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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광수의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작가의 고향 2022. 4. 19. 06:59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그녀의 찢어진 입술

    그녀의 찢어진 눈꼬리

    그녀의 찢어진 미니스커트

    그녀의 찢어진 청바지

    아아아 찢어진 거미줄

    찢어진 신문지 조각

    찢어진 나방의 날개

    찢어진 북어의 살점

    오오오 너무 길게 길러 찢어진 그녀의 손톱

    너무 꽉 조여매 찢어진 그녀의 코르셋

    너무 무거운 귀걸이를 달아 찢어진 그녀의 귓불

    너무 순정을 지키다 찢어진 그녀의 정조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realy?

     

    앞서 '윤동주의 쉽게 쓰여진 시'에 관해 쓰며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라는 조사 결과를 소개한 바 있다. 이에 반해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시인은 누구일까? 물론 이에 관해 조사를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만일 조사를 한다면 고(故) 마광수 교수가  순위에서 빠지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실증적으로 그는 1992년 외설 논란으로 구속된 적이 있고, 1995년 대법원에서 결국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실형을 먹었다.  

     

    흥미로운 점은 연세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수석 입학·졸업자라고 한다) 동 대학원에서 윤동주 시인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학위논문이 실린 <윤동주 연구>라는 학술서는 지금도 윤동주 시인에 관한 최고 연구서로 평가받으며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다. (<윤동주 연구>는 '철학과 현실사'에서 2005년 5월 239쪽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젊은 시절의 마광수(馬光洙, 1951~2017)

     

    여자 뒤꽁무니나 좇아 다녔을 것 같은 세간의 통념과 달리 마광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과 제 집에 마련된 간이 화실에서 보냈다. 그리하여 앞서 말한 <윤동주 연구> 외 8권의 문학이론서와 6권의 비평서, 4권의 문학 아포리즘 에세이집, 9권의 철학 에세이집, 문제의 <즐거운 사라>를 비롯한 소설 약 40권을 출간하였으며, 화가로서는 19번의 전시회를 가졌다.

     

    마광수는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주를 보였던 바, 대학 선택에 있어 인문대냐 미대냐를 두고 갈등했는데 결국 윤동주를 택해 그가 다닌 연세대학교(국어국문학)에 입학했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여겨지니, 적어도 내가 그의 개인전에서 보았던 그림이라면 그는 화가로서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을 것 같다. 혹, 이 또한 시대를 앞서갔다는 사후(死後) 평가가 따를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본 그림 중 블로그에 올릴 만한 작품은 없다. (재미로라도 올릴 수는 있겠지만 솔직히 TISTORY 측의 징계도 겁이 난다. 그의 그림은 그만큼 난삽하다)

     

    하지만 문인으로서는 뛰어났다. 그의 구속과 교수직 해임을 불러온 소설 <즐거운 사라>는 대중적으로도 인기 있었고 작품성과 재미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나는 다행히도(?) 그 책이 음란물로 분류돼 출판 금지되기 전에 사 읽을 수 있었는데, 적어도 솔직하다는 느낌만큼은 충분히 받았다.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즐거운 사라> / 간략히 요약하자면 프리섹스를 추구하는 자유로운 여대생 사라가 유부남, 혹은 친구 (여자 친구 포함)와 어울려 갖은 섹스를 즐기며 쾌락을 추구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는 그 솔직함으로 인해 강의 중 제자들 앞에서 체포되는 불명예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교수직에서도 쫓겨났는데, 그가 다른 교수들과 잘 어울리며 술집에도 가고 색시집에도 갔다면 아마도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가 구속되고 학교에서 쫓겨난 것은 (복직되기는 했지만) 미련하게 연구실에서만 생활했던 죄 아닌 죄도 있다. 

     

     

    체포되는 마광수 교수 / 양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것은 아마도 최소한의 자존심이리라.

     

    이로 인해 그는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화제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시는 대중적이지 않았다. (원래 그것이 시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의 시는 '가자, 장미여관으로'가 신문이나 잡지 기사용으로 부분적으로 토막 쳐져 소개된 것 외에는 별로 알려진 소개된 것이 없고, 변태 / 사랑마저 나를 버린다 / 가자, 장미여관으로 /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 / 회춘 등의 시가 제목 정도만 회자되었다.

     

    사람들은 그 제목만을 보고 시 또한 문란하고 저질일 것이라 예단했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와 같이 막상 읽어보면 외설이라는 느낌보다는 훨씬 격이 높은 완성도 있는 운문으로 다가온다. '나는 찢어진 것을 보면 흥분한다'는 그의 시 중 가장 표현 수위가 높은 편임에도 저속하지는 않다. 그는 26살 때인 1977년 《현대문학》에, 망나니의 노래 / 배꼽에 / 고구려 / 당세풍(當世風)의 결혼 / 겁(怯) / 장자사(莊子死) 등의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마광수 시집 / <가자, 장미여관으로>

     

    더러는 그를 '불운한 천재 혹은 폐쇄적인 한국문화가 낳은 문단의 이단아'라 부르며 좋은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혹평한다. 어떤 유명 작가는 그를 향해 '당신의 글은 작품이 아니라 포르노그래피'라고 했고, 또 어떤 작가는 신문 칼럼을 통해 '구역질을 동반하는 보잘것없는 글쓰기'라고 노골적으로 폄훼했다.

     

    그리고 당시 군사정권 하에서 부역하던 보수적 법학자 출신의 국무총리 현승종은 법무부와 검찰에 압력을 넣어 마광수의 사법처리를 암암리에 지시했다는 강준만 교수의 증언이 나오기도 했던 바, (2006년 <한국현대사산책> 1990년대 편 1권) 당시 군사정권이 즐겨 쓰던 '보여주기식 정치'의 희생양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는 천만 다행히도 복직했지만 여전히 주변 교수나 작가들에게 왕따 당했다. 그러면 그는 인간적으로 흥분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군림하는 식자들의 위선(僞善)에 치를 떨었다. (실제로 그의 사후 성추행 · 성폭력 등으로 잡혀 들어간 교수나 작가들이 줄을 이은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문란한 변태성욕자로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학생들과의 사이에서 일체의 추문도 없었고 성추행 따위는 더더욱 없었다. 그의 '성의 자유'는 언제가 작품 속에서만 존재했다.

     

    주변 사람들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한국 교단이 학생에게 권위적인 점을 비판했다고 한다. 그는 교육자가 학생을 아랫사람처럼 대하는 것을 늘 문제점으로 지적했던 바, 그 자신은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는 법이 없었으며, 언제나 학생들에게 웃음으로 대하고 걱정하고 격려했다고 한다. 이를 테면, 취직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예정 직장의 근무 환경은 괜찮은 곳인지, 혹 비정규직은 아닌지.....

     

    그렇다면 그의 작품 속의 성과 <채털리 부인> 속의 성과는 어떻게 다른가?  또 미국 작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남회귀선>과는 또 어떻게 다르며, 도미시마 다케오 <여인의 추억>, 나아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는 또 어떻게 다른가?

     

    혹시 마광수도 그것을 궁금해했을는지 모른다. 죽기 직전까지 내내..... 2017년 9월 5일, 그는 초가을 햇빛 속에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스로 목을 맸다. <즐거운 사라> 이후 위선적 지식인들의 공적으로 몰리며 생긴 우울증이 급기야 그를 자살로까지 내몬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신문은 추모 기사에서  '공공의 적이 된 천재'라는 제목을 달았다)’ 향년 66세였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식 없이 이혼한 후 재혼하지 않았기에 처 자식이 없었고, 유족으로는 누나 한 분만이 있었다. 

     

    마광수는 서울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서울이 고향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화성 발안이다. 1951년 한국전쟁 중 1·4후퇴 당시에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종군 사진작가였던 아버지가 전쟁 중 전사하는 바람에 홀로 된 어머니는 미제장수 등을 하며 어렵게 자식을 키웠다.

     

    그들 가족이 살았던 발안 만세시장(3.1 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이다)은 당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이른바 양키 물건들을 팔던 미제장수들이 많았는데, 우연찮게도 그곳은 지금도 국적불명의 물건들이 일반 판매대에 전시되어 팔리는 진풍경을 연출한다. 주변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해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다. 

     

     

    빌안 만세시장의 외국어 간판들
    '김영철의 동네 한바퀴'에도 소개됐던 투르키스탄 방석빵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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