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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전도비에 관한 불편한 진실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27. 06:58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인조 임금이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끌려와 항복의 예를 표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장소에 세운 청태종 홍타이지의 기념비로, 본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를 따라와 처음 이 비석을 보았을 때 허허벌판에 덩그라니 세워진 이 비가 얼마나 높고 위압적으로 보이던지.....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난 2005년경, 이 비석을 찾아 석촌역까지 왔으나 그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은행 앞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몇 번을 물었지만 실패했다.

    이후 한참을 서서 식자(識者)로 보이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찍어 물었는데, 기대에 걸맞게 그 신사 분은 주택가 골목 골목을 돌아 목적지까지 안내해주었다.(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삼전도비와 그 비를 이고 있는 거북이(귀부), 그리고 옆의 또 다른 거북이는 옛 그대로 이되 크기는 매우 작아져 있었고,(물론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또 그것이 일반 주택가 공터에 놓여져 있는 것이 매우 생경했다. 그러다 2010년 봄, 잠실 석촌호수에 갔다가 그 호수변에 놓여 있는 비와 거북이를 발견하고 다시 놀랬다. 이곳으로 옮겨온 것을 전혀 몰랐기에......


    옛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사진(출처: 중앙일보)

     

    1909년 세키노 타다시가 찍은 사진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고종의 명령으로 강물에 버려졌다는(혹은 땅에 묻혔다는) 통설이 잘못되었음을 밝혀주는 사진이다. 삼전도비는 그해 김홍집 내각에 의해 무너진 채 방치되었을 뿐이다.   

     

    1917년 일제가 다시 세운 비석

     

    송파구 석천동에 있을 때의 모습

    1956년 이승만 정부는 이 비석을 치욕의 역사라 하여 땅에 묻는데,(1956년 1월 7일 '경향신문) 이것이 1960년 홍수로 드러나자 1961년 장면 내각이 700m 떨어진 석촌동에 부지를 마련해 옮겨 세웠다.(내가 어릴 적 본 건 그때의 것이리라)

     

    현 석촌호수 서호 곁의 삼전도비

    이후 줄곧 석촌동에 있었으나 주택이 불어남에 따라 속에 파묻혀 찾기 힘들게 되고, 또 원래의 자리를 찾아주자는 여론도 있어 지금 자리에 안착되었다.(이때 두 거북 돌의 위치가 바뀐다)

     

    비석 옆의 이전 안내문에 따르면 옮겨진 날짜는 2010년 4월로, 본래의 삼전 나루와 가장 가까운 이곳으로 이전 설치했다고 한다.(1925년 '을축 대홍수'로 한강의 물길이 바뀌기 전, 지금의 석촌호수가 한강의 본류였으므로) 

     

    삼전도비의 세부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로, 잠실역 2번 출구로 나가 뒤를 돌아보면 바로 볼 수 있다.(전체 높이 5.7m, 비신 높이 3.95m, 너비 1.40m)

     

                                      

    삼전도비 전면(부분)

    전면은 만주어와 몽골어로, 뒷면은 한문으로 새겼다.


     

    삼전도(三田渡)의 굴욕, 즉 인조 임금이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 끌려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대가리를 박은 굴욕적 사건은 사실 자업자득이다. 광해군이 중립외교로써 무난히 지켜낸 나라를 반정(反正)의 무리들은 반청숭명(反淸崇明, 청나라를 반대하고 명나라를 숭배함)으로 일관함으로써 두 차례의 전란(정묘호란, 병자호란)을 불러왔고, 결국 임금이 추운 겨울 날 베옷 차림으로 강 나루에 끌려와 삼배구고두의 굴욕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찌 제 혼자만의 굴욕이던가. 그 못난 임금은 제 자신 뿐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를 욕보인 것이다. 그날의 일을 실록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청나라가 장수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가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出城)을 재촉하였다. 임금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쳐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臚唱)하게 하였다.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하러 가는 인조 임금.


    그는 곤룡포 대신 신하의 옷인 남색 융복(戎服)을 입어야 했다.



    남한산성 농성 45일 째. 성안의 식량이 바닥나고 (남한산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신남성을 점령한 청군이 행궁(行宮)을 향해 포를 쏘아대자 인조는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 성을 나온다. 인조는 청군의 요구를 따라 용포를 입지 못하고 남색 베옷을 걸쳐야 했다. 또 그들의 요구대로 정문인 남문으로 나오지 못하고(죄인인지라) 서문인 우익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하는데, 삼전 나루에 다다를 무렵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 오금이 저리구나."

    평소 운동부족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하긴 오래 걷기도 했다) 아무튼 그래서 그 동네는 지금 송파구 오금동이 됐고 '오금이 저리다'는 '(사람이) 공포감 따위에 맥이 풀리고 마음이 졸아들다'라는 뜻이 됐다.('다음사전' 정의)

     




    임금이 수항단 밑에서 세번 절을 하고 아홉 번 머리를 박는 동안  신하들은 소리 죽여 오열했다. 삼배구고두례는 청나라와 조선이 군신(君臣)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이상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인조가 항복하러 나온 서문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청나라에서 처음에 요구한 반합(飯盒)의 예(禮)를 거둬준 일이었다. 반합의 예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에게 노잣돈의 용도로 물리는 반함(飯含)의 구슬을 입에 물고 빈 관을 끌고 가 항복하는 일이었다.

     


    삼전 나루에 만들어진 아홉 단의 수항단(受降壇, 항복을 받는 단상) 아래서 인조는 치욕적인 삼배구고두를 행했지만(어떤 기록에는 수항단 위의 청태종이 머리 찧는 소리가 작다며 더욱 세게 박으라고 했다는데....) 조선의 국왕 자리는 유지할 수 있었다. 청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키지 않고 그저 속국으로 삼은 속내는 알 수 없으나 어찌됐든 조선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를 세워야 했다. 문제는 만대의 역사에 길이 남을 그 치욕적인 비문을 누가 쓸 것인가 하는 것이었으니, 정축년 3월 20일 일단은 당대 문장가 4명이 추려졌다. 장유,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이었다. 


    이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사퇴의 상소를 올렸지만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 4명은 꼼짝없이 비문을 찬출(撰出)해야 했으나 이경전은 병을 구실로 차일피일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조희일은 일부러 개판으로 써 내 고역을 모면했다. 이에 장유와 이경석의 글이 청나라로 보내졌는데, 장유는 내용 중의 인용문이 마뜩치 않다하여 탈락되고 이경석의 글을 보완해 새기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글씨는 당대의 명필 오준에게, 각자(刻字)는 신익성에게 돌아갔다.(신익성은 어깨 마비증상을 호소해 이여징으로 바뀐다)


    ~ 부제학 이경석은 자신이 비문을 짓게 된 일을 한탄하여 학문을 가르친 부모를 원망할 만큼 상심하였고 자살하고픈 심정을 표현한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차출된 사람 중에서는 나이가 제일 어렸고(이럴 때는 장유유서가 거꾸로 적용된다) 또 인조가 이것도 애국하는 길이라고 어르고 뺨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붓을 잡게 된다.(그것도 속이 상하거늘 우암 송시열 같은 놈은 개도 이경석의 똥을 먹지 않을 것이라는 막말을 해댄다) 도총관 오준 역시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비명을 쓰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자책으로 제 오른손을 돌로 찍어 평생 글을 쓸 수 없게 된다.


    비석은 1639년 12월 8일 건립되었으며, 비문에는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 식량이 떨어졌을 때 청태종이 공격하지 않고 항복하기까지 기다려준 일, 항복을 받아주고 예물을 하사한 일, 지난 날 광해군 때 후금(청나라의 전신)군을 치러 온 강홍립의 군대를 다치지 않고 돌려보내준 일, 정묘호란 때 까불고 세폐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청태종이 곧바로 공격하지 않고 말미를 준 일, 강화도를 도망갔던 빈궁과 왕자 등을 포로로 잡았으나 다치지 않도록 보호하여 돌려보내 준 일, 나라가 멸망할 수 있었음에도 종묘사직을 보존케 해준 일 등을 칭송해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찬(讚)했다.


    하늘은 서리와 이슬을 내려 만물을 익게 하고 키우시는데, 황제께서 그걸 본받아 위엄과 은덕을 함께 베푸셨도다. 황제께서 조선을 정벌할 때 십만 대군으로써 맹호출림의 기세로 오셨도다. 참전 군사들은 서역 사막의 군사들로부터 북방민족들까지 망라되어 창을 들고 덤비니 그 기세가 매서웠도다. 그러나 황제는 매우 인자하시어 은혜로운 말씀을 내렸으니 그 열 줄의 글은 준엄하고도 자애로웠다. 처음에는 어리석어 알지 못해서 근심을 끼쳐드렸으나 황제께서 명철하신 명을 내리시니 마치 잠 속에서 깨어난 듯하도다. 우리 임금께서 삼가 승복하여 신하를 거느리고 항복하니 이는 황제의 위력이 무서워서만이 아니라 큰 덕에 귀의하였음이리라.


    그 갸륵한 마음을 황제께서 칭송하시니 은택과 예우를 흡족히 하시고 얼굴을 펴고 무기를 거두셨도다. 게다가 준마와 경쾌한 갑옷을 하사하시니 장안의 모든 남녀가 그 덕을 노래하였다. 우리 임금이 한양으로 돌아간 건 황제의 배려였고, 또한 군대를 거두어 우리 백성을 살리시니 흩어진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농사지으라 권고하셨도다. 국가는 옛 모습을 되찾고 사직은 새로워지니 마른 뼈에 살이 다시 붙고 얼었던 풀뿌리가 봄을 만났음이다. 드높은 비석을 큰 강가에 세우니 삼한이 존속함은 오직 황제의 덕이기 때문이도다.



    삼전도비 후면 내용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반전이 있다. 우리는 모두가 이 비석이 청태종의 요구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청나라에서 이와 같은 요구를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인조가 스스로 수항단을 수리하고 그 곁에 비석을 세우고 화려한 비각과 담장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청나라도 그와 같은 자발적인 굴종을 기특하게 여겨 칭찬했다. 인조는 혹시라도 청나라가 마음이 변해 자신을 폐위시킬까 전전긍긍했으니 마침내 이와 같은 기막힌 발상을 하기 이르렀다.

     

    게다가 여차하면 하나를 더 세우려 준비까지 하였으니 삼전도 비 옆에 놓인 용도 애매한 거북돌은 그와 같은 유비무환의 마음이 아니었나 여겨진다. 한마디로 알아서 기었다는 증거이다. '승정원일기'에 청나라 사신이 비문 내용에 까다롭게 간섭했다는 내용이 있어 흡사 청나라가 비의 건립을 요구한 것처럼 여겨지나,(비석 옆의 안내문에도 그렇게 써 있다) 그들이 먼저 요구했다는 내용은 찾기 힘들다.


     

    두 마리 거북


    삼전도비 안내문

    밑줄 친 설명은 무슨 소린지 당최 알 길 없다(필요 없는 걸 왜 남겨 놨는지....? 그리고 청나라 사신이 온 건 비가 완공된 이후다) 아울러 이 안내문은 청태종의 요구로 비가 세워졌다는 낭설을 피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비무환은 자주국방에서 오는 것만은 아닌 듯, 지난 2017년 12월 5일 베이징 인민대회장에서 열린 신임장 제정식장에서 노영민 주중대사도 이와 같은 행태를 보였다.(☞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II'/지금 노영민은 대통령 비서실장이다) 사대주의자들은 늘 이런 식이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자 폭행이나, 형편없는 비하 발언 뿐이다.(☞ '우리의 사대주의 언제까지 갈 것인가? I') 또 하나, 그때나 지금이나 닮은 것은 언제나 반반으로 나뉘어 싸우다 세월 다 간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이제는 국민들조차 반으로 나뉘었다.(이제는 국민들까지 위정자들에게 휘둘린다)


     

    "척화는 실천 불가능한 정의이고 화친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다."('남한산성'의 작가 김훈) 어쩌면 이 같은 불합치가 우리 민족의 숙명인지도.....


    삼배구고두례를 마친 인조 임금은 비로소 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실록은 그날 일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사진은 창경궁 명전전)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임금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 양화당으로 나아갔다.(사진은 창경궁 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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