화(講話)>는 지금도 무릇 '글쓰는 자의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또한 충분히 공산주의적이고 반미적이어서 전쟁 전부터 김일성 예찬 글을 썼으며, <해방전후> 등의 소설에서는 노골적인 미군 혐오를 드러냈고, 월북 후 쓴 <농토> 등의 소설은 공산주의에 경도된 그의 글이 얼마나 황폐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예제(例題)로 쓰이기도 했다.(북한 토지개혁을 주제로 쓴 <농토>는 여러 번의 검열과정을 거치면서 실제 이태준이 쓴 글과 상당 부분 달라졌다는 진술이 있기는 하지만)  
     
    그에 비하면 춘원은 그야말로 부르주아적이고 반인민적인 악질 소설가다.(북한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친일 작품을 쏟아낸 대표적인 작가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그의 죽음을 행복한 죽음이라 여기는 것은 그 때문이니, 아무리 네임밸류가 있는 춘원이라 해도 그와 같이 자본주의적이고 친일적인 작가가 북한에서 살아남기란 불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봉선사 부도 밭의 춘원 이광수 기념비
    남한에선 유일한 춘원의 기념비이다. 옆에 있는 '중창대시주 이월파(李月波) 공덕비'는 유신시대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시주 공덕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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