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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산선문과 조계종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21. 00:12

     

    앞서 신라 말의 선종 사찰인 구산선문을 다루며 곡성 태안사에 근거를 둔 동리산문(桐裡山門)까지 설명했다. 그런데 어떤 분이 "흔히 조계산문(曹溪山門)이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나라 선종의 대표주자인 조계종의 조계산문은 왜 구산선문에 들지 않느냐, 그럼 조계종은 언제 생겼느냐"는 질문을 해왔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했다. 조계종은 우리나라 불교의 얼굴로 불교계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는데 정확히 언제 생겼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조계종이 선종에 속하는 것은 분명하고, 한국의 선종은 앞서 말한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신라말에 육조혜능의 남선종을 터득해 귀국한 821년(헌덕왕 13)을 효시로 잡음이 통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조계종이 생겨났을 리 없을텐데 구산선문이 자리잡은 나말여초(신라말 고려초)에도 조계종은 없었다. 그러면 조계종은 나말여초의 시기를 훨씬 지나 생겨났다는 말일 터, 그래서 알아보니 조계종은 역시 나말여초가 지난 고려의 어느 시기에 성립된 선종의 종파였다. 

     

    그런데 당황되는 건 그것이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성립됐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통설은 보조국사 지눌(知訥, 1158~1210)이 순천 송광산(松廣山) 길상사에서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를 조직해 새로운 선풍(禪風)을 일으킨 것이 시초라는데,(이능화 ≪조선불교통사≫<보조후시설조계종조·普照後始設曹溪宗條>) 이 역시 정설은 아니다. 아귀도 맞지 않으니, 지눌이 송광산 길상사에서 수선사를 조직했다면 송광종(松廣宗)이 되어야 옳으며, 무엇보다 지눌은 물론, 그 후대에도 조계산 수선사를 조계종이라 지칭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송광산은 고려 희종 원년(1205)에 조계산으로 이름이 바뀐다.(송광산이 조계산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당연히 남종선의 육조혜능이 수도한 곳이 조계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조계산을 조계종의 원류로 볼 수가 근거가 생기지만, 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그 조계산은 어디까지나 수선(修禪)하는 사사(寺社)가 있는 장소의 산 이름이었지 종명(宗名, 종파의 이름)이 아니었다'고 명시하고 있다.(이상 '다음 백과') 그런데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의 설명은 이와 다르니 거기에서는 구산선문에 앞서 우리나라에 조계종이 있었다고 말한다. 

     

     

    남선종의 본산 광동성 소주 남화사(南华寺) 
    보림사는 남화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다리가 걸린 계곡이 조계(曹溪)이다. 
    선풍(禪風)은 사라지고 화려함만 남은 남화사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에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건너가 혜능대사의 남종선(南宗禪)을 체득하여 돌아와 구산에 선문을 세운 것이 구산선문(九山禪門)이다. 이 구산선문 선사들은 모두 혜능대사의 손상좌 되는 마조와 석두 법맥을 이었기에 공통분모는 혜능대사였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구산선문은 통칭해서 선종(禪宗)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 하거나 혜능대사와 연관하여 남종선(南宗禪) 또는 조계선(曹溪禪) 등으로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이 선종이 혜능대사 법맥에서 모두 기원하여 임제종ㆍ위앙종ㆍ운문종ㆍ조동종ㆍ법안종 등의 5가7종으로 분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산에 선문이 들어섰지만 조계종 단일 종파를 유지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종파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曹溪)’라는 최초의 표현은 887년 쌍계사 진감국사비문에 진감국사를 조계(혜능)의 현손이라 기록한 것이다. 이후 많은 선사들의 비문에는 공통적으로 조계 법손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조계종이라는 이름은 1172년 대감국사의 비문에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라는 구절이 나온다. 굴산선문이 조계종 소속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상으로 건너뛴다)

     

     

    쌍계사 진감국사비
    최치원이 쓴 진감국사비문  

     

     

    그래서 심도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싶어 이것저것을 찾아봤더니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에서 펴낸 <조계종사>에서는 이와는 또 다르게 조계종의 뿌리를 앞서 말한 도의선사에 두고 있었다. 위에서, 그리고 앞서 1편에서 말한 대로 도의선사는 우리나라의 첫 선승(禪僧)으로 최초의 선종 가람인 가지산 보림사를 연 염거와 체징의 스승이 되는 사람이다. 즉 도의가 중국의 남선종을 들여와 한국의 선이 시작된 만큼 조계종의 뿌리도 거기서 시작된다는 두루뭉술한 해석이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이것도 틀린 설명이다. 

     

    도의가 육조혜능의 남선종을 들여왔으며, 그 제자들이 장흥 보림사에 가지산문을 연 것은 맞지만 도의와 조계종과는 기실 아무 인연이 없다. 도의의 선맥(禪脈)은 염거와 체징이 개창한 가지산문에 이어졌으나 이것이 지눌에 닿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지눌의 연기(緣起)를 좇자면 오히려 오늘 이야기하려는 굴산사 사굴산문에 닿아 있다. 신라말 범일(梵日)이 개창한 강릉의 사굴산문은 크게 번창하여 범일의 문하에서 개청(開淸) · 행적(行寂) 등의 이른바 10대 제자가 나왔고, 개청의 문하에서 다시 신경(神鏡) · 총정 · 월효 · 환언(奐言) · 혜여(惠如) · 명연(明然) · 홍림(弘琳) 외 수백인의 제자들이 나왔으며, 행적의 문하에도 신종(信宗) · 주해(周解) · 임엄(林儼) · 양경(讓景) 등 500여 명의 제자가 나와 종파를 전승하였는데, 지눌은 개청의 문맥을 이은 종휘(宗輝) 아래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종은 기존의 교조적 가르침의 교종과 달리 이른바 '의발의 전수'로 법통을 이었으므로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수행법을 전수하는 조사선(祖師禪)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 뿌리를 중시하는 것인데, 오늘은 조계종의 뿌리가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에 있다는 것만 명시하고,(그래서 지눌이 만든 조계산 수선사를 '굴산파 제 2본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구산선문에 대한 약술(略述)을 잇기로 하겠다. 

     

     

     

    6. 성주산문(聖住山門)

    무염(無染, 800-888)에 의해 보령 성주사(聖住寺)에서 성주산문이 개창되었다. 백제 시대 오합사(五合寺)라는 이름으로 있다 백제 멸망 후 유명무실해진 절을 낭혜화상 무염이 중창시켰다. 보령 지역의 호족으로 신무왕을 즉위시켰던 김양(金陽)의 지원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구산산문 중 강릉 사굴산문과 함께 가장 번성해 2,000명의 승려를 헤아렸으나 임진왜란 이후 소실됐다. 

     

     

    성주사지
    성주사지 낭혜화상비(국보 제8호) 

    * 옛 명성에 걸맞게 남아 있는 절 터가 무려 7만㎡에 이른다. 그 폐허에 낭혜화상 무염의 비문인 낭혜화상비가 홀로 온존하다는 게 경이롭다. 이 비는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유명한 '사산비명(四山碑銘)' 가운데 하나인데, 남포 오석의 단단함으로 5,120자 전 글자의 판독이 가능하다. 탑비의 높이는 2,63cm, 폭 148cm로 사산비명 가운데서 가장 웅대하다.  

     

     

    7. 사자산문(獅子山門)

    철감선사 도윤(道允, 798-868) · 징효대사 절중(折中)에 의해 영월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이 개창되었다. 사자산 흥령사는 이후 자장율사가 머물며 수도하기도 했으나 이후 폐사되었다가 일제시대 때 법흥사라는 이름으로 중건되었다. 법흥사는 부처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는 이른바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나 옛 흥녕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징효대사탑만 덩그러니 전한다. 

     

     

    징효대사탑(출처: '석탑이 보이는 풍경')
    쌍봉사 철감선사탑

    * 철감선사 도윤은 868년 화순 쌍봉사에서 입적했으며 그의 사리를 안치한 쌍봉사 철감선사탑이 조성됐다.이 승탑은 신라 승탑의 최고봉이라고도 할 수 있는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해 일찌기 국보 57호로 지정됐다.

     

     

    8. 사굴산문(闍崛山門)

    범일(梵日, 810-889)에 의해 강릉 굴산사(崛山寺)에서 사굴산문이 개창되었다.(847년) 도굴산문, 도굴산파, 사굴산파로 불려지기도 하며 9산선문 가운데 가장 번창하였으나 옛 영화가 무색하게 지금은 석물 몇 개와 거대한 당간지주만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굴산사 종(鐘)에 관한 김극기의 시가 전해지나 절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조선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굴사사는 명주(溟州) 지방의 풍요와 명문 호족 김순식의 지원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으며, 범일국사의 법통이 불일(佛日, 지눌)국사로 이어졌다 하여 조계종의 뿌리로 여기기도 한다. 이에 범일의 가르침을 따로 굴산종으로 부르기도 하나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한 글자도 전하지 않아 그저 공허할 따름이다. 굴산은 지금의 지명, 학산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범일국사의 것으로 여겨지는 승탑(보물 제85호)
    국내 최대(5.4m)의 굴산사 당간(보물 제86호)

     

    2011년 발굴조사에서 ‘五臺山 金剛社’(오대산 금강사)명 기와가 발견돼 훗날 지눌이 만든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와 같은 결사체의 전신이 조직되었음을 짐작케 해주는데, 요나라가 사용한 연호 '천경'(天慶', 거란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1111년부터 1120년까지 사용한 연호)이 새겨진' 天慶三年’(천경삼년, 1113년)명 기와가 나온 것도 이채롭다.

     

     

    '오대산 금강사'명 기와 
     '굴산사'명 기와  
    '천경삼년'명 기와

      

     

    9. 수미산문(須彌山門)

    진철대사 이엄(利嚴, 869-936)이 당나라에서 돌아오자 그 명성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해주 수미산 자락에 광조사(廣照寺)를 창건하여 그를 주지로 모셨다. 이엄의 제자로는 처광, 도인, 경숭, 현조 등이 있었으나 자세한 연혁은 전하지 않으며,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존재가 언급돼 있다. 일설에는 1800년대 말까지 존속했다고 전한다.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출처: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신라말 3최'의 한 명인 최언위가 비문을 지었고 '고려초 3필(筆)'의 한 명인 이환추가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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