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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과 홍종우 (II)
    우리역사 비운의 현장을 가다 2019. 10. 1. 23:58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경, 중국 상해 뚱허양행(同和洋行)의 한 호텔 방에서 고균 김옥균은 세 발의 총을 맞고 절명했다. 범인은 일본 동경에서 이곳 상해까지 고균과 동행해서 온 홍종우(1850-1913)로, 협력자가 아닌 자객으로서의 정체를 비로소 드러낸 것이었다. 홍종우는 방문을 연 후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고균을 향해 그대로 총을 발사했는데, 첫 발은 그의 뺨을 관통했으며 다음 발은 복부, 마지막 한 발은 어깨에 맞았다. 자객 홍종우는 현장에서 도망쳤다 다음날 오후 체포됐다. 당시 고균의 나이는 43세였으며 홍종우는 44세였다. 당대의 풍운아는 그렇게 갔다.

     

    고균이 상해로 간 것은 홍종우의 유인책에 빠진 탓이었다. 홍종우는 자신이 중국의 최고 실력자 리훙장을 잘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의 친구라며 그를 통해 리훙장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고균은 마침 당시 주일공사였던 리훙장의 아들 리징방과의 교류가 있었던 바, 이 기회에 리훙장을 만나 자신의 삼화주의(三和主義)도 피력하고, 중국을 통한 조선의 개화도 추진하고픈 마음이 솟구쳤다. 홍종우는 민비가 보낸 자객 이일직에게 회유된 자로 고균의 목숨을 지척에서 노리고 있었으나, 고균은 그가 개국론자이며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데만 주목했을 뿐 다른 어떠한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워낙에 사람 좋아하는 성정 탓이리라)

     

    당시 고균은 동경에서 연인 스기타니(☞ '김옥균과 홍종우 I')와 살림을 차리고 일본 우익 인사들과 술독에 빠져 살던 시절이었다. 박영효와 윤치호는 그런 그를 나무랐으나 사실 그 외에는 고균이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또 10년 망명의 시간 동안 예전의 추상같던 의기도 사라진 듯보였으니 이제는 삼화주의(三和主義)라는 것을 주장하며 이와다 슈사쿠라는 일본식 이름도 아예 이와다 미와(岩田三和)로 바꿨다.(필시 당시 교류하던 석학 후쿠자와 유기치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리라)

     

    삼화주의는 한·중·일 삼국이 서로 협력하여 평화롭게 잘 살자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가진 이론이었다. 그럼에도 고균은 '흥아지의견'(興亞之意見, 아시아를 부흥시킬 의견)이라는 것을 만들어 삼화주의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듯 떠들었는데, 그의 주변에서는 오직 홍종우라는 낯선 자만이 이 이론을 경청하고 호응했다. 고균이 술독에 빠져 총기를 흐린 탓도 있겠으나 사실 그쯤되면 홍종우를 멀리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는 결국 그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홍종우가 고균을 이곳 상해까지 유인한 이유는 일본 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아서였다. 그리고 그 계략이 전부 통해 홍종우는 국사범을 처단한 자로, 김옥균의 시신이라는 뜻하지 않는 선물을 안고 귀국할 수 있었다.(일본 우익들은 고균의 시신을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청국이 막아 성공하지 못했다) 4월 12일 홍종우가 귀국하자 고종과 민비는 쌍수를 들어 반겼고, 조정의 대소신료들도 모두 영웅 취급을 하며 상석으로 모셨다. 이제 막 홍종우의 시대가 열리려는 참이었다.

     

    ~ 청국 조사관에게 '김옥균은 대역죄인이고 자신은 국왕의 명을 받아 대역죄인을 처단한 조선 관원'이라는 홍종우의 주장은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그는 북양대신 리훙장의 명으로 풀려나 1894년 4월 12일 청나라 남양함대 소속 웨이징하오(威靖號)를 타고 편하게 인천까지 오게 되고, 그 이튿날 조선 기선 한양호로 바꿔 타고 서울 양화진에 도착한다.

     

     

    작자 미상의 김옥균 사살도 /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자치통감>이 이채롭다.
    사살 직전 김옥균이 읽었다는 <자치통감> / 김옥균은 리훙장을 만나 <자치통감> 속의 일화를 화제로 삼으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김옥균을 상해로 끌어들이기 위한 홍종우의 모략일 뿐 리훙장과의 자리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화가 고쿠니마사가 그린 '김옥균 조난사건'(1894)
    뚱허양행이 있던 상하이 철마로(鐵馬路)
    홍종우가 타고 온 위정호와 같은 제원의 어원호(馭遠號)

     

    홍종우는 금의환향한 반면 고균의 시신은 한강 양화진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의 몸뚱이는 여섯 조각났고 머리는 효수됐는데, 그 앞에는 '대역부도옥균'(大逆不道玉均)이라는 홍종우의 글씨가 걸렸다. 그의 조각난 시신은 전국으로 보내 조리돌려졌으며 간이 내어진 몸뚱이는 한강에 던져졌다. 각국 외교관들은 이 전근대적인 행위를 비난하며 말렸지만 조정은 듣지 않았고, 고종은 오히려 이 날을 축하해 외국 공사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다. 그들 앞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궁 안에서는 민비가 따로 축하연을 가졌다.(민비는 누구보다 이 일을 기뻐했다) 아울러 이날, 오랜 시간 옥 안에 갇혀 있던 고균의 아비 김병태가 끌려 나와 참수됐고, 10년 전 먼저 죽은 홍영식의 시신 또한 꺼내져 부관참시됐다.

     

    ~ 이때 환관 유재현의 양아들은 고균의 배를 갈라 간을 씹어 먹었는데, 유재현은 처음에 개화당에 붙었다가 배신하고 수구당으로 간 자였다. 갑신정변 당일 개화당은 이 죄를 엄히 물어 서재필의 칼에 응징당했던 바, 유재현의 아들은 이에 대한 복수를 한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민비가 주위 사람들에게 했다는 유명한 멘트가 '매천야록'에 전한다. "(유재현의 아들은 그렇게 장한 일을 했는데) 민씨의 자식들은 무엇하노?"

     

     

    양화진 나루에 내걸린 고균의 목

     

    이 한바탕의 참극이 끝나고 남은 것은 이제 홍종우에 대한 포상이었다. 그가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에서는 벌써부터 병조판서의 자리가 논의되고 있었으니, 그가 어디까지 오를는지 사뭇 궁금한 노릇이었다.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서 쑥물 버리기도 아까워했을 정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대한제국 비서원 일기') 홍종우가 나이 40이 훌쩍 넘어 비로소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언뜻 비천한 듯 보이는 이 사내에게 한 가지 주목할만한 이력이 숨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홍종우에게 프랑스 유학은 그저 꿈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는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사히 신문사 식자공으로 일하며 스스로 유학비용을 마련했다. 그리고 1890년 12월 4일, 여섯 나라를 거치는 길고 긴 여행 끝에 마침내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한다. 꿈을 현실로 바꾼 것이었다. 그는 기메 박물관 소속의 보조연구원으로 일하며 여러 명사들과의 사귐 속에 선진 문물을 체득했는데, 그중에서는 사상가 에르네스트 르낭과의 교류도 있었다.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홍종우는 그곳에서도 늘 한복만을 고집한 민족주의자라는 것이었다.(그는 김옥균을 사살할 때도 한복을 입었다)

     

     

    파리 기메 박물관 / 유럽 최대의 동양미술품 전문박물관으로 홍종우는 이곳에서 보조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낯익은 불상들
    기메 박물관 '한국실'의 금관 / 놀랍게도 기메박물관의 '한국실'은 1893년(고종 30년)에 설립되었는데, 바로 홍종우의 노력이 깃든 곳이다. 1883년 샤를르 바라(Charles Vara) 탐사팀이 우리나라에서 수집해 간 것을 유학 시절의 홍정우가 정리했다.
    기메 박물관 '한국의 예술'(L'Art coreen) 팸플릿 모델이 된 천수관음상 얼굴
    홍종우가 번역 출간한 <춘향전> / <향기로운 봄>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며, 기타 <심청전>과 동양 점성술에 관한 책 등을 번안해 출간하기도 했다.
    기메 박물관 근무 시절의 홍종우

     

    이상을 보면 그는 분명 남다른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개화를 갈망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나 그는 그것이 왕실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른바 왕당파 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고종으로부터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한 그는 예정에 없이 실시된 문과에서 병과로 입격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로 입문하는데, (사람들은 그 과거를 '종우과'라고 불렀다) 이후 고종의 최측근 신하로서 아관파천 이후의 정국을 주도한다. 그중에서 대한제국을 세워 고종을 제위(帝位)에 올린 것은 홍종우의 가장 큰 공이니 광무(光武)라는 연호를 제정한 것도 바로 그였다.

     

    97년 8월 대한제국이 수립된 후 그는 비서원승이 되었고, 이후 의정부 총무국장, 평리원 판사, 중추원 의관 등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대한제국 국정을 주도했다. 그의 정책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국내 유치(幼稚) 산업 보호와 외세의 침탈 방지에 모아졌는데, 객관적으로 볼 때 황국협회의 보부상들을 동원해 만민공동회를 박살내고 독립협회를 핍박한 것 외에 큰 과오는 없어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평리원 재판장으로 있을 때 국사범으로 복역하다 탈출한 독립협회 회원 이승만을 구해준 일이었다. 신문 결과 이승만에게서 애국충정 외의 다른 죄를 발견할 수 없었던 바, 무기징역으로 목숨을 연명시켰는데, 반면 같이 탈옥했다 붙잡혀 온 최정식은 사형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02년 영일동맹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확대된 반면 황제 측 인사들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줄어갔던 바, 1903년 1월 느닷없이 제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바야흐로 내리막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본인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을 터, 1905년 4월 홍종우는 제주목사직을 사직하고 야인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55세 되던 때였으니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꼭 들어맞는 시기였다. 이후 그의 행적은 명확지 않으나 1913년 1월 2일 63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은 분명하다. 공통적으로 말하는 그의 불행한 말년에는 역시 남다른 사연이 숨어 있을 듯하나 드러내 밝혀진 것은 없다.

     

    ~ 3.1 운동을 이끈 33인 중의 한 사람인 오세창의 회고에 따르면 홍종우는 말년에 "인천에서 세인들의 냉소 속에 굶어 죽다시피 했다"고 한다. 서울 필운동에서 걸인이 되어 다녔다는 주장도 있다. 1916년 당시 일본인들이 들은 바에 따르면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목포에서 숨어 지내다 백성들에게 잡혀 이마에 먹물로 '무상(無常)'이란 글씨가 강제로 새겨졌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지만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되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신은 경기도 고양군 아현리, 지금의 만리동 일대 환일고등학교와 소의초등학교 근처의 봉학산(鳳鶴山) 공동묘지에 묻혔다.(출처: 조재곤 저/'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end -

     

     

    천지연 폭포 홍종우의 각자 / 천지연 폭포 관람로가 끝나는 곳, 관람객의 출입을 제한하는 철책이 있는 건너편 암벽에 '목사 홍종우의 이름과 날짜가 훼손 없이 명확히 남아 있다.(牧使 洪鍾宇 郡守 蔡洙康 光武癸酉九月二十七)
    홍종우의 이름을 찾을 수 있는 또 다른 곳 / 제주시 용연 계곡의 절벽에도 홍종우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화문 기념비전 / 비전(碑殿) 안 비석의 정식명칭은 '서울 고종 어극 칭경기념비'로 쉽게 말하자면 대한제국 초대황제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해 세운 비각이다. 조선호텔 후원의 황궁우와 함께 제국의 흔적이 남은 몇 안 되는 유적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려는 홍종우의 몸부림이 담긴 곳이다.
    도쿄 아오야마 공원묘지에 있는 김옥균의 묘 / '비상한 능력을 갖고 비상한 시기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은 사람 '(嗚呼 抱非常之才 遇非常之時 無非常之功 有非常之死)이라는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다. 고균의 추종자였던 가이군지(甲斐軍治)가 그의 머리카락을 구해 와 묘를 만들었다.(심지어 그는 김옥균의 묘지 옆에 묻혔다) 묘지 전체의 이장 때문에 최근 무연고 묘지로 고지됐다는데 지금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 이 무덤은 없어지고 그 안의 머리카락이 충남 아산에 있는 부인 묘와 합사됐다는 소문이 맞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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