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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아침'과 '날개'작가의 고향 2022. 3. 28. 07:04
아침
캄캄한 공기를 마시면 폐에 해롭다. 폐벽(肺壁)에 끄름이 앉는다. 밤새도록 나는 몸살을 앓는다. 밤은 참 많기도 하더라. 실어 내가기도 하고 실어 들어오기도 하다가 잊어버리고 새벽이 된다. 폐에도 아침이 켜진다. 밤사이 무엇이 없어졌나 살펴본다. 습관이 도로 와 있다. 다만 내 치사(侈奢)한 책이 여러 장 찢겼다. 초췌한 결론 위에 아침 햇살이 자세히 적힌다. 영원히 그 코없는 밤은 오지 않을 듯이.
이상(李箱)은 1910년 서울 통인동 154번지에서 태어났다. 요즘으로 치면 강남 고급주택가에서 태어났으니 태어날 때부터 모던보이였던 셈이다. 그러나 부자는 아니었고 그럭저럭 살았는데 구한말 황실 궁내부 활판소에서 일하던 아버지 김연창이 손가락이 절단되어 퇴직한 후로는 가난과 친근해졌다. 이에 1913년 총독부 관리를 지내며 부유한 생활을 하던, 하지만 자식이 없던 백부 김연필의 집에 양자처럼 들어갔으나 얼마 후 본처가 아들을 낳으며 찬밥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큰아버지가 학업은 도왔다. 그리하여 1926년 보성고보를 졸업할 수 있었고 관립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화가 지망생이 되었는데 당시는 건축과가 미대에 속했던 바, 그가 건축부에 입학한 것은 실리와 취미를 모두 챙긴 선택이었다. 그는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의 최고 직장인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사로 일하게 되었다. 아마도 백부의 입김도 작용했을 것이다.
아무튼 이상의 천재성이 표출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였다. 그는 자신의 할 일을 오전 중에 다 끝마치고 오후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썼다. 재한(在韓) 일본인 건축기술자 협회인 조선건축회가 공모한 학회지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 도안 현상 모집에 출품한 2점이 1등과 3등에 당선된 것과, 총독부 기관지 《조선》 국문판에 장편소설 '12월 12일'을 연재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뿐만 아니라 1931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해방 후의 국전)에 서양화가 입선하였으며, 《조선과 건축》에는 일본어로 쓴 시 '이상한 가역반응'(異常ナ可逆反応)을 비롯한 20여 편의 시가 실렸다. 우리에게 익숙한 '건축무한육면체'가 실린 지면도 여기였다.
그가 폐결핵에 걸린 것도 이즈음이었다. 1931년 그는 폐결핵 진단을 받고 스스로 퇴사해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 요양을 했는데, 이때 만난 금홍이라는 기생을 얼굴마담으로써 서울 종로 복판에 '제비'라는 다방을 차린 것을 보면 나름 장사꾼의 기질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즈음에는 건강도 꽤 회복한 듯 보이니 소설가 이태준이 다리를 놓아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를 싣지만 그 난해한 시를 좋아할 독자는 없었을 터, 항의가 쏟아지는 통에 작파한다.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오감도' 시 제1호
이후 그의 삶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니 '제비' 다방도 경영난으로 폐업하고 금홍과도 헤어진다. 다만 즈음해서 발표한 단편소설 '날개'는 주목을 받는데, 연이어 조선일보 등에 실린 소설 '위독', '동해', '종생기'도 호평을 받는다. 이에 힘입었음인지 1936년 6월 변동림과 결혼해 을지로 1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하지만 이즈음에 쓴 서두의 '아침'은 이미 병이 깊어져 있는 모습을 말하고 있으니 이 시가 쓰인 함경북도 주흘온천의 여관방에는 이 시 외에도 그가 피를 토하거나 닦은 여러 장의 육필원고가 남겨졌다.
아래 소설 '날개'의 마지막 부분을 '회생의 욕구'로서 이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도 쓴 글을 보았기에 하는 말이다)
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에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아내에 대한 욕구를 대신한다. 아내는 자신의 매음 행위에 거추장스러운 '나'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먹인다. 그 약이 감기약 아스피린인 줄 알고 지내던 '나'는 어느 날 그것이 수면제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산으로 올라가 아내를 연구한다.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를 수면제를 한꺼번에 여섯 개씩이나 먹고 일주야를 자고 깨어난다.
아내를 의심했던 걸 미안해하며 '나'는 아내에게 사죄하러 집으로 돌아왔다가 그만 아내의 통정 현장을 목도하고 만다. 도망쳐 나온 '나'는 쏘다니던 끝에 미스꼬시 옥상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물여섯 해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고 '나'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날개'에서는 이상이 동거했던 '제비' 다방 마담 금홍과의 실제 생활 체험이 우러난다. 그리고 무력한 지식인의 한계로서 괴로워하는 심경도 드러난다. 제 아내나 혹은 제 애인에게 매춘을 시키면서 (게다가 그 장면을 목도까지 한다) 삶의 의욕을 갖는 새끼가 있겠는가? 소설 속의 '나'는 자살을 하기 위해 미츠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갔으나 차마 자살은 못하고 돋지 않는 날개를 핑계로 내려온다. 아마도 이상이 그랬을 것이다.
이 소설을 쓴 후 이상은 일본 도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도쿄 니시간다 경찰서에서 한 달간 갇히게 되는데, (1937년 2월) 그때 폐결핵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소했으나 4월 17일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28세로 생을 마감했다. 이상은 이미 주흘온천에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싶다. 그래서 세상의 책을 다 읽고 죽겠노라며 (실제 이상이 한 말이다) 도쿄로 건너갔는데 사상범으로 몰려 갇히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주검은 위독 전보를 받고 달려온 아내 부인 변동림(1916-2004)에게 인계되었다. 변동림은 유해를 화장해 한국으로 가져온 후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변동림은 이화여전 영문과 출신으로 훗날 화가 김환기의 아내가 되어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했고 김환기와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죽었다. 그리고 그와 이상과의 결혼생활은 불과 4개월에 불과했다. 까닭에 이상의 사후까지는 챙기지 못했는데, 이상은 유택은 1957년 미아리 제2공동묘지의 무덤들이 강제 이장되는 과정에서 사라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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