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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영일동맹과 칭다오 맥주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3. 6. 03:40
오래전, 일본에서 마셔 본 아사히 슈퍼드라이의 맛에 놀란 기억이 있다. 당시는 요즘처럼 외국 맥주를 쉽게 맛볼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던지라 애오라지 오비와 크라운 맥주만을 마셔야 했다. 까닭에 처음 외국에 나가 마셔본 맥주 맛에 놀란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아사히에 이어 기린, 삿포로 맥주를 맛보았을 때는 기어코 화가 났다. 왜 우리는 이런 맥주를 만들지 못하는가 하는 생각에.....
그래도 수긍은 되었다. 당시의 일본과의 현격한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될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0여 년 전쯤, 양꼬치 붐이 불기 시작할 무렵에 맛본 중국의 칭다오(靑島) 맥주에 대해서는 정말로 미스터리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칭다오 맥주 맛을 보았을 때의 첫 느낌은 '이건 대체 뭐지?'였다. 분명 중국산인데 중국산이 아닌 것 같은 맛을 내는 맥주..... 중국 맥주 칭다오는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그 맥주는 한때 하이네켄을 제치고 수입 맥주 판매 1위에 올랐었다. 이후 아사히에 곧 1위 자리를 내주었지만 최근 반일 감정 탓에 아사히를 비롯한 일본 맥주들이 10위권 밖으로 밀려난 사이 다시 반등을 노리고 있다. 다만 반중 감정도 만만치 않은지라 예전의 영광을 회복하기는 힘들겠지만, 어찌 됐든 '중국산 칭다오'의 선전(善戰)은 놀랍다. 그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이른바 중국의 저력일까?
살펴보니 중국의 저력은 가당치도 않는 일이었고, 차라리 독일의 저력이라면 말이 될 듯했다. 칭다오 맥주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 칭다오(청도) 지역을 점령했던 독일인이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그 맥주가 대한민국 국민의 입맛에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지금의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이유는 1902년 체결된 영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이른바 제3차 영일동맹의 결과였다. 한마디로 칭다오 맥주는 제국주의 시절 열강에 휘둘리던 허약한 중국의 뜻밖의 전리품인 바, 그 역설적 스토리는 대강 다음과 같다.
1898년 제국주의 독일은 중국 산동반도 교주만(膠州灣) 일대의 땅 552㎢를 조차(租借)했다. '조차'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양측의 조약에 의해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영토의 일부를 일정 기간 빌려서 통치함'으로 되어 있지만 당시의 중국은 교주만 일대를 빼앗겼다 봄이 옳을 것이었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의외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독일은 1897년 11월에 일어난 독일인 선교사 피살사건을 핑계로 자국의 군대를 파견해 교주만에 주둔시키고, 이듬해 3월 청나라 정부를 윽박질러 칭다오 시가 속해 있는 '키아우초우'(교주의 독일식 발음)에 대한 99년간의 조차 계약을 성사시킨 것이었다.청·독의 조차 계약의 결과, 독일 측은 조차지는 물론 그 주위 50km 중립 지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나아가 독일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산동반도 일대의 철도 부설권 2건과 광산·탄광 채굴권을 얻어냈던 바, 지금 산동성의 대부분이 독일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독일은 교주만에 새로운 동양 식민지를 만든 셈이었는데, 덤으로 칭다오 라오산(崂山)의 풍광과 빼어난 물맛의 광천수를 얻었다. 그리고 그 물맛은 독일과 영국 장사꾼의 입맛을 자극하였던 바, 1903년 8월 독일과 영국의 합작 맥주회사인 '게르만맥주 칭다오공사'가 설립되었다. 중국 최초의 맥주 회사였다.
'게르만맥주 칭다오공사'는 곧 독일에서 생산설비와 원재료를 들여와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산 개시 3년만인 1906년, 독일에서 열린 뮌헨국제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독일의 기술력과 라오산 광천수의 빼어난 물맛이 합작된 결과였다. 이후 칭다오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나 그 영화는 채 10년이 이어지지 못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제3차 영일동맹)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고, 일본군은 영국군의 지원 하에 산동반도 키아우초우에 진군하여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아래 <매일신보>의 광고는 그 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위력에 자의반 타의반의 합작광고가 실리게 된 것이었다.
그 2년 뒤인 1916년 9월 '대일본맥주 주식회사'가 '게르만맥주 칭다오공사'로부터 주식을 헐값에 매입했다. 그리고 회사 이름을 '대일본맥주 주식회사 칭다오회사'로 개명한 후 자금력을 쏟아부었다. 그 이름값을 살려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으로서 1924년 시설을 대대적으로 증설·개수하고 본격적인 양산 체제에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으니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회사는 난징 국민당 정부에 귀속되었으며, 이름도 '칭다오맥주회사'로 개칭되었다.
국민당 정부의 '칭다오맥주회사'는 일본이 막대한 자금과 기술력을 경주한 칭다오 맥주라는 유수의 브랜드를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얻은 셈이었다. 그러나 '칭다오맥주회사'의 행운 역시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니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칭다오맥주회사'는 중국 공산당의 국영기업이 됐고 명칭도 '국영 칭다오맥주공장'으로 개명되었다. 이후 중국 발전의 첨병에 선 '국영 칭다오맥주공장'은 1993년 6월 홍콩증시에 상장됐고 이어 8월에는 상하이증시에도 상장되었다. 중국 기업으로는 대륙과 홍콩에 동시에 상장된 첫 케이스였다.
독일의 기술력과 합작해 '칭다오 맥주' 브랜드를 탄생시킨 라오산의 광천수는 국민당 정부 생산 무렵 지하수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워낙 수요가 많아진 까닭에 광천수로는 생산량을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큰 투자를 해놓은 덕에 지하수로도 기존의 술맛을 유지할 수 있었고, 공산당의 산하의 '국영 칭다오맥주공장' 역시 순항하여 브랜드 가치만 최소 806억위안(약 13조원)에 달하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우리가 칭다오 맥주를 먹을 때 적어도 맛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인즉 그와 같은 파란의 곡절 때문이다.그렇다면 중국인도 칭다오 맥주를 좋아할까? 당연히 좋아하지만 1위는 아니다. 1위는 설화맥주(雪花啤酒, '쉬에화피쥬')로 블룸버그 리포트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맥주인데, 그렇다고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맥주는 아니다.(중국인구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계로.....) 우리나라에서도 당연히 살 수 있으며, 지금은 양꼬치 집에서 칭다오 맥주보다 더 많이 눈에 띄지만 대중적이지는 못하다. 싼 맛에 대중적이 될 듯도 한데 의외로 복병은 '설화수'라는 화장품을 생산하는 회사라고 한다.(아모레퍼시픽이 '설화'에 대한 상표등록을 화장품, 맥주, 주스 등에 대해 진즉에 해놓은 상태라 국내에서는 해당 상표명을 사용할 수 없다고.....)
아무튼 사정은 이러한데, 마셔본 결과로는 칭다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슈퍼 엑스(Super X)'라는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그밖에 '하얼빈 맥주', ‘옌징(燕京)맥주’도 눈에 띄는데, 이런 중국 맥주들을 수입·판매하고 있는 회사 중의 하나는 초지일관 밋밋한 맛을 견지하고 있는, 그래서 내가 일본에서 아사히 맥주를 마시며 문화 충격을 느껴야 했고, 양꼬치 집에서 중국 맥주에까지 놀라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던 그 회사라는 사실이 또다시, 그저 놀라울 뿐이다. 한국 맥주가 여전히 맛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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