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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17. 22:32
얼마 전 완벽 복원되어 시범 공개된 국보 101호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에 이어 또 하나의 명품 승탑을 감상하게 되었다. 전남 곡성군에 있는 '태안사 적인선사탑'이 그것이다. 군(郡)이 보물 273호인 이 승탑에 대해 국보 승격을 위한 보존관리계획을 수립하고 가치 조사에 나서겠다고 밝히면서 새삼 조명을 받게 된 것인데, 작품적 가치로만 보자면 국보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일부러 아래 세 장의 사진을 골라 비교해 보았다. 이 3개의 승탑은 한 사람의 장인이 만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닮은꼴인데 아래의 두 개는 국보다.
태안사 적인선사탑는 861년 적인선사 혜철 스님이 입적함에 따라 그의 행적을 기리고 다비 때 수습된 사리를 안치하기 위해 조성됐다. 태안사는 신라하대 선종의 바람을 이끈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문(桐裡山門)의 본거지로서 그 개창자가 적인선사 혜철이다.
구산선문은 신라 하대 중국에서 돌아온 유학승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선종(禪宗) 사찰로서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그간의 교조적 가르침에서 벗어난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설파했다. 신라말 고려초의 새로운 사회분위기를 이끌던 그 9개 선문(禪門)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1. 가지산문(迦智山門)
신라말 도의선사(道義禪師)는 중국에 유학하여 6조 혜능의 선종을 배워 귀국했으나(821년/헌덕왕 13) 당대의 신라 사회에서는 마설(魔說)이라 하여 먹히지 않았다. 이에 설악산 진건사에 칩거하며 수도하다 입적했는데, 그의 사상이 염거(廉居)화상과 보조(普照)선사에게 전해져 보조선사 체징(體澄, 813-880)이 장흥 가지산 보림사에서 가지산문을 열게 된다.(840년)
* 신라 경문왕 10년(870년) 때의 작품으로 2기의 삼층석탑과 석등이 국보 제44호로 지정됐다. 형태가 온존히 보존된 흔치 않은 걸작이다. 경내에는 창건주 보조선사 체징의 사리탑과 그의 행적을 새긴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가 있다. 절 뒤 승탑이 즐비한 부도밭은 명문(名門)의 선풍(禪風)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2대 창건주 염거화상의 승탑은 의외로 보림사가 아닌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안내문에 따르면, 열반한 곳은 원주 흥법사인 듯 그곳에서 출토됐다고 전해진다는 글이 쓰여 있다)
2. 실상산문(實相山門)
홍척(洪陟)이 당나라 지장(智藏, 735-814)대사에게서 수학한 후 귀국해 남원 지리산 실상사에서 실상산문을 열었다.(826년 혹은 828년/시기적으로는 홍척의 실상산문이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문을 열었으나 가지산 보림사를 선종 사찰의 첫손가락에 꼽는 건 최초의 선승 도의선사의 법통을 이은 절이라는 데 대한 예우이다)
* 실상사 석등은 계단이 붙은 형식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형태이며, 좌우 삼층석탑은 완전하고 미려한 상륜부를 갖고 있어 불국사 다보탑과 석가탑이 각각 그것을 베껴갔다.
* 아래는 893년 입적한 2대 창건주 수철화상의 승탑이다. 위의 증각대사탑과 거의 같은 양식과 형태를 보이나 그보다 후대의 것이라 그런지 좀 더 섬세하다. 상륜부가 망실돼 아쉽다.
3. 희양산문(曦陽山門)
도헌(道憲, 824-882)이 준범(遵範)·혜은(慧隱)선사의 법맥을 받아와 희양산 줄기 자락의 문경 봉암사(鳳岩寺)에서 희양산문을 열었다.(881년) 지증대사 도헌을 개조로 하나 실질적인 창건주는 정진대사 긍양(兢讓, 878-956)이므로 희양산문을 구산선문의 마지막 주자로 보기도 한다.
* 유홍준 교수가 절 안내문을 두고 주지스님과 얼굴을 붉혔다는 그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학승(學僧)의 선원(禪院)으로 운영되어 그나마 아무 때나 들어갈 수도 없는 곳이 됐다. 보물 169호 봉암사 삼층석탑은 불국사 석가탑과 쌍벽을 이루며 완전한 형태로서 보전된 통일신라시대의 수작(秀作)이다.
* 봉암사 지증대사탑는 창건주인 지증대사 도헌의 승탑이다. 지증대사는 882년 입적했고 승탑은 이듬해 조성됐다. 최치원이 탑비를 쓰며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고 표현했다는 바로 그 스님의 것이다. 높이 341cm로 탑신에 새긴 주악상(악기를 연주하는 여러 인물상)은 사실적이고도 미려하다.
4. 봉림산문(鳳林山門)
원감화상 현욱(玄昱, 787-868)과 진경대사 심희(審希, 855~923)에 의해 창원 봉림사(鳳林寺)에서 봉림산문이 개창됐다. 봉림사는 폐사된 후 일제 시대 때 진경대사탑과 탑비가 서울로 옮겨졌고, 삼층석탑은 타지로 팔려갔다가 돌아와 인근 초등학교에 놓였다. 개창자인 진경대사 탑비에 쓰여 있는 '□巳閏七月日重竪此刊'(□사윤칠월일중수차간)’이라는 중수 기록을 참고해 1797년(정조 21)까지는 절이 존속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보물 362호 봉림사 진경대사탑과 363호 진경대사탑비는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진경대사는 68세 되는 923년 입적했으며 승탑과 탑비는 이듬해인 934년(경명왕 8)에 세워졌다.
* 원감화상의 것으로 짐작되는 승탑을 여주 고달사지에서 찾을 수 있다. 고달사지 승탑이 원감화상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가 이곳에서 입적했기 때문인데 승탑의 미가 워낙에 빼어난 까닭에 당당 국보 제4호다. 국보 1,2,3호는 서울에 있고 그 4호가 여기 여주 고달사지에 있는 것이다.
5. 동리산문(桐裡山門)
위에서 언급한 산문으로 적인선사 혜철(惠哲, 785-861)에 의해 곡성 태안사(泰安寺)에서 동리산문이 개창되었다.
능파각은 절 입구 계곡에 놓인 다리 위의 누각으로 국내 유일한 것인데 신라시대에도 누각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능파(凌波)'는 '미인의 사뿐한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적인선사의 명명이라 한다. 그는 속(俗)에 속한 그 이름을 선과 속의 경계가 되는 다리의 이름으로 붙였는데, 그가 던진 이 화두는 21세기가 된 지금까지 풀지 못한 미스터리다.(해석은 넘치나 귀에 썩 와 닿는 것이 없다)
* 곡성군 관계자는 "적인선사탑은 불교사적 가치는 물론 문화적 가치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며 "전체적인 안정감과 함께 매우 단정한 품위를 지녔으며 통일신라 승탑 중 기단부에서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성요소가 손상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문화재"라고 가치를 설명했다. 높이는 310cm이다.
* 태안사 광자대사탑(廣慈大師塔)은 동리산문 2대 조사인 광자대사 윤다(允多, 864-945)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위 적인대사탑 및 연곡사 승탑을 계승한 모양새로 매우 아름다우나 시기는 한참 뒤진 고려 광종 원년(950) 때의 것이다. 보물 284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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