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대한제국 최후의 날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1. 23. 23:58

     

    대한제국의 운명은 러시아 발틱함대의 침몰과 함께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발틱함대가 일본해군에 박살나자 일본은 재빨리 미국에 종전(終戰) 회담 알선을 요청했다. 무엇보다 돈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1년 여의 전쟁 기간 동안 15억8,400만 엔이나 되는 전비(戰費)를 사용했는데, 예상했던 돈의 4배에 이르는 금액이었다.[각주:1]

     

    일본은 전비의 거의 전부를 영국과 미국에서 빌려온 차관으로 충당했으므로 더 이상의 전쟁이 지속되면 국가파산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일본의 입장을 적극 받아들여 뉴햄프셔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 양국의 대표들을 불러 모았다.

     

    일본은 당연히 승전국의 입장에서 전쟁배상금을 왕창 뜯어내려 했다. 하지만 러시아 대표 비테는 단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티며, 억울하면 다시 붙자고 을러댔다. 지금 건설하고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이 목전에 이르렀던 바, 그럴 경우 유럽에 있는 러시아의 병력을 극동으로 무제한 실어나를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결국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단 한 푼의 전쟁배상금도 뜯어내지 못했지만 대신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 만큼은 보장받았다. 이로써 종전이 선언되었으니 러시아 세력은 한반도에서 완전 철수하게 되었고, 루즈벨트는 이듬해 이 공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를 받게 된다.

     

     

    러일전쟁의 서막, 불타는 뤼순(旅順)항 / 1904년 2월, 일본이 인천항과 뤼순항의 러시아군을 기습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된다. 위 사진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러시아군 석유 저장고에 화재가 발생하는 광경이며 앞의 두 척의 배는 러시아 전함 팔라다 호와 포베다 호이다.  
    격침된  팔라다 호와 포베다 호 /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은 일본의 특기이다.(청일전쟁,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이 모두 이렇게 시작됐다)

     

    이제 일본은 대한제국을 족치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과거 삼국간섭[각주:2]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인지 대한제국에 대한 압박을 서두르지 않고 뒷문을 단단히 잠궜다. 그리하여 그해 7월 29일 도쿄에서 미국 육군대장 윌리엄 태프트와 내각총리대신 카쓰라 다로 간에 비밀협약을 맺어 조선과 필리핀에서의 배타적 권리를 상호승인했으며, 다음달 8월 12일에는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의 인도·버마 지배를 용인하고 대신 만주와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확보한다.(미국과 영국은 이때 일본을 도왔지만 태평양 전쟁 때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던 바, 필리핀과 버마 전선에서 호되게 당하게 된다)

     

    나아가 삼국간섭의 당사국인 프랑스, 독일에게도 조치를 취한 일본은 11월 9일 마침내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를 서울로 보내 조선과의 일방적 조약을 기도한다. 그들의 말로는 을사보호조약이고 우리 말로는 을사늑약(乙巳勒約)[각주:3]이다. 을사보호조약이란 을사년에 맺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드는 조약, 즉 외교권을 박탈하여 주권 없는 나라로 만들어 내정 간섭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조약을 말한다. 학계의 정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며, 1904년에 체결된 '제 1차 한일협약'에 이어진 조약이라 하여 '제 2차 한일협약'으로 부르기도 한다.

     

     

    러일전쟁 당시 서울에 입성한 일본군 /  삽화가는 구경하는 조선인과 외국인 앞에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대한제국 군인을 그렸다. 한 사람은 담뱃대를 물고 있고 다른 사람은 부산하게 호들갑을 떨고 있다. 
    1904년 체결된 한일의정서 /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부대신 서리 이지용 간에 체결되었다. 한일의정서란 한마디로 조선 전역을 일본의 군사기지로 쓸 수 있다는 협정이었다.  
    한일의정서를 체결한 이지용 /  체결 후 일제로부터 1만원(약 13억원)을 받은 이지용은 조선의 왕족으로 고종의 종질(5촌조카)이었다. 


    러일전쟁 중에 체결된 '제 1차 한일협약'은 일본이 정한 외교·재정 고문으로 하여금 외교와 재정을 관할하게 하는, 말하자면 대리인을 통한 간접 통치의 형식이라면, '제 2차 한일협약' 즉 을사늑약은 직접 통치의 형식이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조선을 말아먹겠다는 의도였다. 따라서 조선 정부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게 뻔했는데, 이에 일본은 각지에서 집결한 대규모 일본군을 경운궁(덕수궁)에 배치하고 조선의 관료들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조약은 생각 외로 쉽게 체결되었던 바, 어쩌면 무장 일본군의 배치는 헛수고인 듯도 싶었다.

     

    이제 곧 조선은 주권 없는 나라가 될지 모르는 운명임에도 고종은 그 막중한 책임을 신하들에게 미뤘다. "대신들과 의논하여 조처하시오." 이토가 조약 체결을 을러대자 고종이 한 말이었다. 11월 17일, 그 말에 따라 이토는 경운궁 수옥헌(후에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뀜)으로 8명의 조선 각료를 불러들였고 그들에게 조약 체결의 찬반을 물었다. 이에 내부대신 이지용(한일의정서를 체결했던),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 찬성의 의견을 냈다. 훗날 이들은 '을사오적'이라 불리게 된다.

     

    표면상 반대는 했지만 탁지부 대신 민영기는 문안 수정 작업에 참여했으니 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법부대신 이하영은 원래부터 친일파였으니 그의 의견은 물어보나 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참정대신 한규설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조약 체결에 가표(可票)를 던진 셈이었다. 한규설은 끝까지 체결을 반대하다 수옥헌 구석 방에 감금당했던 바, 그나마 이 나라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조약이 체결된 시간은 1905년 11월 18일 새벽 1시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수옥헌(중명전) / 오른쪽 담장 뒤가 고종이 애타게 지원을 기다렸던 미국 공사관이다.
    재현된 굴욕의 현장 / 왼쪽부터 권중현, 이지용, 하야시 곤스케, 이토 히로부미, 박제순의 얼굴이 보인다.(이완용은 이지용 왼쪽에 있는데 여기선 안 보인다) 
    을사조약문

     

     

    어제 2019년 11월 22일 오후 1시 24분, 한미일 3국의 초미의 관심사였던 지소미아의 종료가 몇 시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본 NHK 방송의 속보가 전해졌다. 한국이 지소미아 종료를 안 하기로 했다는 믿기지 않는 보도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소미아의 종료를 계속 큰소리 쳐왔고, 불과 사흘 전인 11월 19일 전국으로 생방송됐던 '국민과의 대화' 시간에도 지소미아의 종료를, 당위성과 이유까지 열거하며 확신에 차 말했던 터,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들이 가짜 뉴스, 허위 보도가 아닌가를 확인하느라 분주할 즈음, 청와대의 지소미아 종료 연기 발표가 있었다. 어쭙잖은 변명과 궤변을 곁들인..... 국민들은 모두 어이없어 하고, 부끄러워 하고, 이제껏 발벗고 나선 일본 상품 불매운동을 공허해 하는데, 정부여당에서 하는 말은 '문재인 대통령의 국익을 위한 원칙 있는 외교의 승리'란다. 웃프다. 승리했기에 망정이지 나라를 잃을 뻔했다. 3일만에 국익을 위한 원칙이 변하는 나라..... 아마도 과거의 대한제국이 그러했을 터이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민들은 모두 을씨년스러웠다. 을씨년스럽다가 을사년(乙巳年)스럽다에서 나왔다 했던가..... 그런데 그 을씨년스러움이 어제도 오늘도 왜 오롯이 국민들의 몫이 되어야 하는가? 을사년에 수옥헌 바로 옆 미국 공사관에서 조약의 추이를 좇던 미국 공사관 윌러드 스트레이트(Willard Straight) 부영사는 한국 관료들의 어처구니 없는 항복을 보고 이런 글을 썼다.

     

    "한 나라의 운명이 내가 서 있는 곳 50야드 안쪽에서 결정되었다. 1200만 국민의 독립된 제국이 아무런 투쟁도 없이 일본에게 예속됨은 불가능하리라 여겨졌건만, 조선의 각료들은 서명을 마쳤다."

     

     

    중명전에서 보이는 미대사관의 한옥 지붕/ 당시 미공사관에서는 이 담장 너머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몇 번 글을 올렸지만, 나는 처음부터 지소미아 해제를 반대하는 쪽이었다. 우선 득보다 실이 많고, 미국의 압력을 버틸 수 있는 깜냥이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밀땅이 여의치 않아 항복하게 되면 얼마나 망신일까 싶기도 했고...... 그럼에도 기왕에 결정난 거 끝까지 밀어붙이기를 바라는 글도 올렸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태산이 놀랄 정도로 기세 좋게 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던 정부는 불과 석 달만에 백기를 들었다. 덤으로 WTO 제소도 포기했다 하니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따로 없다. 나는 아사히 맥주를 카스로 대신한 일 외에 아무 것도 한 게 없지만 적극적으로 불매운동을 했던 국민들은 크게 낯 뜨겁고 계면쩍다. 한 게 없는 나도 괜히 쥐구멍을 찾으며 열없게 중얼거린다. "이러니 일본이 우리를 늘 만만히 여길 수밖에....."

     

    앞서 말한대로 우리 정부가 지소미아 협정을 파기한 건 일본의 수출규제에 미국이 간섭해주기를 바래서였다. 지소미아가 아쉬운 미국 정부가 아베에게 압력을 가할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하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왔다.(더 이상의 왈가왈부는 삼가겠다)  

     

    늑약이 체결됐던 위 건물 수옥헌은 고종이 세운 왕립 도서관(King's Library)이다. 독서를 열심히 하려고 세운 것이 아니라 미국이 일본에 압력을 넣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심정에서 세운 건물이다. 고종은 미국 공사관이 자신이 편전처럼 사용하는 수옥헌 곁에 있는 것 자체로도 안심이 됐다. 여차하면 담을 넘어 미국 공사관으로 파천하면 될 것 같았기에..... (실제로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 직후인 1897년 미국 공사관 담을 넘었으나 미국이 받아주지 않자 결국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갔다. 이후에도 고종은 러일전쟁 중인 1904년과 그 이듬해, 미국 공사관으로의 파천을 시도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고종의 생각과 달리 미국은 일본 편이었다. 이처럼 고종이 아무 것도 모르고 파천에만 매달릴 즈음, 일본 동경에서는 미국 육군대장 윌리엄 태프트와 일본 총리 카쓰라 다로 간의 밀약이 성립됐다. 위에서도 언급했던 한반도와 필리핀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에의 교환이었다. 윌리엄 태프트는 그에 힘입어 1909년 시어도어 루즈벨트에 이어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됐고, 대한제국은 그 이듬해 역사 속으로 사려졌다.

     

     

    윌리엄 테프트와 카쓰라 다로

     

    카쓰라-태프트 밀약이 있던 1905년, 한반도에서는 또 하나의 웃픈 일이 있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 엘리스가 일본에 이어 조선 땅을 방문했던 것인데, 이때 고종은 서울 전역에 국기를 게양할 정도로 성대하고 극진하게 '미국의 공주'를 맞았다. 그녀에게 잘 보이면 '미국의 공주'가 조선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또 한번의 착각에서였다. 고종은 자신의 슬픈 처지를 보여 동정을 사려 했는지, 아니면 황제국의 예법을 보여주려 했는지 그녀를 명성왕후의 무덤이 있는 홍릉으로 안내했다.

     

    1905년 9월 27일의 일이었다.(그녀의 방문기간은 9월 19일에서 30일까지였다) 시종 시니컬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엘리스는 홍릉에서는 무척 밝고 즐거워보였다. 아마도 말을 타고 와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무례히도 묘역 안에 들어서와서도 약혼자, 수행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먼지를 일으키며 이곳 저곳을 훑었다. 그리고 곧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엘리스가 이번에는 봉분 옆의 석마(石馬)로 옮겨 탔던 것이었다. 그녀는 황후의 묘역에서 말과 석마를 함께 즐겼던 것인데, 이 거듭된 무례를 지적하는 조선인은 아무도 없었다.

     

     

    석마에 올라 앉은 엘리스 루즈벨트


    훗날 엘리스는 조선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원치는 않았겠으나 속수무책으로 일본에게 빨려들어가고 있는 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슬퍼보였고 낙담한 듯 보였다. 그들의 몸에서 힘이란 힘은 모두 빠져나간 듯했는데, 반면 조선의 거의 모든 땅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장교들과 병사들은..... 대조적으로 똑똑하고 유능해보였다..... 땅딸막한(squrt) 황제와 그의 아들이 나를 안내했다..... 그는 이 세상 황제 중에서 가장 황제답지 않아 보였으며 pathetic[각주:4]하고 stolid[각주:5]하게 느껴졌다. 황실에서의 그들의 존재는 이제 얼마가지 못할듯 했다."

     

    필시 그녀도 보고 듣는 것이 있었을 터였다. 그와 같은 선입견이 아니라면 알만한 처녀가 일국의 황후 묘역에서 그와 같은 무례를 범하지는 못했을 터..... 그런데 불행하게도 무례한 이 처녀의 예측은 맞아떨어졌으니 그 두 달 후 을사늑약이 체결되며 대한제국은 주권을 상실했고, 그 5년 후 pathetic하고 stolid한 황제의 나라는 지도상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렸다.

     

     

    을사늑약의 진실

     

    1. 당시 일본의 1년 예산은 2억 3천만엔이었다. [본문으로]
    2.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요동반도 영유권에 러시아, 프링스, 독일의 세 나라가 반대하여 일본으로 하여금 요동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게 만든 사건. 이 사건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이 후퇴하고 러시아 세력이 득세한다. [본문으로]
    3. 늑약은 강제로 맺은 조약을 이른다 [본문으로]
    4. 1.불쌍한 2.한심한 3.슬픈 [본문으로]
    5. 1.무신경의 2.둔감한 3.멍청한 [본문으로]

     

    댓글

아하스페르츠의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