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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양도성의 정문 숭례문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2. 4. 00:35

     

    숭례문이 대한민국의 국보 1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전에는 통칭 남대문이라 불려졌고 지금도 그와 같은 호칭이 일반적이나, 숭례문이라는 정식 이름을 되찾으려는 듯 지금은 도로표지판도 모두 바뀌었으며 인터넷 맵과 핸드폰 앱의 지명도 바뀌는 추세다.(남대문이라는 명칭은 일제가 1934년 숭례문을 '남대문'의 명칭으로써 보물 1호에 지정함으로부터인데, 1996년 역사 바로세우기 사업 이후 숭례문으로 환원시켰다)

     

    더불어 이 건축물이 대한민국 국보 1호로서의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진행중이다. 숭례문이 남대문으로 불리운 건 알다시피 한양도성 4대문의 남문이기 때문이다.(유감스럽지만 그 명칭은 일제가 부여했다) 그리고 국보 1호가 된 건 한양도성의 정문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1398년에 지어진(1448년 개축) 서울의 목조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 1376년 재건된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비롯한 무렵의 모든 목조건축물들이 국보의 상위에 랭크된 것을 보면 국보 1호로서의 가치에 힘이 실릴 법도 하다.

     

     

    숭례문 야경

     

     

    반면 한양도성의 동문이었던 흥인지문은 국보가 아닌 보물 1호다. 숭례문과 같은 시기인 태조 7년(1398)에 지어진 건물임에도 국보가 되지 못한 건 고종 5년(1868)에 전면 개축했기 때문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며 옛 모습을 상실했기에 국보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규칙과 명분을 무너뜨리는 일이 발생하였던 바, 온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2008년 방화 사건이 그것이다. 숭례문은 이후 5년 3개월의 복구 작업 끝에 2016년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문제는 2008년 화재 때 목조건축물 부분이 몽창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보 1호로서의 명분은 살아있을지 모르겠으되 가치는 사라졌으니, 이제는 한양도성 4대문 중 오히려 흥인지문이 조선의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축물이 되었다. 기존의 척도에 따라 가치를 부여하자면 오히려 흥인지문이 국보 1호가 되어야 옳을 상황인 것이다. 뭐 그럴 필요까지야 없겠지만 아무튼 숭례문은 이래저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숭례문 화재(2008년 2월 10일)

     

    구한말의 숭례문 전경

     

    현재의 흥인지문 

     

    이제는 흥인지문이 더 오래된 문이 됐다. 

     

     

    그런데 오늘 다루려는 것은 숭례문의 국보 1호로서의 가치 여부가 아니라 숭례문이 국보 1호가 된 사연이다. 사실 이 사연 역시 이제는 잘 알려져 있어 따로 포스팅할 거리는 없을 지 모르겠는데, 다만 그 말이 서로 조금씩 달라 보다 정확한 내용을 전달하자는 의미에서 다루어 보았다.

     

    우선 4대문 중 숭례문과 흥인지문이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임진년 조선 침략의 두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 덕이다. 라이벌이었던 그 둘은 목숨을 걸고 한양 입성을 경쟁했는데, 먼저 조선 땅에 상륙했던 고니시는 동래 밀양 대구 상주 조령 충주 여주를 거쳐 한양으로 입성했고, 가토는 동래 언양 경주 군위 조령 충주 용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다. 출발은 고니시가 먼저 했으나 고니시의 일본군은 충주에서 조선군과 한판 승부가 있었고, 가토는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 않았던 바, 우연찮게도 그 둘은 같은 날(1592년 5월 3일) 한양에 입성할 수 있었다.

     

    먼저 입성한 쪽은 가토였다. 그는 용인에서 북상한 후 결사적으로 한강을 도강하여 5월 3일 낮 숭례문을 통과하였고, 고니시는 여주에서 북상하여 용진나루를 건너 3일 저녁 흥인지문으로 들어왔다. 여기까지가 임진왜란 때 이야기이고, 다음은 일제시대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1916년 데라우찌에 이어 제 2대 조선 총독이 된 하세가와 요시미치는 경성 일본거류민회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선신궁이 있는 남산과 일본인 거주 지역인 용산을 잇는 대로(大路)를 건설하기로 했다. 그러자 중간을 가로 막고 선 숭례문이 방해거리가 되었던 바, 하세가와는 이 참에 한양도성 4대문을 모두 철거하기로 마음 먹는데, 그 방법이 육군 원수 출신답게 포로 쏘아 부셔버리는 것이었다. 그때 경성 일본거류민회 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남대문은 분로쿠노에끼(文綠役,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문입니다. 당시를 기념할 만한 것은 남대문 외 두 세가지밖에 없는데, 파괴해버리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문은 보존하고 성벽을 허물어 길을 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세가와는 이 제안 역시 받아들였고, 이에 숭례문은 고시니가 입성한 흥인지문과 함께 살아 남게 되었다. 나아가 일제는 조선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 1호를 내려 이 문을 조선 승전기념물로써 문화재로 등록하기까지 이르니 1934년 8월 27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 403호에 의해 조선 보물 제 1호와 2호가 되었다.(3호는 서울 보신각 종으로, 당시 조선 땅에서 국보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광복 후 각각 국보 1호와 보물 1호가 되는데, 일본의 문화재 보전령을 답습한 것임을 금방 알 수 있다.(보물 2호 자리는 일제 시대 보물 3호였던 보신각종이 계승한다. 흐~ 미친다.

    )

     

               

    조선 보물 보존령 1호를 개제한 총독부 관보

     

     

    당시 일제의 문화재 분류 방법은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로서,(이것도 지금과 같다) 당시 고적 1호로 지정되었던 포석정은 광복 후 사적 1호가 된다. 외적이 쳐들어왔음에도 왕이 술을 퍼마시고 놀다 칼에 맞아 죽었다는 바로 그 장소이다. 세상에 그런 바보 왕도 없겠거니와 그런 장소를 골라 고적 1호로 지정한 일제의 발상이 놀랍다.(일제가 말하는 고적은 '옛 자취의 흔적'이라는 뜻이니 광복 후 글자 한 자만 바뀐 사적과 내내 같은 말이다)

     

    더욱 놀라운 건 당연한 듯 이를 계승한 한국 사학자들의 사고방식이니, 앞서 '이완용과 독립협회'에서 말했던 독립문은 고적 제 58호로 등록되는데 이것은 광복 후 사적 32호가 된다.(숫자가 줄어든 건 북한의 유적이 빠졌기 때문임)

     

     

    엎어치나 매치나의 향연에 한가지 위안이 되는 건 일본 국보 1호인 교토 고류지(광륭사) 목조반가사유상과 한국의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이 같다는 점이다. 다른 건 오직 재질뿐인데, 엎어치나 매치나 일본의 국보 1호의 고향은 한국이다.(한국의 것을 가져갔거나 한국에서 보내주었거나 일본에 사는 한국인이 제작했거나/어찌됐든 불상의 재료는 한국에서만 자라는 적송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국보 1호가 단순한 등록 순서일 뿐 문화재적 가치와는 무관하다 말하고 있으나 이 또한 엎어치나 매치나다. 가치가 없는 문화재를 국보 1호로 지정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금동보살반가사유상과 일본의 목조보살반가사유상

     

     

    고류지 입구

     

     

    일본인들은 광륭사를 우즈마사고류지(太秦廣隆寺), , 혹은 우즈마사데라(太秦寺)라고 부른다. 광륭사가 있는 이 동네의 이름이 우즈마사(太秦)이기 때문인데, 신라에서 온 진(秦)씨들이 모여 살던 집성촌에서 유래된 이름이거나 혹은 절의 창건자인 진하승(秦河勝)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 같다. 진하승은 광륭사의 전신인 호코사(蜂岡寺)를 세운 신라인으로서 쇼토쿠(聖德) 태자와의 관계가 각별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절도 교토의 재력가이자 지도자인 그가 태자의 명을 받아 세웠다고 하며, 태진은 태자의 태자와 진씨의 진자가 합해진 말이라고 한다.

     

    일본인들은 그같은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오래 전 경내 안내표석에 진시황제의 후손 진하승이 세운 절이라고 했다가 이 부분을 쪼아내는 해프닝을 벌였다. 진시황제의 성(姓)이 진씨가 아니라 영()씨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던 것이다. (참고로 진시황의 이름은 영정·嬴政이다) 이 절에는 616년 신라에서 보내준 또 다른 반가사유상도 있으며, '일본서기'에는 서거한 쇼토쿠 태자를 위해 623년 신라에서 개금(蓋金)한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을 보내주었다는 기록도 전한다.

     

     

    고류지 진씨신사에 모셔져 있는 진하승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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