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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영의 풀
    작가의 고향 2022. 3. 26. 01:40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은 작년에 탄생 100년을 맞는 김수영(1921~1968)의 사후에 발표된 그의 마지막 시이다. 그래서 그런지 '풀'은 자주 조명되며 시험문제로도 단골로 출제된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말하는 것이, 풀은 억압받는 민중을 상징하고, 바람은 그 민중을 억압하고 굴복시키려는 부당한 권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자유로운 감상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일 시험문제라면 '풀'을 '억압받는 민초(民草)'로 해석하지 않으면 오답이 된다.

     

     

     

    도서관을 겸하고 있는 도봉구 방학동 김수영문학관

     

    물론 그렇게도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정답처럼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래서 1982년 황동규 시인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풀’에 관한 이런 해석을 처음 내놓은 이는 누구일까?"

     

    글쎄, 누구일까? 20세기 말을 풍미한 민중·민족주의 작가들일까? 학생들에게 신드롬마저 일으켰던 전교조 계열의 인기 많은 국어교사였을까? 여기에 대해 확실히 대답을 주는 사람은 없다. 다만 이영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풀'은 그저 풀이다. 생명의 활동이 마지막에 이르러 풀뿌리가 눕는 것으로 표현됨은 생명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자연스럽다. 바람과 풀을 대립적으로 읽어낸 민중주의적 해석은 이제는 지양되었으면 한다. '풀'은 그저 풀이다. 김수영 시 ‘풀’이 민중주의적으로 읽힌 사례가 나중에라도 확인될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은 인간이 세계와 합일을 느끼는 지복(至福)의 상태를 표현한 작품으로 ‘풀’을 이해하며, 그런 점에서 김수영은 예이츠나 휘트먼에 비견되는 거대한 긍정의 시인으로 봐야 한다 

     

     

    종로 탑골공원 맞은 편의 김수영 생가 터 표석 / 김수영의 주거지 종로 116번지 골목 안에 세워졌던 것을 2009년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그가 살던 집은 2004년 개발에 밀려 사라졌다.

     

    촌놈처럼 보이지만 김수영은 1921년 서울 종로 관철동에서 출생했다.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다녔는데, 성적은 우수했으며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고 하다. 연희전문과 일본 동경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들어갔으나 모두 오래 다니지는 못했다. 대략 스무 살부터 시를 썼고 1949년 김경린 박인환과 친교하며 시론과 시를 엮은 모더니즘 계열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했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징집되었으며 국군의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1952년 석방되었다.

     

    흔히 위의 '풀'을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사후(1970년) 《월간문학》에 발표된 '의용군'이라는 미완의 단편소설로서, 전쟁의 경험에 자아(自我)를 담은 작품이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북한군에 자원해 인민군과 함께 서울을 출발, 평안남도 개천(价川)의 훈련소까지 이동하는데 그 과정에서 뒤늦게 사회주의의 모순을 깨닫지만 미완인 탓에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는 모른다. (아마도 최인훈의 '광장'처럼 회색을 지향하지 않았을까 한다)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문우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중 과속버스에 머리를 부딪히며 의식을 잃었는데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김수영(金洙暎 1921-1968)
    김수영의 육필 원고 '레이판 탄' / 레이판 탄은 소이탄(燒夷彈)인 네이탐 탄을 말한다.
    '풀'이 적힌 도봉산 김수영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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