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선종의 원류 1 - 조계종은 어디서 왔는가?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2. 23. 08:42
선(禪)이라는 말은 남방불교 언어인 팔리어(語)의 지아나(jhna)에서 유래됐다. 지아나를 중국 남조의 스님들이 경(經)을 번역하며 선나(禪那)라고 음차한 것인데 전승과정에서 나(那)가 탈락되고 선(禪)만 남게 된 것이다. 이는 탑(塔)의 전승과정과도 비슷하니, 인도 산치 지방에서 처음 만들어진 Stupa라는 말이 중국에서 탑파(塔婆)가 되었다가 탑이 된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산스크리트어로는 디야나(dhyana)라는 유사한 발음인데 중국에서는 태연나(馱演那)로 음차됐고, 쿠마라지바(鳩摩羅什)는 발음보다 '깊게 생각하다'라는 뜻에 비중을 두어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했으며, 현장(玄奘)은 '고요한 생각'이라 하여 정려(靜慮)라고 의역했다. 하지만 보리달마(菩提達磨) 이후의 선종이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최고의 경지로 삼으며 본래의 필리어 발음이 활용되어졌던 바, 선(禪)이 되었고, 지금은 그 일본어 발음인 Zen이 국제적인 용어로 쓰인다.
굳이 해석하자면 '고요하다'라는 뜻인데, 마찬가지로 '생각'에 기반을 뜻을 두고 있다. 즉 선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법으로서, 초기의 관념적 개념이 육조혜능 시대에 이르러서는 보편적인 수행법과 깨우침을 아우르는 수증관(修證觀)의 의미로 확대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우리게 쉽게 볼 수 있는 좌선(座禪)은 그 오래된 방법론의 하나이니, 문자 그대로 고요히 앉아 명상하며 깨달음을 얻으려는 모습인 것이다.(그렇다고 서서 하는 사유가 불가능하거나 선이 아닌 것은 아니다)
키질석굴과 쿠마라지바상
쿠차국(현재의 신장 쿠차)에서 태어난 쿠마라지바(344-413)는 인도에서 불법을 배워와 고국에 대승을 설파하던 중, 384년 쿠차로 쳐들어온 중국 후량(後涼)의 장군 여광(呂光)의 포로가 되었으며, 이후 장안에서 약 300권의 불교 경전을 한역(漢譯)하며 불교 보급에 이바지하게 된다.
현장법사상과 대안탑
현장(602-664)은 본래 당(唐)의 유학자였으나 서촉(西蜀)에서 불경을 접한 후 불제자가 된다. 이후 불경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제(諸) 경전의 모순과 상이점을 빌견하고 이를 밝히고자 자신이 직접 인도로 가 520질 657부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경전을 가지고 귀국한다. 그 경전을 보관한 탑이 서안(西安) 대안탑(大雁塔)으로 현장은 평생을 이 경전의 한역(漢譯)에 매달리는데, 그 전의 것을 '구역', 현장 이후의 것을 '신역'이라 부른다.
현장은 불교경전인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에 모두 능해 삼장법사라고도 불린다. <서유기>는 그가 불경을 구하러 인도를 왕복하는 16년간의 고생길을 명나라 작가 오승은이 81가지 고생을 창작해 소설로 꾸몄다.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그와 동행하며 요괴들을 물리친다.
이와 같은 선의 수행법은 본래 불교에서는 있지 않았고 아마도 달마대사가 보리수 밑에서 사유하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의 방법을 벤치마킹해 그 수행법을 퍼뜨리지 않았나 생각된다. 6세기 초 달마는 이 수행법과 함께 동쪽으로 왔으나 그때까지 경(經)의 사고만을 부처의 가르침으로 생각하던 중국인에 있어 그의 방법은 통하지 않았던 바, 결국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에서 면벽(面壁) 9년의 수행법을 몸소 실천하고 나서야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수행법이 궁금했던 혜가가 눈 속에서 팔을 자르고 나서 그 법을 전수받았다는 얘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이처럼 중국에서의 선은 불교의 전래와 함께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후 오백여 년이 지난 양(梁)나라 무렵 달마가 새로운 수행법을 가져옴으로써 시작됐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불교 전래 사백여 년이 지나서야 선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이 앞서 말한 신라 말의 구산선문(九山禪門)으로 신라의 유학승들이 당나라에서 선지식을 배워오며 시작됐다. 이름하여 선종이다. 그런데 대한불교 조계종에서는 나말여초의 스님들이 중국에 건너가 조사선(祖師禪)*을 체득하여 돌아와 구산선문을 세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들 조계종은 구산선문보다 앞섰다고 말한다. 홈페이지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다'는 것이니 그 내용은 다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불경의 뜻풀이에 매이지 않고 바로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선법
신라 후기에서 고려 초에 많은 스님들이 중국에 건너가 혜능대사의 남종선을 체득하여 돌아와 구산에 선문을 세운 것이 구산선문이다. 이 구산선문 선사들은 모두 혜능대사의 손상좌 되는 마조와 석두 법맥을 이었기에 공통분모는 혜능대사였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 구산선문은 통칭해서 선종(禪宗) 또는 조사선(祖師禪)이라 하거나 혜능대사와 연관하여 남종선(南宗禪) 또는 조계선(曹溪禪) 등으로 불리었다. 중국에서는 이 선종이 혜능대사 법맥에서 모두 기원하여 임제종ㆍ위앙종ㆍ운문종ㆍ조동종ㆍ법안종 등의 5가7종으로 분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구산에 선문이 들어섰지만 조계종 단일 종파를 유지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조계종은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종파 이름이다.
우리나라에서 ‘조계(曹溪)’라는 최초의 표현은 887년 쌍계사 진감국사비문에 진감국사를 조계(혜능)의 현손이라 기록한 것이다. 이후 많은 선사들의 비문에는 공통적으로 조계 법손이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조계종이라는 이름은 1172년 대감국사의 비문에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라는 구절이 나온다. 굴산선문이 조계종 소속임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다.(※ 설명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통일신라 말기의 사회상으로 건너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진실의 왜곡이요 역사의 왜곡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먼저 조계종에서 언급한 쌍계사 진감국사비문에 대해 설명하자면, 최치원이 비문에서 진감국사 혜소(慧昭, 774-850)를 '조계(육조혜능)의 현손'이라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오류를 발견할 수 없다. 아울러 '이후 많은 선사들의 비문에서 공통적으로 조계 법손(法孫)이다'라고 한 기록 역시 옳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조계종의 뿌리로 보아도 무방하다.
선종의 경우, 석가모니의 깨침인 정법안장(正法眼藏)의 계승에 있어 그 제자를 통해 불립문자(不立文字)로서 전승하는 이른바 조사선을 법통으로 여기는 까닭에, 중국에서 혜능(중국 선종의 6대 교조이므로 육조혜능이라 불리나 조계산에서 수도한 까닭에 조계대사라고도 불린다)의 제자에게 사사한 신라 유학승을 '조계(대사)의 현손'이라 부름을 잘못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속사(斷俗寺) 대감국사 비문의 ‘고려국조계종굴산하단속사대감국사(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의 내용을 들어 '신라 구산선문이 공히 조계종 소속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식의 소치이거나 아니면 그 연대를 기존의 구산선문보다 올려 잡으려는 고의적인 오류이다. 그 오류를 지적하기 전에 먼저 단속사와 대감국사비문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듯하니, 우선 신라시대의 단속사는 육조혜능의 법통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절이었다.
<삼국유사>에는 단속사의 창건 시기에 대해 신라 효성·경덕왕 때(717- 765) 인물인 신충(信忠)이 건립했다는 설과 경덕왕(742-765) 때의 이준(李俊)이 발원하여 건립했다는 두 가지 설을 실어놨는데, 어느 쪽이 됐든 765년 이전에 건립된 것은 확실하다. 구산선문과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에서 북종선(北宗禪)*을 배우고 돌아온 신행(神行)이 단속사에서 수행하다 입적했던 바,(혜공왕 15년/779) 단속사를 선종 사찰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혜능의 남종선**과는 법통이 다른 북종선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또 신행은 귀국 후 단속사에 들어오기 전에도 청도 호거산(虎踞山)의 법랑(法郞)***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전해지므로(봉암사 지증대사탑비) 이 사실이 더욱 명확하다. 아울러 단속사는 이후 남종선의 9산문에도 등장하지 않는 바, 구산선문과는 무관한 북종선의 사찰로 종속하다 고려시대를 맞은 걸로 보인다.
* 달마, 혜가, 승찬, 도신을 거쳐 제5조 홍인(601~674)에서 신수(?~706)로 이어지는 선종의 초기 계파. 능가경(楞伽經)을 근본경전으로 삼고, 화두를 갖지 않은 채 모든 생각을 끊고 행하는 묵조선(默照禪)을 기본수행법으로써 단계적 깨달음인 점오(漸悟)를 지향한다.
** 육조혜능(638-713)에서 하택신회, 남악회양, 청원행사로 퍼져 이어지는 선종의 후기 계파. 금강경(金剛經)을 소의경전으로 삼고, 화두를 가지고 사유하는 남돈선(南頓禪)과 간화선(看話禪)을 기본수행법으로써 즉각적인 깨달음인 돈오(頓悟)를 지향한다.
*** 법랑은 그 생몰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최치원이 지은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법랑이 북종선의 4조 도신에게 법을 배운 것으로 되어 있는데, 최근 중창복원된 중국 호북성 황매현(黃梅縣) 사조정각선사(四祖正覺禪寺, 4조 도신이 주석했던 절)의 대웅전에서 신라승 법랑의 이름이 발견됐고 또 절 내 언덕에 있는 11m 높이의 비로탑(毘盧塔)에서 도신의 진신상과 5조 홍인, 우두종(牛頭宗, 중국 선종의 계파)의 초조(初祖) 법륭, 그리고 신라승 법랑 등 6인의 조각상이 발견되었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하고 다음 회에서 조계종단이 '구산산문이 조계종에 속했다'고 주장하는 단속사 대감국사 비문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해보려 하는데, 그에 앞서 아래 비문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감국사 비문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 터에 있던 대감국사 탄연(坦然, 1069~1158)의 비석으로 1172년(명종 2)에 세워졌으나 현재 비는 없어지고 없고 비의 탁본만이 문경 금룡사(金龍寺)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한다. 그외 신라 말 북종선 선사(禪師) 신행(神行)의 비문이 전하는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대감국사비 전문
高麗國曹溪宗崛山下斷俗寺大鑑國師之碑銘幷 序
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修國史兼太子大師致仕臣李
之茂奉 宣撰
普賢寺住持大悟重大師臣機俊奉 宣書幷題額
詳夫佛法流入震旦厥惟久矣然自漢永平以來歷魏晋齊梁世之號爲浮圖氏者率皆梏于經律滯於名相莫知有所謂敎外別傳之妙理直指人心固可以見性成佛也迨乎菩提達摩自西土以大衣寳鉢親付神光然後正法眼藏方傳于世祖祖相授燈燈不熄東漸于海爰及我邦惟是如來大光明藏寥廓無邊含攝諸法大無不包細無不入非思念擬議之所能及語言文字之所能詮不可以知知不可以識識非具燦迦羅眼者孰能得與於此哉其有探最上乘了第一義橫截衆流直超彼岸十方吐廣舌之相一吸盡西江之流開甘露門作獅子吼▨▨大事之因緣興 群生之利益直與諸佛齊肩而使天下後世不可跂而及者豈不卓然奇特歟惟我大鑑國師卽其人也以宗派考之師乃臨濟九代孫也師諱坦然俗姓孫氏其先▨陽縣人也父肅以軍功爲校尉母則安氏女也師生有異質志氣不群年甫八九歲解屬文作詩有驚人語又工於書時以爲千里駒十三學六經粗通大義十五補明經生有聲於世老儒無不推重肅王在藩邸雅聞其賢招致宮中俾侍世子不令一日離去世子卽睿王也師蚤有出塵之志視身世如浮雲棄名利若弊屣甞與師素保玄二高士遊洎聞師安先已披剃則潜出宮經往京北山安寂寺從寺主落髮時年十九也師素慕禪悅乃就廣明寺依慧炤國師服勤承事遂傳心要於是遊歷諸方遍叅禪肆叢林學者咸▨▨以母老不忍違去左右求得外山小寺奉養不復遠遊肅王踐祚徵赴輦轂十年大遼乾統四年甲申赴大選復中是年命住中原義林寺 睿王卽政尤加愛重元▨▨大師三年丁亥遷住開頓寺四年戊子加重大師十年甲午特授三重大師仍賜法服十三年丁酉住禪巖寺十六年庚子制加禪師仁王元年壬寅特賜帖繡袈裟五年丙午詔住天和寺六年丁未移住菩提淵寺七年戊申春師奏請於所住開張法會此山素多蛇虺頗爲行旅所患自法會後莫知去處至今山下人相傳以爲異事▨▨▨▨▨▨▨▨▨和寺是年秋上幸是寺詔師從容問道親以金剛子數珠授之師卽口占一首奏謝上歎其敏妙十年辛亥制加大禪師續金襴袈裟十四年乙卯住普濟寺帝釋院兼住瑩原寺九月師詣瑩原寺十六年丁巳被詔還京闕十八年己未移住廣明寺師之德行道譽爲世所仰每國大事上必以御筆諮問于師由是名▨嘗寫所作四威儀頌併上堂語句附商舶寄大宋四明阿育王山廣利寺禪師介諶印可
諶乃復書極加歎美僅四百餘言文繁不載又有道膺膺壽行密戒環慈仰時大禪伯也乃致書通好約爲道友自非有德者豈能使人響慕如此哉二十四年乙丑上尊師道德四月七日右副承宣李舖予傳宣以致師事之意席不▨▨遣知奏事金永寬繼傳上意師復牢讓至于再三然上亦勤請不已是時彗星出已經二十餘日而又大旱朝野憂懼五月六日始降請封王師書是▨▨王師卽於是日天乃大雨上謂封崇耆德所致益加信嚮厥明就金明殿行北面摳衣之禮九月七日師人普濟寺十一月五日宸駕幸於寺以▨致謁▨造赤黃羅地繡帖袈裟上之敬仰歸重之意實有加而無已也今上繼志禮待彌厚特遣▨臣上金襴袈裟以表其德二年丁卯師乞歸老于晋州斷俗寺▨留京而師意益堅上不得已蹔許歸休師旣得請三月五日出寓天和寺上又欲瞻禮乃迎入于廣明寺師浩然之志不能自已至七月十三日潜發便抵▨上知不可以勸留乃遣中貴人金存中右街僧錄翰周陪行九月三日入寺師雖退處山林祝聖之誠日益彌篤上心眷顧亦不少衰頻遣王人以致▨▨之禮以其天性好善誨人不倦故玄學之徒雲臻輻湊所至不減數百人其升堂入室傳心得髓爲時宗匠者亦多矣遂以大振宗風光揚祖道重興東國之禪門師有實力焉在人口流傳四方札翰精妙▨出古人得者以爲至寶九年甲戌甞病起有偈云廓落十方界同爲解脫門休將生異見坐在夢中魂十三年戊寅六月四日復示疾至十五日囑門人曰吾之歸處我自知之汝等各自務全道力愼勿隨世俗例煩飾冥禮仍說偈言聖辰▨▨獨玩心宗廓然快樂遊泳淸風偈畢端坐义手而化顔色如平日春秋九▨▨天無雲氣唯此一洞忽然大雨俄頃雨止有五色氣橫亘洞中門人奉遺狀印寶乘驛來奏上聞訃悲悼卽遣內臣韓就日者陰仲寅等往護葬事七月十五日備禮加大鑑十六日茶毘于晋州少男驛之北岡二十八日葬骨于斷俗寺北獨立山顚門人等以立碑事上請上命臣之茂以銘臣不材曷足以形容大師之美躅以詔後世嚴命旣下不獲固辭姑據門人所錄行狀强爲序而銘之銘曰 正法眼藏不可思議如來付囑擧花以示二十七祖繼繼相承達磨西來傳印曁能自玆以往有百千燈不須衣鉢各闡宗乘道被天下惟上之機克紹眞風偉我大師早依慧炤針水相投密傳心要遍遊叢席拔萃離倫屢遷名刹說法度人高提佛印重行祖令人天眼目名聲遠布達于中國如彼禪伯馳誠慕德道尊德貴爲萬乘師大雲普被甘露均滋厭喧京輦累乞歸休虛舟不繫飛錫難留退處山林▨▨▨▨隨緣放曠一無所求年至九十俄然示疾跏趺入寂顔如平日藹藹淸芬 巍巍高躅刋石爲碑揭于斷俗
大金大定十二年壬辰正月 日 門人住持虛淨三重大師臣淵湛奉宣立石
大師懷亮參學處端等刊字'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차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동해(東海)해전 (0) 2021.03.07 제 3차 영일동맹과 칭다오 맥주 (0) 2021.03.06 구산선문과 조계종 (0) 2021.02.21 태안사 적인선사탑과 신라 구산선문 (0) 2021.02.17 '국가 없는 의사회' 성 요한 기사단 (0) 2021.0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