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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선종의 원류 3 - 굴산사 범일국사의 생생 설화
    전설 따라 삼백만리 2021. 3. 18. 21:07

     

    신라 말 구산선문 중 가장 번성했던 사굴산문의 본산 굴산사는 지금은 없다. 폐사 시기와 원인에 대해서는 이르게는 고려 현종(992-1031) 때 거란의 침입을 들기도 하고 여말선초 때를 시대적 상황을 들기도 한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실린 연기 설화를 바탕에 둔 847년이 거의 정확한 듯하다. 절의 창건에 관한 연기설화는 대개가 부왕부왕한데 범일(梵日, 810-889)의 굴산사 창건설화는 꽤 아귀가 맞는다. 

     

    우리나라 개화기의 일본 유학, 경제발전기의 미국 유학처럼, 신라 말에는 중국에 유학해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선종(禪宗)을 배워오는 게 인기였다. 그래서 많은 학승(學僧)들이 당나라로 유학길을 떠났던 바, 흔히 말하는 구법승(求法僧)이 그들이다. 그중에는 도의(道義)나 신행(神行)처럼 신사조(新思潮)를 너무 빨리 들여온 탓에 배척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어 구법승들이 무더기로 돌아와 선풍(禪風)을 일으키니 곧 선종의 교리가 신라 하대를 지배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

     

     

    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

    얼마 전 완벽 복원되어 시범 공개된 국보 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에 이어 또 하나의 명품 승탑을 감상하게 되었다. 전남 곡성군에 있는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그것이다. 군(郡)이 보물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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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일이 입당(入唐)한 해는 836년으로 구법승 중에서는 다소 늦은 경우였다. 하지만 그는 향후 11년간 구도(求道)를 위해 용맹전진한 듯보이니, 염관제안(塩官齊安, ?-842, 마조도일의 제자)에게 물어 들었다는 성불(成佛)의 방법은 꽤 심오한 데가 있다. 즉 "성불은 특정한 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주변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해 따따부따 소견을 드러내지 않는 경지를 평상의 마음으로 갖는 것이 곧 도"라는 것이었다. 이는 매우 철학적이면서도 실천적인 방법이었던 바, 범일의 대오(大悟)를 이끌어내게 된다.

     

    이후 범일은 제안의 문하에서 6년을 머물며 수행하였는데, 이후 다시 중국을 떠돌며 대종(大宗)의 선사들과 교류하다 약산유엄(藥山惟儼, 석두희천의 제자)의 제자인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과의 선문답 끝에 큰 인가를 받는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으니 하산함이 옳을 듯하다." 운암담성의 선문답은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많은 일화가 전하지만 오히려 현실적인 면이 강한 선승이었던 바, 그에게서 인가를 받았다는 것은 범일의 사상 또한 그러했다는 말일 게다. 운암과 마지막으로 선문답을 나누었다는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와의 일화는 이렇다. 

     

     

    운암담성의 초상

     

    운암이 열반에 들 무렵 동산이 물었다. "스님께서 돌아가시고 오랜 뒤에 누군가가 운암선사의 초상을 그리겠다고 하면 그에게 뭐라 설명하면 좋겠습니까?" 이에 운암이 답했다. "그저 그런 놈이었다고 말하면 되느니라." 동산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운암이 입적하고 얼마 뒤, 동산은 그의 제를 지내기 위해 위산(潙山)으로 가던 중, 담주(潭州)라는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곳의 큰 개울을 건널 때, 동산은 물에 비쳐진 자기 모습을 보고서야  비로소 운암의 말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범일은 운암과 헤어진 후 귀국을 결심하지만 곧바로 올 수가 없었으니 844년 당나라 무종이 불교를 탄압하는 법난(法難)을 일으켜 전국이 뒤숭숭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섬서성 상산(商山)에 숨어 있다 광동성 소주(韶州)에서 육조혜능(638-713)의 진신상에 참배한 후 847년 드디어 귀국하게 된다. 그런데 그 무렵 영파(寧波) 개국사(開國寺)에서 왼쪽 귀가 달아난 신라인 사미승을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그는 범일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한다. 

     

     

    광동성 남화사 육조혜능대사 진신상
    혜능은 앉은 채로 열반하여 그대로 미라가 되었는데, 그 형상이 남화사에 온전히 보존되다 금세기 문화혁명기에 홍위병에 의해 일부 훼손되었다. 그후 땅에 묻혔던 것을 남화사 주지 진공스님이 광동성 서기 시중쉰(시진핑 주석의 아버지)의 도움으로써 다시 안치하게 된다.  

     

    "저는 스님과 같은 신라 사람으로, 고향은 명주 익령현(翼嶺懸, 지금의 양양군) 부근의 덕기방입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지가 오래이므로 집이 없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사께서 귀국하시거든 부디 제 집을 찾아 지어주셨으면 합니다."


    범일 역시 명주가 고향이었던지라 반가운 마음에 그러마 약속을 했다. 범일은 847년 귀국 후 백달산(白達山, 위치 불명)에서 수도하는데, 그 후 10년이 지난 858년, 2월 보름밤, 영파 개국사에서 만났던 사미승이 찾아와 암자 창문에서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 "조사께서는 예전 개국사에서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그 말에 잠을 자던 범일이 놀라 깼다. 꿈이었다. 다만 그것이 너무도 생생했던지라 범일은 사람들과 함께 익령현 덕기방을 찾아 나섰으나 찾을 수 없었고, 대신 낙산(학산?)에서 덕기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아들이 가지고 놀았다는 개울 물속의 불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부처님이었다. 그것을 본 범일은 경악했다. 자신이 영파 개국사에서 만났던 그 사미승도 한쪽 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1967년 굴산사지 석천에서 발견된 귀 없는 석불. 오른 손가락을 왼손으로 감싼 이른바 '좌권인'의 특이한 형태를 갖춘 비로나자불이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지향해 입산수도하던 범일은 이때 비로소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청을 받아들여 절을 세워 주석하니 바로 굴산사이다. 굴산은 학산의 옛 이름으로 대중을 모두 부처로 이끄는 도량을 마련하고자 결심한 것이었다. 까닭에 그는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性이 차례로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 받들어 서라벌로 모시겠다는 청을 거절하고 오로지 40년 동안을 대중의 교화에만 힘썼다.

     

    "부처의 뒤를 따르려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본받으려 하지도 마라. 수도란 본래 아무것도 갖지 않음을 지향하는 것이니 주위 사람의 성불법을 따르려 하지 말고 본래 무(無)인 부처로서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아 정진하라." 이것이 범일의 주된 가르침이었다. 

     

    신라 말기, 뺏고 빼앗기는 혼란의 사회에서 무(無)를 지향하는 범일의 수행법은 인기를 끌었다. 그리하여 그의 조사선을 배우려는 제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뤄 그 문하에서 개청(開淸) · 행적(行寂) 등의 이른바 10대 제자가 나왔다. 개청의 문하에서는 다시 신경 · 총정 · 월효 · 환언· 혜여 · 명연 · 홍림 외 수백 인의 제자들이 나왔으며, 행적의 문하에도 신종 · 주해 · 임엄 · 양경 등 500여 명의 제자가 출현해 종파를 전승하였는데, 이중 양경은 헌강왕의 외숙으로 그가 세운 건성원(乾聖院)에서 이후 사굴산문(=굴산산문)의 유명한 종장(宗長)인 혜조국사(慧炤國師) 정현(鼎賢)이 출현했다. 

     

     

    당간지주 북쪽에서 발견된 석불좌상. 위의 석불과 달리 왼 손가락을 오른손이 감싼 지권인의 형태다.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던 혜조국사는 이후 순천 계족산에 정혜사(定慧寺)를 세워 수도하였는데, 혜조의 제자인 불일보조(佛日普照, 보조국사 지눌)가 이 절의 법통을 1200년에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옮겼다. 그러자 국왕 희종은 (세자 시절부터 자신이 스승으로 모시던 보조국사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1205년 왕위에 오르자 길상사에 대한 대규모 중창불사를 행하였던 바, 송광산 정혜사로 불리던 절을 조계산 수선사(曹溪山 修禪社)로 새롭게 하고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내렸다. 이에 조계산 수선사는 명주 굴산사 다음가는 굴산종의 제2 본산이 된다.

     

     

    보조국사 지눌

     

    이후 이 절에서 불일보조에 의해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탄생하고 이 조계산문은 당시의 최씨 무인정권과 밀착되었다. 귀법사, 중광사, 홍어사 , 홍화사 등 개경 유수의 교종 사찰들은 무신정권에 내내 적대적이었던 바, 최충헌과 최우의 독재정권이 새로운 선종 바람을 몰고온 조계종을 지원하는 건 매우 당연한 노릇이었다. 이에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고 하며 더불어 성장을 하게 되니, 보조의 법통을 이은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은 최우의 두 아들인 만종과 만전 형제를 출가시켜 자신의 제자로 두는 위세를 발휘하기까지 하였다. 

     

     

    진각국사 혜심

     

    하지만 수행과는 별개의 일이었으니 '한국 선종의 원류 2 - 단속사 대감국사비 속의 남종선'에서 말한 바 대로 만종은 단속사의 주지가 되어 갖은 횡포를 부렸고, 만전 역시 능주 쌍봉사 주지로 온갖 불법을 자행하다 환속하여 최씨 정권의 3대 계승자가 되니 이 자가 곧 최항이다. 즈음하여 그때까지의 대세였던 굴산종은 상대적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되니 결국 사굴산문의 법통은 끊기게 된다. 반면 조계종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었던 바, 혜심 이하 보조의 법통을 이은 조계산문의 수장(首長)들이 계속해서 국사의 시호를 이어받았다.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 전경

     

    송광사의 랜드마크 육감정과 우화각

     

    쌍봉사 대웅전

     

    지금 굴산사는 앞서 '구산선문과 조계종'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높이 5.4m의 국내 최대의 당간지주와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의 것으로 여겨지는 승탑, 그리고 우물지 외에는 전해지는 무엇이 없이 농지와 마을로 변한 1만 5천 평의 방대한 터가 대가람의 옛 영화를 잠작케 해줄 뿐이다. 다만 이런저런 경로로 수습된 불상 4구가 전해지는데 위의 2구는 그나마 비교적 온전한 편이고 나머지는 아래 사진처럼 형체가 사납다. 그래도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무엇이 있으니 그 4구의 불상이 모두 비로자나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범일의 굴산 종이 보여주는 그 특질을 다음 4편에서 논해보기로 하겠다.  

     

     

    구산선문과 조계종

    앞서 신라 말의 선종 사찰인 구산선문을 다루며 곡성 태안사에 근거를 둔 동리산문(桐裡山門)까지 설명했다. 그런데 어떤 분이 "흔히 조계산문(曹溪山門)이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나라 선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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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로자나불로 여겨지는 굴산사지 석불 2기

    * 굴산사지 출토 유물과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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