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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사람 박인범의 명시(名詩)
    작가의 고향 2022. 7. 7. 00:25

     

    통일신라까지를 포함하면 신라시대는 무려 1천 년이거늘 의외로 전해오는 당대의 한시(漢詩)가 적다. 그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의 작품 「황조가(黃鳥歌)」가 전하는 것이 차라리 신기하기까지 하다. 김부식이 그 오래된 한시를 어떻게 채록했는지 궁금하다.

     

    신라시대의 시는 여류시인 설요(薛瑤)의 것을 비롯해 몇 편이 전하나, 통일신라 때는 주옥같은 당시(唐詩)가 쏟아지던 무렵임에도 전해져 오는 시가 드물고, 말기에 지어진 최치원·최광유·최승우·박인범(朴仁範)의 시가 전할 뿐이다. 이들은 당나라에 유학한 후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무원 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곳에서 관료생활을 하며 당대의 시 문화를 흠향했을 법하니, 그들의 작품이 전해지게 된 것도 대부분 중국의 문헌을 통해서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박인범은 통일신라인으로 빈공과에 합격한 대당유학생이라는 것, 그리고 귀국해서는 한림학사와 수예부시랑(守禮部侍郎)을 역임했다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전해지는 작품은 적지 않으니 「범일국사영찬(梵日國師影贊)」과 「무애지국사영찬(無㝵智國師影贊)」의 찬문(贊文) 2편과 칠언율시 10수가 전한다. 

     

     

    대구 부인사지 3층석탑
    부인사는 몽골의 침입 때 소장된 초조대장경이 불탔고 임진왜란 때 사찰 전체가 전소되어 사라졌다. 1964년 대웅전 뒤 건물지에서 비석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고려 초의 승려 무애지국사 계응(戒膺)의 비문으로 밝혀졌다. 비문을 지은 사람이 아마도 박인범일 것이다.

     

    ▼ 범일국사에 대해서는

     

    한국 선종의 원류 3 - 굴산사 범일국사의 생생 설화

    신라 말 구산선문 중 가장 번성했던 사굴산문의 본산 굴산사는 지금은 없다. 폐사 시기와 원인에 대해서는 이르게는 고려 현종(992-1031) 때 거란의 침입을 들기도 하고 여말선초 때를 시대적 상황

    kibaek.tistory.com

     

     

    전해지는 작품의 수준을 보면 그는 모든 시문(詩文)에 뛰어났을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가장 시작(詩作)이 까다롭다는 율시(律詩)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경주용삭사각겸간운서상인(涇州龍朔寺閣兼柬雲栖上人)」은 절창 중의 절창으로 정말이지 쉽게 만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우선 그 시를 보자.

     

     

    翬飛仙閣在靑冥  月殿笙歌歷歷聽

    燈撼螢光明鳥道  梯回虹影到岩扃

    人隨流水何時盡  竹帶寒山萬古靑

    試問是非空色理  百年愁醉坐來醒

     

    날아갈 듯한 신선의 누각 푸른 하늘 속에 있고

    월전(전설 속의 달 궁전)의 생황(피리의 일종)과 노랫소리 역력히 들리는 듯.

    등불이 반딧불처럼 흔들거리며 새 길(날짐승이나 넘나들 수 있는 험준한 길) 비추는 가운데

    무지개 그림자 투영되는 고불고불한 산길 돌고 돌아 드디어 두 개의 바위돌 어우러진 석문 앞에 이르렀다. 

    인생은 흐르는 물과  같아 따라 언젠가는 사라지지만,

    차가운 바위산을 두른 이곳 대나무는 천년만년 푸르구나

    (그곳에 사는 자칭 도사라는 자에게)

    유학의 시비(유교에서 말하는 옳고 그름)와 불가의 공색(이른바 색즉시공)에 대해 시험 삼아 물어보니

    백년의 근심에 젖은 얼굴이 되어 자세를 고쳐 앉는다.

     

     

    박인범은 빈공과에 합격하여 경주(涇州, 지금의 중국 감숙성 경천현·涇川縣) 현령을 제수받았다. 그는 그곳에 봉직하다 어느 날 근방의 도교사원 용삭사(龍朔寺)를 찾는다. 용삭사는 주나라 목왕(周穆王)이 전설의 서왕모(西王母, 중국 도교에 등장하는 불사의 여왕으로 달나라 궁전에 산다)를 만나 잔치 벌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유명한 도교 사찰이었다.

     

    그는 산중 유곡 험준한 곳에 위치한 용삭사에 이르러 스스로 구름 위에서 산다(雲栖上人)고 하는 주지 겸 도사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즈음하여 인범은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었던지라 도사와 범속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심도 있는 대화와 가르침을 기대했던 인범의 생각과 달리 도사는 개털이었다. 이에 인범이 상대의 식견을 알고자 유학의 시비(是非)와 불교의 이치를 물어보았는데, 그러자 오히려 인범의 식견에 놀란 도사가 크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세를 바로 한 것이었다.

     

     

    도가 제일성지로 일컬어지는 감숙성 공동산/ 도교 유교 불교의 세 가지가 모여 번성한 종교의 요람이다.

     

    이 시는 대단히 잘 쓴 훌륭한 시문이지만, 인생무상을 느끼는 사람들의 답 없는 일생에 대한 계고를 담고 있어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다. (사실이지 인생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박인범은 시의 주제인 그것을 댓구로서 능란하게 치고받고 있다. 그래서 고려의 이규보는 자신의 『백운소설』에서 「人隨流水何時盡 竹帶寒山萬古靑 試問是非空色理 百年愁醉坐來醒」의 전구(轉口, 제5·6구)와 결구(結句, 제7·8)를 들어 최치원의 『등윤주자화사상방(登潤州慈和寺上房)』, 박인량의 『사송과사주구산사(使宋過泗州龜山寺)』의 경구(警句)와 함께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명구(名句)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언뜻 박인범은 대구(對句)를 떡 주무르 듯하는 천재적 시인처럼 보이지만, 최치원은 의외로 "박인범은 고심하여 시를 짓는 사람(朴仁範苦心爲詩)"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치원의 신라왕여당강서고대부상장(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 그리고 세인들은 이 시에 대해 "높은 곳에 올라 속세를 굽어보는 가운데, 도가적 선취와 불교적 제행무상이 어우러지며 부귀와 이욕을 초탈한 심경을 읊은 절창으로서, 용각사에서 만난 운서상인에게 써 준 시"라고들 하는데,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사찰보다 탈속한 분위기의 경주 향교
    복원된 월정교 입구 양쪽의 석수(石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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