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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과 홍종우 (I)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9. 29. 23:57

     

    갑신정변의 주역 고균(古筠) 김옥균(1851-1894)은 요즘 말로 스팩이 화려한 인물이었다. 우선은 출신이 명문 안동 김씨 집안으로 아버지 김병태는 관직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자결해 절의를 보인 문충공 김상용의 직계 후손이었다. 옥균은 나이 5세 때 '월수소조천하'(月雖小照天下, 달은 비록 작으나 온 천하를 비춘다)라는 글을 지어 동네 훈장인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옥균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병태는 자식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 그 이듬해 옥균을 서울 북촌에 사는 5촌 숙부 김병기의 양자로 보냈다.(김병기가 강릉부사로 갔을 때 옥균은 그를 따라 강릉으로 갔다가 16살 때 북촌으로 돌아온다) 옥균은 그러한 아비의 뜻을 충분히 발현하였으니 1872년 불과 22살의 나이로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이후 옥균은 홍문관 교리 등 청요직(淸要職)[각주:1]을 두루 거치며 조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이로 부각됐다.

     

     

     

    강화도 김상용 순의비

    병자호란 때 빈궁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이 함락되자 문루의 화약을 폭파시켜 순절하였다. 이 비는 그 일을 추모해 세운 것인데, 왼쪽 것은 숙종 때, 오른쪽 것은 정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김옥균이 살던 집 터

    서울 북촌로길 정독 도서관 내에 있다. 옆 집에 살던 소년 서재필은 김옥균을 따랐다가 갑신정변까지 함께 한 듯 보인다. 

     

    31살 때의 김옥균

    1882년 수신사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갔을 때 나가사키에서 찍은사진이다.

     

     

     

    게다가 시·서·화에 두루 능했고,(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도피했을 때 글씨를 팔아 생활할 정도였지만, 명필이라기보다는 이름값이 포함된 듯하다) 가무(歌舞)와 바둑 같은 잡기에도 능해 여러 일화를 남겼는데, 특히 본인방(本因坊) 슈에이(秀榮)와의 친교는 유명하다. 아무튼 고균은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호방한 사람이었으니, 그와 같은 성정은 9년 간의 일본 도피 시절, 일본 정부에게 찬밥 신세를 당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웠던 일본 정부는 그를 오가사와라 제도와 홋카이도로 유배 보내기도 했다) 어찌보면 좀 단순한 구석이 있는 고균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머리는 비상했고 무엇보다 인간 친화력이 좋았다.

     

     

    오가사와라 제도의 위치

    일본 정부는 이 망망대해의 섬에 망명 2년 차의 김옥균을 유폐시킨다. 겉으로의 명목은 조선에서 파견된 자객(지운영을 비롯한)의 암살로부터의 보호였지만 이용 가치가 다한 고균에 대한 처리법이기도 했다. 당시 오가사와라는 1년에 단 4차례의 정기여행선이 다니는 절해고도로 요코하마에서 21일이 걸렸다.

     

    오가사와라 전경

    김옥균은 이 섬에서 2년 간 유폐당했는데, 여기서 만난 와다(和田延次郞)라는 소년은 고균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죽을 때까지 그를 보좌했다. 아울러 본인방 슈에이가 3개월을 머물며 고균의 무료함을 달래주었던 바, 고균의 인간 친화력은 매우 뛰어났던 듯하다.(당대 최고의 바둑 고수였던 슈에이는 고균이 홋카이도에 유폐됐을 때도 찾아와 6개월을 함께 지냈다) 

     

    김옥균의 바둑판?

    김옥균의 기력을 알 수 있는 기보가 1992년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됐다. 그는 본인방 슈에이와의 대국에서 6점 접바둑을 두어 230수만에 불계승을 거뒀다. 고균의 기력은 아마츄어 4단 정도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위 한국기원 소장의 바둑판은 고균이 일본의 기반(바둑판)장인에게 구해 친구인 미야케(三宅)에게 선물했다 알려져 있는 물건인데, 계속 진위를 의심받고 있다. 무엇보다 고균의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 망명 시절의 김옥균과 글씨

    사진은 1885년 그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시절이고, 비문의 글씨 역시 그즈음의 것으로 그 비문이 비림박물관에 보관됐다.

     

    김옥균의 연인 스기타니 다마(杉谷玉)

    고균은 홋카이도 연금 시절(1888년 8월~1890년 4월) 류머티즘의 치료를 위해 하코다데 온천에 들렀다 그곳 기생 스기타니를 만난다. 스기타니는 당시 24-5세의 미인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하코다데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한다. 고균은 연금이 풀려 도쿄로 돌아올 때 스기타니와 동행하는데, 1894년 고균이 상해에서 살해되며 인연은 끝이 난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동지들을 모아 갑신정변을 일으키지만 실패한다. '3일천하 김옥균'은 아동 가요에까지 나오는 유명한 갑신정변 실패담이다. 지금껏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와 김옥균에 대한 인물평은 호사가들의 단골 소재인데, 지금은 예전보다 평가절하되어 혹자는 매국노라는 혹평을 하기도 한다. 비단 매국노의 혹평은 아니더라도 '나라를 독립시키겠다는 놈이 외세(일본)를 등에 업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소리 만큼은 피하지 못한다. 나아가 같이 혁명을 일으켰던 서재필도 훗날 이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김옥균이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지했다."

     

    하지만 유길준의 판단은 다르다. 서재필의 생각은 그가 미국물을 먹고나서 고착화된 것일 뿐, 당시의 민중들은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는 조선을 지독히도 괴롭혀 온 청국의 세력부터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 그들을 몰아낼 수 있는 길은 오직 일본의 힘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는 별나게도 일본이 청군의 힘을 당해내지 못했던 것이니, 훗날 고균도 고종에게 편지를 써 이런 사정을 하소연했다.

     

    "또 신들이 당시 외세를 빌렸다고 평하는 자가 있사오나 이것은 당시 안팎의 사정으로 보아 만부득한 데서 비롯된 것을 폐하께서도 깊이 아시는 바가 아니옵니까?"

     

    고균의 생각은 확실히 그러했다. 무려 500년 간이나 이 땅을 지배해 온 중국을 몰아내고 자주국이 되는 것! 이것이 고균의 첫 번째 목표였다.(더욱이 당시의 청나라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해 주종관계를 굳히려 애썼고, 특히 원세개의 오만방자함에 대한 반발이 컸다) 그의 두 번째 목표는 당연히 부국강병으로서, 이는 1886년 6월 그가 고종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에서도 잘 드러난다.

     

    "과거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가장 빼어났으나 지금은 모두 폐절(廢絶)되어 그 흔적을 찾을 길 없습니다. 우리 조선이 지금 이 상태로 계속 지속된다면 가장 뒤떨어진 나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이 자주국이며 부강한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청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며 다음으로는 과학 입국(入國)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것이 고균의 확고부동한 생각이었다. 아울러 그는 편지에 '청국과 일본은 모두 신용할 수 없는 나라로 조선은 결코 이들에게 의지해서는 안 되며, 밖으로는 구미 제국과의 교제에 힘쓰면서 안으로는 내정을 개혁해 힘을 기르는 것이 급선무'임을 강조했으니 이것은 그가 평소 주위에 하던 말과도 같았다.

     

    "일본이 영국을 배워 부강해져 지금은 동양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소. 지금 구라파(歐羅巴)에서 영국에 맞설 수 있는 나라는 프랑스뿐인즉 우리는 프랑스를 배워 부강해져야 하오"

     

    유감스럽게도 전해지지 않지만 당시 젊은이들의 열독했다는 '기화근사'(箕和近事,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비교 분석한 책)에는 이와 유사한 내용이 써 있지 않았을까 한다. 이러한 고균의 생각은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수록된 개혁 정령(政令) 14개 조항, 1, 2, 3번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1. 청나라에 붙잡혀 간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에 모셔온다.(청나라에 바치던 조공의 허례는 의논하여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그에 입각해 관(官)을 택하고 관으로서 사람을 택하지 않는다.(※ 관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지 못한다)

    3. 전국적으로 지조법(地租法, 토지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의 곤란을 구제하며 아울러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갑신정변 때 개화당이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데 동원한 병력은 이규완을 비롯한 장사 50명과 서재필을 필두로 한 토아먀 사관학교 출신의 사관생도 150명이 전부였다.(본시 박영효는 자신이 광주유수로 있을 때 관할하던 남한산성 수어청 군사 1,000명 정도를 양성해 동원시킬 생각이었으나 김옥균이 일본에서 차관을 빌리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렇듯 그들은 쿠데타에 있어 일본군의 힘을 빌림 없이 자력으로 모든 일을 처리했으나, 조선에 주둔해 있는 1,500명의 청군이 공격해올 경우 이를 막을 재간이 없었던 바, 어쩔 수 없이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郞)의 협조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군은 소임은 왕궁 호위와 청군에 대한 방어에만 국한시켰고, 수구파 인사들의 제거와 내정 개혁에는 관여하지 못함을 명시하고 동의를 얻어냈다. 쿠데타가 자주적이 아니고 외세 의존적이었다 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갑신정변의 현장 우정총국 건물

    1884년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김옥균의 개화당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화삼아 수구파 대신들을 처치하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 쿠데타는 멋지게 성공하지만 이틀 후 청나라 군대가 개화파들의 무력 진압에 나서고 힘에 밀린 일본군대가 달아나면서 개화당 정부는 3일만에 막을 내린다.

     

    갑신정변의 또 다른 현장 주한중국대사관 건물.

    실제로 고종의 요청을 받은 청군이 이곳으로부터 출동했으나 방어를 책임지겠다고 한 일본군이 무기력하게 철수하는 바람에 반란은 실패로 돌아간다.(임오군란 이후 청군이 내내 주둔하던 자리에 중국대사관이 세워졌다. 광복 후 자유중국대사관이 세워졌던 곳에 2009~2012년 중국대사관이 신축됐는데, 노동자는 물론이고 모래 한 알까지도 중국에서 건너왔다)

     

    갑신정변의 주역들

    쿠데타 실패 후 일본에서 찍은 사진이다. 앞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인데, 흔히 다섯 주역으로 꼽는 홍영식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홍영식은 박영효의 형 박영교와 함께 고종을 호위하다 원세개의 청나라 군대에게 목숨을 잃었다. 창덕궁을 탈출해 천신만고 끝에 도일(渡日)에 성공한 이들의 얼굴에서는 재기의 의지가 넘치지만 그런 기회는 결국 오지 않았고, 이후 이들은 각자도생으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갑신정변을 박살낸 위안스카이

    1882년 임오군란 때 상관인 우장칭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위안스카이(원세개)는 갑신정변 때 개혁당을 진압하는 공을 세운 후, 리훙장에 의해 주차조선교섭통상의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25살 때이다. 이후 조선 조정을 제멋대로 농락한 그는 말을 탄 채 궁궐을 출입하고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기도 하였으며 왕실가의 처녀와 그 시녀를 함께 첩으로 삼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패역함을 일삼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전쟁을 피해 귀국한다.

     

     

     

    고균의 생각은 다분히 이이제이(以夷制夷)적인 것도 있었다. 또한 시대를 읽는 흐름도 뛰어났으니 그는 갑신정변 직전 베트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청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계기로 동양의 질서가 재편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동양진출을 예상해 그들의 힘을 빌려 중국을 제압하는 방법을 고종에게 진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일본에 배신당한 이후로는 오히려 중국의 힘을 빌려 조선을 개혁시킬 생각을 하였던 바, 중국의 리훙장(李鴻章)을 만나 변화를 모색해보려 했다. 그리하여 1894년 3월, 일본에서 만나 여러 편의를 입은 조선인 홍종우(洪鍾宇)와 함께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게 되는데.....

     

    뿐히 일본의 침략 의도를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받는다.

    훗날 서재필도 정변의 실패 이유로 두 가지를 지적했는데 첫 째는 개화파들이 일반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외세 특히 일본을 너무 쉽게 믿고 의존했다는 것을 꼽았다.



    출처: https://oldconan.tistory.com/35215 [올드코난 (Old Conan) 세상사는 이야기]

    *2편으로 이어짐.

     

    1894년 3월 상해로 출발하기 전 나가사키의 우에노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

     

     

    1. 학식과 문벌이 있는 사람에게 내리는 삼사(홍문관 사헌부 사간원)의 중요직책으로 조선시대의 엘리트 코스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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