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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완용과 독립협회 (I)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31. 00:11

     

    이완용(李完用, 1858-1926)은 천하의 매국노로 알려져 있지만 태생으로 따지자면 사실 그는 매국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처지였다. 그 태생이 워낙에 미천한 탓이었다. 경기도 광주(지금의 분당)에서 똥지게 지고 거름 주던 이완용은 나이 열 살 때 32촌 쯤되는 이조판서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게 된다. 이호준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부잣집이었다. 하지만 정실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없었던 바,(서자 이윤용이 있었으나 서출인 탓에 대를 잇지 못함) 조선의 상속법에 따라 적자 문중의 사내아이를 양자로 들여야 했다.

     

    그런데 이호준의 일가는 대부분 양자로서 대가 이어졌던 바, 주위에는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적자 계열을 찾다보니 5대조까지 거슬러 올라, 6대조에서 갈려 나온 32촌 되는 가난한 농부 이호석의 아들 완용에게 기회가 왔던 것이었다. 본시 머리가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줄줄이 누나인 말 많은 집안 분위기에 적응해야 되는 처지이기 때문이었을까. 어린놈이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빨라 특별히 집안 눈밖에 나는 법은 없었다.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내뱉던 그의 행동거지는 분명 이 같은 양갓집 분위기가 만든 습관일 것이었다. 

     

     

    이완용의 생가 터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226-1에 있는 이완용 생가 터에 지은 집으로 올해 철거되기 전 사진이다.(사진출처: 디지털성남문화대전) 일대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예정인데, 이 터의 처리를 놓고 성남시가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후문이다.

     

    양자라도 엄연한 대갓집 아들이었으니 당연히 독선생 고액과외를 받았고, 따로 당대의 명필이었던 이용희에게 글씨를 사사했다. 그렇게 하드 트레이닝을 받은 이완용은 스물다섯 살 때 증광별시에 합격해 제 부모를 기쁘게 했다. 임오군란 이후 치러진 민심 무마용 임시시험이라 각종 불법과 편법이 난무한 과거였다고 하는데,('매천야록') 그가 컨닝을 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글씨는 분명 명필 축에 속했던지라 어지간한 답안이었으면 분명 눈에 띄는 답안지였으리라 여겨진다. 지금 남겨진 글씨를 보더라도 그는 확실히 명필이란 소리를 들을 만하다.

     

    ~ 시험은 그리 잘 보지 못했으니 3등급 답안지인 병과(丙科) 18위로, 전체 순위로는 입격자 31명 중 28위였다. 말하자면 겨우 턱걸이를 한 셈이었으나 정7품 주서(注書)에 임명됐다. 장원급제자가 가야 할 자리를 그가 꿰찬 것인데 그 아비 이호준의 발바닥에 땀이 좀 났을 것임을 보지 않아도 알 일이었다. 이호준은 그즈음 지는 해(Sinking Sun) 흥선대원군과의 연을 끊고 재빨리 민왕후 쪽으로 말을 갈아탔고, 그것은 자식 출세의 원동력이 되었으니 이완용이 정7품 주서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르기까지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사상 유래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이때 이완용은 말을 잘 갈아 탄 자의 위력을 깨달아 알게 된다.  

     

    자주 거론되는 진실게임에서 독립문 현판 글씨의 주인공이 이완용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가 쓴 것임에 틀림없다. 우선 아래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자. 1924년 발행된 이 신문에서는 교북동의 독립문을 소개하며 그것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비슷한 모양새로 건립됐다 말한다. 아울러 그것이 독립협회 서재필의 주창에 의해 세워지게 되었다는 내력을 밝히면서 '독립문'이라고 하는 현판 글씨를 이완용이 썼다고 적시하고 있다.('이완용이라는 이름이 닮은 사람이 아니라 조선 귀족의  영수인 후작 각하'라는 설명이 이어진다)

     

     

    1924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
    1897년  설립 당시 독립문. 앞에 놓인 두 개의 기둥은 영은문의 주초석이다. 
    영은문은 조선시대 중국사신을 맞던 문으로 그래서 이름도 '은인을 맞이 하는 문'이다. 독립문은 영은문을 헐고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실은 청일전쟁 때 불타 주초만 남아 있던 자리 뒤쪽에 지어졌다. 
    뒤에서 찍은 영은문 사진.  아무튼 독립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이때가 1896년이었으니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말할 때는 아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그가 쓴 것은 '독립문'이라는 전면의 한글 현판이므로 뒷면의 한문 현판은 다른 사람이 썼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볼 수 있다.('獨立門'을 썼다는 말은 없으므로) 그래서 한문 현판을 썼다고 추정되는 사람이 김가진(金嘉鎭)이란 인물이다.(주로 그의 가문에서 주장한다) 그 역시 당대의 명필이었으며 또한 독립협회의 중진이기도 하였으니 충분히 자격이 거론될 수 있는 인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래 독립문의 설립 의지와 의의를 밝힌 독립신문의 사설을 보면 현판을 쓴 사람은 김가진보다는 이완용 쪽에 힘이 실린다. 보다시피 이완용과 그의 형 이윤용은 백원(지금의 5백만원)을 냈고 김가진은 십원을 냈다.

     

    꼭 돈이 문제가 아니라 1896년 독립협회가 조직될 때의 면면을 보면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 김가진, 김종한, 민상호 등으로 이완용의 격이 높았다.(1898년에는 이완용이 2대 회장이 되고 윤치호가 부회장이 된다. 훗날 대표적 친일파가 되는 이 두 놈이 벌써 포진됐다) 따라서 붓을 잡았을 가능성은 이완용이 더 높다고 봐야 옳을 듯하다. 물론 서재필도 거론될 수 있겠지만 그는 조선사람이 아니라 자격이 없었고(따라서 독립협회 고문으로 등재됐을 뿐 위원 명부에 이름조차 못 올렸다) 게다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는 한국말도 거의 잊어버렸던 바, 글을 쓸 리 만무했다.

     

    ~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898년 중추원 외교 고문으로 초빙돼 조선 땅을 밟는다. 이후 그는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을 만들어 조선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데, 앞서 말했듯 당시의 독립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이때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서재필은 친미파였던 이완용과 영어로 소통하며 의기투합했던 바, 그의 절대적 영향을 받았고, 그것은 이완용이 친일로 말을 갈아 탄 후에도 계속됐다.(이완용은 근대식 학교 육영공원에서 초급 영어를 배웠고, 그것을 바탕 삼아 주차미국참찬관으로 워싱톤에서 2차례 근무하며 본격적으로 영어를 익혔다)  

     

     

      1896년 7월 4일자 독립신문. 밑줄 친 부분은 이완용과 감가진이 낸 독립문 설립 보조금 내역이다. 

     

    이완용은 행서와 초서를 특히 잘 썼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는 해서 역시 여간 명필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그가 쓴 '천자문'과 직지사 대웅전 현판을 예시해 보겠다. 아울러 아래의 직지사 천왕문 현판을 보면 그의 해서체가 '독립문'(獨立門)의 그것과 매우 유사함을 알 수 있다.(이완용의 자서전격인 '일당기사'에서는 그가 직지사 대웅전과 천왕문, 창덕궁 함원전 등의 현판을 썼노라 말하고 있다) 반면 김가진이 쓴 창덕궁 금마문 현판을 보면 '독립문'의 글자와 완전히 다른 글씨체임이 드러난다.

     

     

    이완용이 쓴 천자문
     직지사 대웅전 현판
    독립문 현판
    직지사 천왕문 현판 
    창덕궁 금마문 현판

     

    (너무 띄워주는 것 같지만) 이완용은 평소 주색잡기를 멀리하고 주로 독서와 서예로 자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이런 취미를 바탕으로 최초의 근대미술학교인 '서화미술회'를 건립하고, 조선미술전람회의 산파역을 하였으며 서예부분 심사위원으로 자천(自薦)하기도 한다.(그는 일본에서도 명필로 소문났던 듯 다이쇼 천황까지 비단을 보내 그의 휘호를 받아 갔다) 그는 여러 가지로 재주가 많고 또 노력하는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그와 같은 역량을 모두 나라 팔아먹는 데 매진했다. 의외인 점은 한일합방에 성공한 일제가 이 독립문을 철거하지 않고 잘 보존했다는 사실이다.(보존뿐 아니라 거금을 들여 수리하고 문화재로 지정한다)

     

                                               

    이당 김은호 화백의 졸업증서

    서화미술협회장 백작 이완용의 이름이 보인다.(출처:월간조선)

     

     

    그 이유는 첫째, 독립문이 이완용 후작의 작품이며, 둘째로는 그 독립이 청으로부터의 독립일뿐 일본과는 무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독립문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했기 때문이니,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군의 승리로써 독립문이 건립되게 된 셈이었다. 우리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지 못했다면 독립문의 건립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독립문은 청일전쟁 이듬해인 1896년 건립됐다) 일본은 그것을 강조하고 싶었고 조선인이 그것을 두고두고 기념하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니 그들 시각으로 보자면 독립문은 조선인이 세운 청일전쟁 승리 기념비요, 일본군 승첩비였다.

     

    조선 정궁(正宮)의 정문인 광화문도 아무렇지 않게 철거해버린 일제이니 그깟 독립문 하나 부셔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제는 위와 같은 이유로서 경성부 토목과로 하여금 문을 수리하게 하고(1928년/수리비용은 4,100원으로 건축비 3,825원보다 많이 들었다) 나아가 문화재로 지정하기까지 한다.(1936년/고적 제58호)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점은 3.1 만세운동 때 독립문 현판 옆에 새겨진 태극기 문양을 보고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다는 것이고, 유감스러운 점은 이 독립문을 세울 때 독립신문에서 주야장천 일본을 칭송하고 일본군의 승리를 치하하는 논설을 실었다는 것이니 필시 친일파 서재필의 의중에의 반영이었으리라.(나아가 독립신문은 이또 히로부미를 '조선 독립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라고 상찬해 마지않는다/1898년 8월 25일자 기사)

     

    흥미로운 것은 이때의 이완용은 친일파가 아니라 친일파와 싸우던 친러파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다 러시아가 힘을 상실하자 친미파가 됐고, 미국이 조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비로소 친일파가 되었던 것이니 말을 갈아타는 데 있어서는 지 아비 뺨치는 선수였다 하겠다. 친러파 이완용은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전과 더불어 사라지고, 친미파 이완용은 독립협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가 황실과 유생들에게 배척되며 자칫 역모죄를 뒤집어쓸 위기에 몰리자 모든 직(職)을 사퇴하고 사라지는데, 이후 친일파로 말을 갈아 탄 후에도 독립협회를 막후 조정해 한일합방에의 기류를 형성한다. (우- 역시 무써운 놈!)

     

     

    전차가 다니던 시절의 독립문(왼쪽 굴뚝 매연 장난아님!)

     

    이후 1979년까지 독립문은 이처럼 길 한가운데 있었으나,

     

    1979년 3월 2일 성산대로의 개통과 더불어 이전이 결정되었다. 보다시피 꼴도 사납고 교통도 방해되고 해서.... 그때 이전 문제로 참 시끄러웠다.

     

    그래서 결국 70m 뒤인 지금 이 자리로 해체 복원되었으나 이후로도 30년 동안 철제 울타리에 갇혀 있다가 

     

    2009년 10월 28일 서대문 독립공원이 조성되며 시민들 곁으로 돌아왔다. 건립된 지 113년 만으로, 돌이켜보자면 참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독립문이다. 문의 높이는 14.28m, 너비는 11.48m로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하고 한국인 심의석이 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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