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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목월의 나그네는 어디를 걸었을까?
    작가의 고향 2022. 6. 26. 13:12

     

    江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南道 三百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ㅡ  박목월의 「나그네」  ㅡ

     

     

    부산 신병철 님의 풍경사진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라면 박목월이 지은 '나그네'라는 시를 모를 수 없다. 국정교과서든 검인정교과서든 이 시는 어느 국어책이든 실렸고, 시험문제로도 단골로 출제되었으며, 시 자체도 짧고 응축성이 있어 낭송을 하면 착착 감기는 맛이 있는 까닭에 즐겨 애송되었다. 그리고 이 시에 대해서는 여러 문학평론가가 이러저러한 해설을 달아 유명세에 힘을 보탰다. 그중 서울대 교수이자 저명 문학평론가였던 권영민은 방랑의 길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고독한 운명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러한 나그네의 고독감은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이라는 부분에서 극대화된다. 외줄기 길을 정처 없이 가야 하는 나그네의 처지와 저녁놀을 배경으로 한 마을의 평화로운 경치가 대조를 이루면서 나그네의 외로움은 더욱 배가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처지가 고독하기는 하나 슬프거나 비참하지는 않다. 나그네가 자신의 운명에 초연하며 속세를 떠난 이의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를 쓴 박목월에 대해 시인 정지용은 '북에 소월이 있다면 남에는 목월이 있다'며 김소월에 비견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박목월과 그의 시에 대해 상찬한 까닭에 나는 고등학교 때 한국의 시인은 청록파와 그렇지 않은 파, 두 부류의 시인만 있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학창시절의 청록파는 그렇게 비중이 컸는데, 청록파라는 말이 비롯되었다는 청노루라는 시를 과거 그가 살던 집 앞에서 보았을 때는 의외의 초라함에 처연한 심경이 되어야 했다.

     

     

    박목월이 실던 2층 양옥은 2004년 속절없이 헐리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섰다. / 서울시와 문화재청에서는 그가 살던 집을 보존하고자 애썼으나 경제적 어려움을 내세운 가족들 앞에서는 어쩔 재간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일까, 원효로의 이 다세대 주택에는 청노루 힐의 이름이 붙었다.
    입구의 '청노루' 시와 한국문인협회가 세운 빛 바랜 표석이 초라해 보인다. / '목월 박영종 선생 문학산실'이라는 제목 아래 약력을 짧게 새겼다.
    박목월(1916~1978)
    목월의 경주 모량리 집 /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목월의 서울 원효로 집 /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목월공원이 자리하고 있어 위안을 준다. (공원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의) 비록 손바닥만 한 공원이기는 하나 주변에 목월을 기린 장소가 마련됐다는 데 그저 만족스럽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곳에는 버젓한 목월 시비가 세워졌고, 시비에는 '청노루'가 새겨졌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오리목 속잎 피는 열 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입구 표석에 새겨진 약력에 따르면, 목월은 1915년 경주 태생으로, 본명은 영종(泳鐘)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고향에서 서울로 올라와 이듬해인 1947년 원효로 3가 277번지 전차종점 부근에서 터를 잡고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돌아가시던 1978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어머니', '사력질' 등 대표작을 집필했다.

     

    1939년 <문장>지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 1936년 청록파 3시인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이름으로 시집 <청록집> 발행했다. 아시아 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서울시 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으며 한국시인협회장, 한양대 문리대학장 등을 역임했다. '산유화', '윤사월', '청노루', '나그네' 등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원효로 목월공원 입구의 목월 약력 표석
    '청노루'가 새겨진 시비

     

    원래 이곳 원효로 3가는 용산진(龍山津)이라 불리던 나루가 있었고 그 나루에 얹혀 형성된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이 이곳을 개시장(開市場) 후보지로 삼았다. 그리고 1884년 8월, 조선정부가 희망한 양화진과 마포를 밀어내고 한성 개시장이 되었다. 용산이 다른 후보지들보다 숭례문에 가까운 데다 기타 여러 조건이 경제적 상업적 군사적 이득에 부합된다 여긴 까닭이었다. 이후 이곳을 통해 한양 경기 일원의 수탈된 물자들이 일본으로 빠져나갔으며, 반대로 빈천한 본토 일본인들이 밀려들어 자리를 잡았다.

     

     

    목월시비 옆의 용산마루터 안내판

     

    해방 후에는 판잣집들이 들어섰다. 한강 정비를 하기 전, 일대는 대부분 백사장이었고 홍수 때면 큰물이 목월이 살던 현 용산문화원 부근까지 물바다로 만들었다. 목월도 그 가난한 시절의 사람들과 더불어 살았을 것이니, 공원에 내에 있는 '모일(某日, 어느 날)'이라는 시에서는 그 시절의  어려움이 잘 드러나 있다.

     

     

    <모일>이 새겨진 나무

     

    그런데 이쯤에서 문득 오래 전의 궁금증이 다시 상기된다. '나그네'가 쓰여진 1940년 대는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한 시기로, 모든 것을 전쟁 물자로 빼앗겨 이 땅의 가난한 백성들은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그네' 속의 나그네가 가는 곳은 마을마다 술이 익고 있다. 먹을 것도 부족한데 술을 빚고 있는 것이다. 대체 그 나그네가 걸은 곳은 어디인가?  

     

     

    부산 신병철 님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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