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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차 영일동맹과 러일전쟁 동해(東海)해전
    잘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 2021. 3. 7. 03:34

     

    1902년 1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일본 전권대사 하야시 다다스(林董)와  영국 전권대사 랜즈다운(Lansdowne =Henry Charles Keith Petty) 간의 양국 국제동맹이 체결되었다. 이것이 영일동맹(Anglo-Japanese Alliance)으로, 이 조약 하나로 동양의 작은 나라 일본은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제 사회의 중추국가로서 부상했다. 이 조약의 파급력이 얼마나 컸는지는 이에 놀란 러시아가 그해 3월 프랑스와 서둘러 동맹을 맺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이유인즉 청국과 조선을 먹겠다는 것과, 그에 방해되는 러시아를 견제하겠다는 데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영문과 일어로 각각 작성된 아래 조약문의 서두와 제1조에 명시돼 있는 바, 다만 그 상대국인 '러시아'가 명시돼 있지 않다 뿐, 러시아를 겨냥해 체결된 방수동맹(防守同盟)*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6개조로 구성된 이 동맹 협약에서 일본은 중국과 조선, 영국은 중국에서의 배타적 이익을 인정받았다. 아울러 한쪽이 다른 나라와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은 엄정중립을 지키며, 한쪽이 2개국 이상과 교전할 때에는 동맹국이 합동해 전투에 임한다는 내용을 명시하였다.

     

    * 위의 방수동맹(두 나라 이상이 제삼국의 공격을 공동으로 막기 위하여 맺은 동맹)은 국제조약의 일반적 원칙에 입각해 작성된 5년 기한의 완곡한 조약이었으나, 그 기한이 도래하기 전인 1905년(8월 12일) 양국은 방수동맹을 공수동맹(攻守同盟)으로 바꾼다. 즉 '동맹국이 한쪽의 다른 1국과 전쟁을 하는 경우도 동맹국이 참전하기로 한다'는 것으로 내용을 격상시키며 더욱 관계를 긴밀히 하는데,(제2차 영일동맹) 아울러 이때 일본의 조선 보호권이 확인되고 공수동맹 적용 범위가 미얀마·인도까지 확대된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영국과의 공수동맹을 바탕으로 조선과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대한제국 최후의 날')

     

    이상이 이른바 제1차 영일동맹으로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日本國政府及大不列顛國政府ハ偏ニ極東ニ於テ現狀及全局ノ平和ヲ維持スルコトヲ希望シ且ツ清帝國及韓帝國ノ獨立ト領土保全トヲ維持スルコト及該二國ニ於テ各國ノ商工業ヲシテ均等ノ機會ヲ得セシムルコトニ關シ特ニ利益關係ヲ有スルヲ以テ茲ニ左ノ如ク約定セリ

    • 第一條 兩締約國ハ相互ニ清國及韓國ノ獨立ヲ承認シタルヲ以テ該二國孰レニ於テモ全然侵略的趨向ニ制セラルルコトナキヲ聲明ス然レトモ兩締約國ノ特別ナル利益ニ鑑ミ卽チ其利益タル大不列顛國ニ取リテハ主トシテ清國ニ關シ又日本國ニ取リテハ其ノ清國ニ於テ有スル利益ニ加フルニ韓國ニ於テ政治上并ニ商業上及工業上格段ニ利益ヲ有スルヲ以テ兩締約國ハ若シ右等利益ニシテ列國ノ侵略的行動ニ因リ若クハ清國又ハ韓國ニ於テ兩締約國孰レカ其ノ臣民ノ生命及財産ヲ保護スル爲メ干涉ヲ要スヘキ騷動ノ發生ニ因リテ侵迫セラレタル場合ニハ兩締約國孰レモ該利益ヲ擁護スル爲メ必要缺クヘカラサル措置ヲ執リ得ヘキコトヲ承認ス
    • 第二條 若シ日本國又ハ大不列顛國ノ一方カ上記各自ノ利益ヲ防護スル上ニ於テ列國ト戰端ヲ開クニ至リタル時ハ他ノ一方ノ締約國ハ嚴正中立ヲ守リ倂セテ其ノ同盟國ニ對シテ他國カ交戰ニ加ハルヲ妨クルコトニ努ムヘシ
    • 第三條 上記ノ場合ニ於テ若シ他ノ一國又ハ數國カ該同盟國ニ對シテ交戰ニ加ハル時ハ他ノ締約國ハ來リテ援助ヲ與へ協同戰鬪ニ當ルヘシ講和モ亦該同盟國ト相互合意ノ上ニ於テ之ヲ爲スヘシ
    • 第四條 兩締約國ハ孰レモ他ノ一方ト協議ヲ經スシテ他國卜上記ノ利益ヲ害スヘキ別約ヲ爲ササルヘキコトヲ約定ス
    • 第五條 日本國若クハ大不列顛國ニ於テ上記ノ利益カ危殆ニ迫レリト認ムル時ハ兩國政府ハ相互ニ充分ニ且ツ隔意ナク通告スヘシ

    第六條 本協約ハ調印ノ日ヨリ直ニ實施シ該期日ヨリ五箇年間效力ヲ有スルモノトス若シ右五箇年ノ終了ニ至ル十二箇月前ニ締約國ノ孰レヨリモ本協約ヲ廢止スルノ意思ヲ通告セサル時ハ本協約ハ締結國ノ一方カ廢棄ノ意思ヲ表示シタル當日ヨリ一箇年ノ終了ニ至ル迄ハ引續キ效力ヲ有スルモノトス然レトモ右終了期日ニ至リ一方カ現ニ交戰ナル時ハ本同盟ハ講和結了ニ至ル迄當然繼續スルモノトス

     

    Article 1

    • The High Contracting parties, having mutually recognised the independence of China and Korea, declare themselves to be entirely uninfluenced by aggressive tendencies in either country, having in view, however, their special interests, of which those of Great Britain relate principally to China, whilst Japan, in addition to the interests which she possesses in China, is interested in a peculiar degree, politically as well as commercially and industrially in Korea, the High Contracting Parties recognise that it will be admissible for either of them to take such measures as may be indispensable in order to safeguard those interests if threatened either by the aggressive action of any other Power, or by disturbances arising in China or Korea, and necessitating the intervention of either of the High Contracting Parties for the protection of the lives and properties of its subjects.

    Article 2

    • Declaration of neutrality if either signatory becomes involved in war through Article 1.

    Article 3

    • Promise of support if either signatory becomes involved in war with more than one Power.

    Article 4

    • Signatories promise not to enter into separate agreements with other Powers to the prejudice of this alliance.

    Article 5

    • The signatories promise to communicate frankly and fully with each other when any of the interests affected by this treaty are in jeopardy.

    Article 6

    • Treaty to remain in force for five years and then at one years' notice, unless notice was given at the end of the fourth year.

     

    영일동맹이 체결된 런던 랜즈다운 하우스
    랜즈다운 하우스의 1811년 풍경
    영국 근대문화유산인 랜즈다운 하우스의 현재
    E. 메리 가너가 그린 1935년의 랜즈다운 하우스
    영일동맹 문서

     

    잘 알려진 대로 이 동맹은 양국의 제국주의 정책을  상호 지원·보완하는 내용으로 성립되었기 때문에 러일전쟁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과거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최대 전리품인 요동반도를 손에 넣지 못한 아픔이 있었다.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조선과 청나라를 노리는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훼방을 놓은 탓이었다.(이른바 삼국간섭) 그들 세 강대국과 맞서 싸울 힘이 없었던 일본은 결국 눈물을 머금도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돌려줘야 했는데, 이에 절치부심의 노력 끝에 체결한 것이 바로 이 영국과의 동맹이었다. 

     

    앞서 말했듯 영일동맹에 놀란 러시아는 프랑스와 급히 동맹조약을 체결하였다. 하지만 프랑스는 당시 코친차이나(베트남) 경영에 매달리고 있었고, 유럽 내에서는 발흥하는 프로이센을 견제해야만 할 입장이었다. 이에 영국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던 프랑스는 오히려 영국과 동맹을 맺은 일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 되었던 바, 러시아가 애써 체결한 러·프 동맹은 별다른 빛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제정세가 이렇듯 일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일본 대본영에서는 야심찬 한편의 역전 드라마를 기획하였던 바, 다름 아닌 강대국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전쟁은 1904년 2월 8일과 9일, 중립지대인 조선 제물포항과  중국 내 러시아 조차지(租借地)인 랴오뚱반도 뤼순(旅順)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을 선제 공격하는 것으로서 시작됐다. 선전포고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뤼순항의 위치와 항공사진
    전투가 벌어졌던 요동반도 뤼순항
    전투가 벌어지기 전의 뤼순항 /러시아가 청나라에 조차했던 군항(軍港)으로 러시아 군함들이 보인다.
    불타는 뤼순항 / 1904년 2월 9일 새벽 4시,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뤼순항의 러시아군을 기습공격했다. 위 사진은 일본 군함의 포격으로 러시아군 석유 저장고에 화재가 발생한 광경이며 앞의 두 척의 배는 러시아 전함 팔라다호와 포베다호이다.
    침몰된 러시아 전함 팔라다호와 포베다호
    1901년에 찍은 바랴그호 / 뤼순 전투가 벌어진 1904년 2월 9일 하루 전인 2월 8일 오후 4시, 제물포에서 바랴그호와 일본함대의 첫 교전이 있었다.
    작살난 바랴그호 / 제물포 팔미도 해상에서 아사마 함을 비롯한 5척의 일본군함이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호와 포함(砲艦) 코레이츠호를 공격했다. 바랴그호와 코레이츠호는 큰 손상을 입고 소월미도 부근으로 피신하다 명예로운 자폭을 선택한다.
    바랴그호의 최후와 인천부두의 바랴그호 추모비
    2013년 방한한 푸틴 대통령은 1박2일의 짧은 일정에도 추모비를 찾아 헌화했다.
    바랴그호의 군함기(軍艦旗) / 침몰한 바랴그호에서 노획된 깃발이 인천시립빅물관에 보관돼 있다 2010년 러시아에 임대되었다.(257X200cm)

     

    1904년 2월 8일, 제물포항에서 벌어진 러일전쟁의 첫 해전을 서구에서는 제물포해전(The Battle of Chemulpo), 일본에서는 인천충해전(仁川沖海戰)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시작된 러일전쟁은 1905년 봉천 전투(2월 20일~3월 10일)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며 일본 쪽으로 추가 기우는데,(☞ '서울의 노기·乃木 신사') 그에 앞선 1904년 10월, 전쟁을 한방에 종식시키기 위한 러시아 정부의 모험 수가 던져진다. 유럽 발틱항에 있는 막강 발트함대를 뤼순으로 파견해 일전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물론 러시아가 원한 것은 일본에 대한 대승(大勝)이었고,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발트함대라면 충분히 기대를 걸어볼만한 일이었다. 이에 발트함대의 극동 파견은 결정되었고, 1904년 10월 15일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러시아 발트해의 리예파야항을 출발하였다. 그리고 북해와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양을 도는 2만9천km를 220일간 항해한 49척의 함선이 이듬해 5월 27일, 마침내 동해 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로제스트벤스키 총사령관

     

    그리고 발트함대는 곧 동해에서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일본함대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치게 되는데, 이 세기의 전투를 일본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를 비롯한 많은 글쟁이들이 글로 담았지만 나는 이제껏 송우혜의 짧은 글보다 더 잘 쓴 글을 보지 못했다. 신문에 연재된 관계로 제목은 '러일전쟁(3)-승패를 가른 대한해협전투'로 밋밋하지만 동해해전의 상황과 요점과 교훈을 오롯이 전달하고, 아울러 영일동맹의 위력을 유감없이 전달한 그 쫄깃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습기찬 안개가 자욱하게 수면을 덮은 대한해협의 어두운 바다 위로 거대한 전함과 순양함들 수십 척으로 이루어진 대함대가 이열 종대의 편제로 소리 없이 들어섰다. 세상에 이름을 떨치던 러시아의 발트함대였다.

    "이 바다만 지나면 우리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다!"

    러시아 수병들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주먹을 부르쥐었다. 발트해를 떠난 것이 그 전해 10월 15일. 러일전쟁 발발 직후였다. 함대가 아프리카 대륙의 마다가스카르에 기항했을 때 여순 함락 소식이 도착했다.

    더 이상 극동으로 가는 것은 군사전략상 무의미하니 발트해로 회항해야 한다는 의견이 러시아 정부 안에서 나왔지만, 결국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라는 결정이 나왔다. 220일간 '세상이 시작된 이래 어떤 군함도 시도한 적이 없는 항로'로 지구 둘레의 4분의 3에 가까운 2만9000㎞를 항행해온 수병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드디어 그날 낮에 양군이 격렬히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전투는 꼬박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의 총사령관이 탄 기함(旗艦)을 먼저 포격하여 지휘체계부터 마비시키려는 전략을 썼다.

     

     

    도고 사령관

     

    발트함대의 완패였다. 불과 이틀 만에 전 함대가 무너져 해상에서 사라졌다. 러시아측 자료는, 49척에 달했던 대함대에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한 군함은 겨우 3척이며 전사자가 5045명이었다고 기록한다.

    전사자 중에는 장교가 209명에 달했다. 발트함대의 총사령관인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까지 파편에 맞아 의식을 잃을 정도의 중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명실상부한 대참패였다.

    일본은 당시 일본군 사망자가 200명도 되지 않았다면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해전사에서 전무후무한 대승리"라고 극력 자찬하고 있다. 제1함대를 직접 통솔한 총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는 국가적 영웅이 되었다.

    발트함대의 명성은 허명이었는가. 어떻게 그처럼 맥없이 파멸했는가.

    대한해협 전투가 있기 전,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 중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일본 해군에 참패하리라고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다. 발트함대는 표트르 대제에 의해 1705년 11월에 창설된 이래 계속 함정과 군대가 보강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함대로서의 명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국 군사 전문가들이 그랬을 때, 일본측의 판단 역시 다를 리 없다. 전체 일본 국민이 발트함대와의 해전을 국가 흥망의 기로라고 느끼면서 엄청난 공포에 시달렸다. 진해만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발트함대와 싸우러 나가야 했던 일본 어뢰정 함장이 '세계 제일의 해군 장수인 이순신 장군의 영혼'에 승리하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빌고 출전했다는 일화는 당시 일본인들이 지녔던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드러내는 사례로 유명하다.

    발트함대를 무참히 무너뜨린 요인으로 두 개의 매우 큰 난관을 꼽을 수 있다. 하나는 두 대륙 사이의 엄청난 거리. 다른 하나는 당시 누구도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영일(英日)동맹'이다.

    러일전쟁이 벌어진 뒤, 러시아는 유럽의 발트함대를 극동의 전장에 투입하여 여순함대와 함께 일본군을 맞아 싸우게 하기로 결정했다.

    제국주의적 발상의 전형이었다.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격렬하게 진행되던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쟁탈 경쟁이 극동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 당시, 발트함대의 위용과 힘 역시 극동으로 옮겨서 사용하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정은 쉬웠으나 실행은 어려웠다. 발트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유럽대륙 북쪽 끄트머리 사이에 있는 내해로서, 거기서 출발한 대함대가 아시아 대륙의 극동에 있는 여순항까지 가는 바닷길은 멀고도 험했다.

     

     

    불타는 러시아 전함 / 러시아 발트함대의 전함 한 척이 대한해협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침몰하고 있다. 당시 세계 최강을 자랑하던 발트함대가 49척의 군함 중 3척만 남고, 전사자가 5000명을 넘는 참패를 기록함으로써 러일전쟁의 승부는 결정됐다.

     

    영일동맹은 대한제국과 중국 대륙을 노리던 일본의 집요한 노력에 의해서 탄생했다. 청일전쟁 뒤 삼국간섭의 치욕과 불이익을 당한 이래,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방어하는 울타리로 '동맹'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수년간의 집요한 노력 끝에 영일동맹이 성립되자 일본의 조야는 환희를 금치 못했다. 동맹의 효과가 세계의 눈앞에서 극채색 그림처럼 선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바로 발트함대의 기나긴 항해였다.

    세계 최강의 해양제국인 영국이 일본 편에 서자, 러시아 해군은 석탄과 기항할 항구를 구하기가 어려웠다. 군함들이 모두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선이던 당시, 석탄은 함대의 피와 같았다. 석탄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신예 전투함이라도 한낱 고철더미에 불과했다.

    일본의 동맹인 영국은 최고의 함정용 석탄으로 꼽히던 자국의 질 좋은 무연탄을 러시아 함대에 판매하기를 거부함은 물론, 중립국들의 석탄선이 러시아 함대에 영국산 석탄을 파는 것도 금했다.

    영국과 관련된 세계 각 항구의 기항까지 금했다. 영국을 의식한 많은 중립국 역시 교전 상대국으로 간주될까 우려하여 발트함대의 자국 항구 기항과 자국의 석탄선들에 의한 석탄 공급을 거부했다.

    오로지 독일 황제만이 러시아가 전쟁에 휘말려서 국력을 손상하는 것을 원하여 발트함대의 극동 파견을 적극 부추기면서 자국의 석탄선으로 러시아 함대에 석탄을 공급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래서 발트함대는 출항 전에 세계 지도를 펼치고 화력도 떨어지는 독일산 유연탄을 탑재할 수 있는 항구를 연결하여 항로를 정해야 했다.

    동양의 옛 전서(戰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무리 강한 활이라도 과녁이 너무 멀면 낡은 헝겊조차 뚫지 못한다"고 한다. 영일동맹의 비참한 희생자 발트함대가 목적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눈앞에 둔 해전에서 단지 이틀 동안에 완전히 격멸되자 '20세기의 문을 연 대전투'로 불렸던 러일전쟁은 종언을 고했다.

    냉엄하게 국익을 좇는 국제사회의 다툼에서 "적절한 동맹 하나는 격렬한 전쟁에서의 승리 이상의 실익을 준다"는 사실을 세계사의 매운 교훈으로 남겼다.(2004년 10월 6일 <조선일보> 역사다큐 '운명의 20년')

     

     

    일본 군함에서 관측된 발트함대 모습
    포격하는 일본함대
    일본 종군화가가 그린 침몰하는 발틱함대 전함 오스라비아호와 탈출하는 수병들

     

    을사늑약이 체결된 중명전 건물 /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제 거칠것이 없었으니 그해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겁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한다. 을사늑약의 요점은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은 주권 없는 국가가 되었던 바, 사실상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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